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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상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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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6년 03월 169호
불국토의 성역으로 알려진 경주 남산은 언제나 나에게 신성함과 그리움으로 찾아든다. 천 년 세월 이전부터 눈보라와 비바람을 견디어 온 불국토의 상징인 석탑과 불상들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그 자리에서 삼라森羅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경주 남산의 유적을 순례한 지도 벌써 육 년이 넘었건만, 늘 일행들과 함께 하여 머물었던 터라 못내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다가 지난해에야 비로소 홀로 며칠을 남산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솔밭이 무성한 삼릉에서 냉골 계곡을 따라 오르며 봄날의 정취를 한껏 누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남산은 암벽과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산으로서 봄이 사계절 중 가장 남산다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따라서 \'남산의 진달래와 소나무\'가 좋기로 지난 연하장은 이것으로 썼었다. 노오란 생강꽃과 산수유가 해묵은 억새 위에 새날의 햇살을 피울 때 바위틈엔 어느 새 수줍은 듯 연분홍 진달래가 솔바람에 한들거린다. 마침내 만상의 봄은 연기緣起의 모습으로 투명하게 살아 오른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보며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보되 부러워하는 일은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한다.
이양하의 \'나무\'

어찌 화신花信의 설레임만큼이나 경배의 산을 오르는 이의 가슴에 배어드는 희열이 없겠는가. 땀방울을 훔칠 때쯤이면 어김없이 탑과 불상들이 골짜기마다 드러나고,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사람들의 성심을 읽을 참이면 어느 덧 금오산 중턱의 상선암에 오른다. 상선암은 삼릉에서 금오산을 향해 오르는 이들에게 한 모금의 감로수를 제공하는 암자로 불자가 아니더라도 꼭 다리품을 쉬어 가는 곳이다. 암자는 해방 뒤 박배월 스님이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산승을 거쳐 그의 아들 박태진이 지난해까지 머물다 지금은 곽해일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지난봄 이틀을 암자에서 머물며 마애불상과 상선암이 바라보이는 바위산에서 꽃샘바람 속에 화첩을 펴고 먹을 갈았던 기억이 난다. 바라볼수록 상선암 마애대불은 위엄이 넘쳐나고 조형감이 새로운 것이 두상의 양각과 옷주름의 음각선이 대비 속의 조화로서 신라인의 솜씨와 불성을 가늠하게 하였다. 남산에서도 제1경을 다툰다는 이 곳의 선경仙境은 배리벌판이 바위산 너머로 아스라이 내려다보임으로 마치 천상에 떠 있는 듯한데 그 산을 넘어가는 새 떼를 바라보며 자연 속에 머물 수 있었던 내 삶의 아름다운 시간이 문득 그립다. 사흘 동안 산중에서 떠돌다 산을 내려가려고 상선암을 다시 찾아 목을 축이는데 뜨락의 붉은 살구꽃은 그새 하얗게 번졌다. 사람이 단지 느끼지 못할 뿐 꽃이 피듯 세월 또한 이처럼 다투어 흐르는가. 진달래 향기와 솔바람 속에서 영겁의 세월과 찰나의 순간을 이처럼 절감하기도 쉽지는 않을 성싶었다. 어쨌든지 이 경주 남산의 바람은 이 뒤로도 영겁의 시간으로 흘러야 할 바람일진대 요즘에 와서 찰나의 순간으로 머물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니……. 고속전철이 어디 어떻게 더 빨리 세월을 다투어 찰나의 착각과 부끄러움으로 남으려 하는지. 시비하는 사람들 남산에 올라 상선암에서 감로수를 마시고, 봄날 진달래와 솔바람 속에 선경을 바라보며 하룻밤만 묵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