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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청마 유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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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People - 최현태(울산mbc 전 아나운서 2016년 06월 412호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도예가 유태근의 작업실은 맑은 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마당 곳곳에 커다란 옛 옹기들이 놓여있고 한쪽에는 최근 그가 몰두하고 있는 거대 항아리
일부가 설치작품처럼 놓여있다. 작업 훼방꾼인 나를 맞이하는 눈빛과 얼굴이 흙 만지는 그의 따뜻한 작업과 무척 잘 어울린다고 여기며 마주 앉았다. 올 1월 영하 20도의 강추위보다 더 매웠다는 월정사 단기 출가과정을 마쳐서일까? 그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 보인다.

“다시 가고 싶지는 않지만, 꼭 한 번 경험해볼 만한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아들에게도 권했지요. 비질한 흔적이 예사롭지 않은 절 마당에 첫 발자국을 남긴 것도, 눈 쌓인 전나무 숲길을 삼보일배한 것도, 죽을 만큼 힘들었던 3천 배도 내 인생의 한 페이지로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한 달간 오롯이 나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나이 오십이 되면 교수직을 버리고 작업에만 전념하리라던 그의 의지를 2년 더 유예한 끝에 선택한 단기 출가와 사표였다. 그는 1999년부터 문경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님과의 인연, 불교와의 인연을 맺었다.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한 달째 결석하는 학생이 있었어요. 전화를 하니 컬러링이 목탁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출석을 하는데 승복을 입은 비구니 스님인 거예요. 알고 보니 세상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신도의 강권으로 입학한 스님이었습니다. 출석 반 결석 반으로 졸업한 스님 절에 부지런히 사람들을 올려 보냈죠. 이제 법회 날 주차요원까지 필요하답니다. 신도님의 작전은 성공이었죠. 또 한 번은 대승사 어른 스님이 떡하니 입학을 하셨어요. 이미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워 보고 싶으셨대요. 지금은 보경사에 계시는데 도자기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더군요. 한번은 부산에서 전시 중에 지인을 따라 어느 스님을 뵈었어요. 찻그릇이 신통찮아 바꿔드리고 싶었으나 인연이 되지 않더니 어찌어찌 또 연결되어 찻사발을 전해드렸는데 알고 보니 인간문화재 석정 스님이셨지요.”

좋은 인연이다. 오십이 넘었다는 그의 나이를 보니 ‘당시 도자기학과로 진학한다는 것은 밥벌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시골서 자라 그런지 뭘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가운데 흙이 제일 먼저 다가왔고 선택에 망설임도 없었지요. 도자기 작업은 너무너무 좋았고 여전히 좋습니다. 저는 틈틈이 목공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데 요즘 이야기하는 통섭과 융합은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에도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는 흙을 만지기 전에 어떤 작업을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구상하고 한지에 그림을 그리고 마음을 적어가며 수많은 시뮬레이션 과정을 거친 다음에 물레를 잡는다. 그의 작업은 실험의 연속이라는 것을 대변하듯 독도의 흙이, 철책선의 흙이 사발로 접시로 항아리로 태어난다. 경일대에서 도자기 공부를 시작한 그는 일본 아이치 현립예술대학원 과정을 마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스물아홉에 만난 일본의 도자기 세계가 나를 흔들었습니다. 연구생으로 시작한 일본생활은 온몸으로 세상을 밀고 나가야 했어요. 누구의 지원도 없지, 말은 통하지 않지 해서 이삿짐센터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했지요. 1년간의 연구생과정이 끝나고 조그만 전시회를 열었는데 작품이 모두 팔렸어요. 생전 처음 손에 들어온 큰돈이었죠. 그것이 대학원 공부하는 마중물이 되었고요.”

치열하게 살아왔고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그가 좋아하는 부처님 가르침은 인연법이다. 왜냐고 물을 것도 없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인정받아 수차례 초대전을 가진 그는 지난 5월 예술의 전당에서 \'청마 유태근 보듬이 도자전\'을 가졌다. ‘보듬다’는 말과 어떤 말 밑에 붙어서 사물이나 사람을 뜻하는 ‘이’ 가 모여서 된 말 ‘보듬이’는 두 손, 두 팔로 껴안는 온유함, 용서, 화해, 겸손을 상징하며 지시, 명령, 강요, 교만과 비교되는 몸짓이기도 하다.

“월정사에서 행자 생활할 때, 살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교수로 살면서 거만하지는 않았는지, 도예가로서 교만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꿈꾸는 남북통일의 염원도 담고 세상의 모든 아픔을 보듬어 담는 의미를 작품에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이 만들어내는 무한확장성의 다음 전시가 기대된다.

도자기 다음으로 관심 있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단박에 대답이 나왔다. 요리란다. 먹는 것으로나마 공허한 마음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눈을 두는 곳곳, 사람이 모이는 곳곳, 허기진 사람들처럼 음식 이야기 일색인 요즘에 요리라니? 다음 말이 궁금하다.

“나는 제 작품이 장식장에 놓여있기보다 일상에 스며들어 삶이 아름다워졌으면 좋겠어요.
요리를 통해 나물 무침이 혹은 수프가 제 그릇에 담겼을 때 어떤 모습일지를 실험하는 거죠.
선재 스님의 사찰음식을 알리는 프로젝트에 제 그릇이 사용된 인연도 요리를 배우면서였어요. 음식디미방으로 알려진 영양 석계종가로부터 그릇주문을 받았을 때는 가슴이 뛰었어요. 사대부가의 전통 음식이 담길 그릇을 만들기에 앞서 종가를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2012년 해인사성보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가진 그는 작품을 내기에 앞서 열여덟 번 해인사를 다녀갔단다. 낮은 물론이고 늦은 밤, 이른 새벽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해인사를 만났다. 작품에 해인사의 이미지를 담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아쉬움을 보았다. 그것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판전에 들어 명상을 해보고 싶었노라고. 지금 한국 도자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에게 가장 기분 좋은 일은 무엇일까?

“가마에서 그릇들이 나올 때 가장 흥분되고 기분이 좋지요. 물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나오면 최고지만 실험 대상 작품이 계속해서 잘 나오면 약간 불안해요. 어딘가에 있을 문제점을 보완해야 하는데 그것은 실패작을 통해서만 가능하거든요.”

자신의 실패작을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은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내일을 성실하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이니 무심하게 담담하게 기다리겠지. 유리공예를 공부할 고3 아들 이야기에 이르자 그의 눈이 빛난다. 10여 년 후 아들과의 작품 콜라보레이션을 상상하는 모습에 아버지이며 작가인 두 얼굴이 있다. 작업하는 틈틈이 단기 출가 수기를 적어가는 도예가 유태근.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중년의 그가 문경의 젖줄 영강천 부근에서 흙으로 꿈을 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