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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실천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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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상 - 정승석 1988년 05월 75호
개인적 견해의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논문이라는 전문적인 진술 방법을 사용하긴 하지만, 가능하다면 전문 학도들만이 아니라 관심있는 일반인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논문이 쓰여지면 좋겠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다. 물론 이러한 일은 몇 가지의 제약으로 인해 쉽지가 않다. 논문을 평가하는 이들의 의식이 논문의 특수성을 고집하게 되고, 쓰는 당사자도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인상’을 제정하여 논문을 공모한 것은 논문의 일반화를 위한 기회 제공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글이 그러한 의도에 부합하기엔 아직 능력과 성의가 부족함을 자인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그간의 독서를 정리하는 것도 되며, 불교계로서는 부족한 글이라도 많이 응모하는 것이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해서 졸고를 제출하게 되었다. 내 글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이 분야의 해인상은 한국불교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나의 글은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불교사상사의 한 흐름을 부각시켜 현실적인 의의를 재인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관계된 선학들의 견해를 정리했을 뿐이다. 그 대상을 대승불교의 핵심적 사상인 공 (空)으로 삼았다. 공에 철저함은 무위•정이 아니라 행위•동의 적극적인 현실 개선을 낳게 된다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6바라밀은 공이 실천하는 행동 원리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샨티데바(寂天)의 ‘學處要集’으로써 입증하고자 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불교의 침체는 공을 무위 •무관심 •초탈 등으로 치우쳐 인식함에 있다는 선입감이 위와 같은 나의 논지를 이끌게 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타당성있는 반론은 충분히 예상된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불교의 교리적 완벽성이 아니라 실천적 구제력의 회복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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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I . 공의 원류
1. 중도는 곧 연기
1) 실천 중심의 중도
2) 지혜 중심의 중도
2. 연기는 곧 공
II. 반야경의 공
Ⅲ. 중송의 공
1. 공의 논증식
2. 일체긍정으로서의 공
3. 자비실천으로서의 공
Ⅳ. 공의 실천
1. 6바라밀
2. 공의 실천적 의의
맺음말
참고문헌

머 리 말

불교의 취의를 단적으로 말한다면, 불(佛) •아라한•보살 등의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고 아울러 그에 이르는 방도를 다양하게 개진함으로써, 인간 각자가 그 방도에 따라 이상적인 인간으로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고타마 붇다’가 직접 체현한 진리를 연기(緣起)•무아(無我)•공(空) 등으로 표현하고, 이러한 진리의 경지를 설명하면서 아울러 그 경지의 행동 양식으로서 중도(中道) •8정도•6바라밀 등의 실천 •수행도를 제시한다.1)
이러한 불교의 궁극 목표는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자아완성〔열반 또는 해탈〕이고,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는 진리를 체득하는 지혜와 진리를 실천하는 행동이 동시에 요구된다. 그러나 불교신앙의 행태에 있어서 실천행동의 측면보다는 지혜체득의 측면이 중시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이러한 성향이 불교의 특성으로 부각되어 있다. 더우기 무아•연기•공 등의 이법(理法)에 대한 추구는 불교를 관념적인 종교인 양 인식케 하고 있다. 이론적 체계가 탁월하고 인식론이 발달한 불교에 관념적인 성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불교의 실천적 측면이 상대적으로 도외시된다면, 이는 불교 본연의 의의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불교에 있어서는 지혜와 실천이 그 어떤 사고 체계보다도 서로 융통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부처님의 근본 교설이요 초전법륜의 내용인 증도설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중도를 보다 더 철저히 인식하기 위해 전개된 후대의 공(空)사상에서도 그 입장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공이 진리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만 주로 이해되고 강조된다면, 이는 공사상 자체는 물론이고 부처님 교설의 전체를 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일면적인 이해는 무아라든가 공이라는 개념상의 선입관에 의해 무위(無爲)의 경지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야기한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 무아나 공이라는 진리의 체현은 보다 철저한 실천행을 수반하도록 되어 있다. 필자는 본론에서 바로 이점을 구명하고자 한다.
본론의 주제인 ‘공의 실천적 의의’에서 ‘실천적’이라는 개념은 우선 ‘관념적’ 또는 ‘이론적’이라는 개념과 상대되는 의미임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공과 관련된 일련의 사상체계를 검토함으로써 이 실천적 성격을 드러내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끝으로 그러한 실천적 성격이 정형화된 행동양식의 내용과 의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결국 본론의 목적은 공사상의 역동적 기능을 재인식케 함으로써 불교의 사회화를 도모함에 있는 것이다.

