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불사와 역경불사
운허스님 원력의 양대 축은 인재 불사와 역경 불사였다. 정화 뒤에 해인강원의 초대 강주를 지내면서 지관스님(해인사), 월운스님(봉천사) 같은 인재를 길러 내었다. 당신께서 스스로 정리한 연보에 따르면 1955년 11월 27일 진주 연화사를 떠나 해인사에 와서 강주를 하다가 1957년 10월 9일 해인사를 떠나 통도사로 갔다. 1961년 5월 최초로 한글로 된 불교사전을 간행하였고, 그 해 11월에 다시 해인사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1962년 연말 해인사를 떠나 서울로 간 뒤 64년부터 본격적으로 역경원 일에 뛰어들었다. 재원 확보를 위해서 미리 구독 신청을 받기도 하면서 백방으로 쫓아다녔지만 돈은 말할 것도 없고 인재 부족, 시설 부족 등 모든 조건이 여의치 않았다.
도선사에서 발원 기도를 하다
그러던 가운데 언양이 고향인 재일교포실업가가 대장경 구독신청을 해 온 사실을 발견 하였다. 풍문에 막대한 재산가라는 말도 들려 왔다. 신심도 있고 하니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청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에게서 직접 구독 신청을 받은 석남사로 내려가 인홍 주지 스님과 상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지 스님도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고 제삼자를 통해서 신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삼자라고 하는 학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분도 잘 아는 사이가 아니고 단순히 그 거사가 ‘자기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학교를 세울 때 지원해 준 인연뿐이라는 것이다. 낙심천만 이었다.
그토록 정열을 쏟으면 부처님도 보살펴 주시련만 일은 첩첩으로 쌓이고 지지 부진할 뿐 도대체 희망의 기미라고는 바늘 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해 버릴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지금까지 쌓아 온 노력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리고 누가 해도 꼭 해야 하는 일인지라 그럴 수도 없었다. 다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바로 그 길로 상경하여 얼마 남지 않은 힘을 가다듬어 부처님께 매달리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도선사 관세음보살상 앞이었다. 힘이 다하여 쓰러지는 날까지 기도 하기로 했다. 관세음보살님께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뚫어지게 관음보살을 바라보며 역경사업의 원만성취만을 발원했다.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기를 열나흘. 아니나 다를까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 나타났다.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가기 시작했다. 인홍스님이 이후락 거사와 운허스님의 상면을 주선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인연의 화합으로 국가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동국역경원이 만들어 졌다. 고려대장경을 근본으로 하고 더러 고려대장경에서 빠진 경전 및 한국 고승의 저술을 망라하여 번역하기로 일의 범위를 정하고 기간은 오십 년으로 잡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한글 대장경 첫 권이 인쇄되어 나왔다. 지금 올해(1999) 안에 모든 번역을 마무리 짓기로 내부방침을 정해 놓은 상태이다.
한글대장경의 번역 원칙 번역을 위하여 ‘역경예규譯經例規’를 만들었다. 문장은 순국문 구어체의 현대문을 사용하고 문체는 간결체를 바탕으로 하여 장중미를 갖게 하며, 시방(十方) 과 같이 관용화 된 어휘들은 관용음대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호칭도 부처님의 지청은 ‘나’로 제자들의 지청은 ‘저, 저희들’로 하고 부처님께서 남을 부르는 형식은 제자나 아랫사람, 외도는 ‘너, 너희, 너희들 , 보살, 왕족, 귀족, 바라문의 지도자급, 집단군중에게는 그대, 그대들’로 통일하였다. 한자는 괄호 안에 처리하며, 설법, 문답 등 대화의 인용은 『』 를 사용하며, 설법과 문답 등의 대화 속에 나오는 재인용은 「」 를 사용하되, 게송은 「」 속에 넣지 않는다. 성어구成語句나 특별한 고사숙어는〈〉안에 넣는다. 범어의 표기 원칙은, 첫째, 땅 이름과 사람이름은 한역음을 취하지 않고 원어를 우리 글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사르나트;塵野苑, 아난다阿難). 둘째, 술어는 관용음대로 적는다(보리;菩提 열반;湮槃). 셋째, 원음을 따르되 범파어梵巴語 가운데에서 관용음에 가까운 원음을 취해 적는다(반야;般若). 다만 경전 이름은 한역음을 그대로 읽는다.
그러나 역경을 하는 과정에서 이 예규는 번역의 실제와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씩 바뀌고 보충되었다. 1966년8월 해인사에서 일 주일 동안 ‘불경 용어 심의 회의’가 열려 250개의 단어를 심의한 뒤로 4년 동안 1,600여 개의 용어를 심의하여 제정하였다. 이때 근사남近事男, 근사녀近事女의 번역어를 신남信男, 신녀信女로 바꾼 것과 함께 범어인 우바새, 우바이를 함께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공업共業을 ‘함께 업’ 별업別業을 ‘따로 업’이라고 해서 짓는다고 하여 수식어를 극도로 절약함으로써 숙어화熟語化 히거 있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와 술어의 번역 원칙은 경우에 따라 때로는 낯선 느낌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문장 속에서 잘 융합되지 않고 딱딱하여, 자연히 번역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쓰이기도 하고 쓰이지 않기도 한다. 언어란 사용하는 대중(言衆)의 정서가 가장 중요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심삼진「동국역경원 역경예규에 대한 소고) 월운스님 고희기념 논문집 1998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운허스님은 한글 대장경의 편찬 목적을 ‘우리 한민족이 가진 대장경이 있어야 하겠기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1960년대) 사람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나중에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미리 우리 말로 번역을 해 놓아야 한다는 미래 지향적인 역사관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늘 이런 발원을 하셨다고 한다.
“내생에도 내 마음대로 태어날 수 있다면 먼저 다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스무살까지 글을 배운 뒤에 출가하여 역경 사업을 또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