Ⅰ. 공의 원류

「반야경」을 비롯한 대승 경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사상의 원류는 아함(阿含)을 비롯한 근본 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공사상을 가장 발전된 형태로 설파한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는 그의 「중송」(中領) 제24장 제l8게에서 ‘연기(綠起)인 것을 우리는 공이라 한다. 그것은 임시의 명칭〔假名〕이며, 또한 중도(中道)이다”2)고 하는데. 여기에 나타난 ‘공=연기=중도’라는 공식은 근본 경전에서 ‘중도=연기, 연기=공’이라는 양식으로 이미 표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함을 중심으로 하는 근본 경전에서 공의 기본 입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중도는 곧 연기
아함에 있어서 중도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본의 ‘히라카와 아키라’ 〔平川彰〕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3) 그는 중도설을 담고 있는 16종의「전법륜경」(轉法輪經)을 검토하여, ‘중도의 자료로서의 네 가지 형’을 경전에서의 예문과 함께 설명해 나간다. 네 가지 형(型)이란 ①고락(苦樂)중도 ②유무(有無)중도 ③단상(斷常)중도 ④중도로서의 수행도이다. 여기서 ①은 8정도, ②③은 연기, ④는37도품(道品)을 각각 지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①고락중도란 중도설의 최초의 형태로서 가장 많은 예가 발견된다.5) 그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그 골자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 특징은 한결같이 중도가 8정도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 8정도는 중도의 실천도였음을 알수 있다. ②유무중도는 남전(南傳) 경전인 상응부(相應部)의 「교계가전연경」(敎誠迦旃延經)에 설해져 있는데, 중도는 유와 무의 2변을 떠나는 데에 있다는 입장으로서, 이는 아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상이라고 한다. 이는 “여래는 이들 양(兩)극단을 떠나 中에 의해〔majjhena〕 법을설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12연기설을 채택하여 설명해 나가고 있다. 특히 후대에 나가르주나가「중송」에서 이 가르침을 인용하여 공사상을 피력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③단상중도는 연속과 단절에 대한 중도설이다. 이는 업(業)의 과보를 받는 자와 업의 관계에 있어서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 한다. ④중도로서의 수행도는 극락도(劇樂道) • 극고도(劇苦道) • 중도의 3도를 설하는 것인데, 37도품의 수행도가 모두 중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37도품의 최후에 8정도가 제시되므로, 내용적으로는 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4형을 분류하면 ①④와 ②③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이렇게 구분하는 근거로서 “①과 ④는 ‘중도’〔maj-jhima patipada〕를 설하는 것이고, ②와 ③은 ‘ 中에 의해서’〔majjhena〕라는 입장에서 중도를 밝히고 있다.”6)고 한다. 보다구체적으로 말하면, ④의 3도설은 ①과 내용이 동일한데, ①은 고락중도로서 8정도를 제시하는 입장이며, ④는 이를 확대하여 37도품을 제시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또 ②와 ③의 관계에 대해서는 “②가 공간적인 중도설이라면 ③은 시간적인 입장에서의 중도설이다.”7)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중도설의 양상에서 ①④는 중도의 실천적 해명이고 ②③은 중도의 관념적 해명이라고 파악된다. 즉 전자는 실제 행동을 통해 중도를 실현하는 입장이며, 후자는 연기관으로써 중도를 철저히 인식하고자 하는 입장으로서 대승 공관(空觀)의 전단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후자는 초기의 중도설이 공사상으로 발전하는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4형의 중도설은 초기의 불교가 실천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지혜를 중시하는 입장으로 바뀌는 과정을 나타낸다.

1) 실천 중심의 중도
위의 ④에 있어서 37도품과 8정도는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이들은 수행도이지만, 동시에 실천도라는 것이다. 즉 8정도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도인 동시에 깨달은 사람이 실천하는 것이다.8) 그런데 ①에 있어서 중도의 ‘中’은 2변에 떨어지지 않음과 ‘불변의 진리’를 뜻하는데, 경전에서는 이 중도가 눈과 지혜를 낳는다하여, 중도가 곧 지혜임을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 중도는〕 눈을 낳는 것이요 지혜를 낳는 것이며, 적정과 증지(證智)와 정각과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다.9)

이는 12종의 「전법륜경」이 취하고 있는 한결같은 입장이다. 따라서 8정도를 결론으로서 강조하는 ①의 중도는 실천적 지혜이다. 고락중도는 괴로움에도 즐거움에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한 실천력을 갖추고 있다. 특히 중도의 지혜에 의해 적정을 얻고 열반에 이른다는 점에서, 중도는 지혜인 동시에 실천임을 드러낸다. 때문에 중도는 中의 실천이요 中의 주체적인 존재방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10) 즉 고락중도는 괴로움과 즐거움 속에 있으면서도 즐거움에 탐닉하지 않고 괴로움에 굴복되지 않는 강한 정신력을 갖추는 것으로서, 고락을 초월해 있다는 점에서 강한 의지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다. 결국 고락중도는 고와 낙의 부정을 의미하면서도 그것들이 순화된 형태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정화된 고락의 조화를 실현하는 것이 중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락중도의 정신력은 지혜의 눈을 갖추지 못할 때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 중도의 지적인 성격을 ②유무중도와 ③단 상중도를 통해 보다 철저히 인식코자 하는 것이다.

2) 지혜 중심의 중도
②와 ③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중도의 지적인 성격이란 연기설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는 곧 공(空)에 대한 지혜로 이어진다. 이 중도를 설하는 경전에서 ‘中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고 하는 그 법의 내용은 “무명 (無明)을 연(緣)으로 하여 行이 있다”로 시작되는 ‘12연기’를 설하는 것이므로, 이 ②③의 중도는 곧 연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히라카와의 설명에 의하면, ‘中’이란 2변(邊)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다. 中은 2변을 기반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中 속에 2변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 2변은 전체인 것이다. 그런데 전체의 인식은 ‘中’에 선행하며, 또 직관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체적 직관을 반야(般若) 즉 지혜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생각을 잊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의 현실은 자기를 포함하는 세계 전체를 올바로 파악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자신을 제외한 전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기심이 제거되지 않은 전체관(觀)에 의해서는 올바른 中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무아•무사(無私)의 지혜인 반야가 요구되는 것이다.11)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도는 전체에도 집착하지 않고 中에도 집작하지 않는 데에서 실현된다. 즉 ‘中’의 특색은 2변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요 中 자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에 대한 집착〔我執〕과 자기가 아닌 것에 대한 집착〔我所執〕의 둘을 떠난 것이 무아이다. 이것을 ‘공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공〔sunnya, sunya〕에는 ‘텅 빈’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집착이 없는’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중도지(智)의 성격은 집착이 없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공의 行相을 지닌다’고 표현된다.12)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②③의 중도는 연기설을 근거로 하여 공사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②③ 이 강조하는 중도는 바로 자유이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다. 이해(利害)가 대립하는 ‘나와 너’의 세계인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있어서 인간이 전체를 설정하여 그 속에서 中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수량적 계산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는 곧 역사적 현실의 진상을 통찰하는 일로 귀착한다. 이 역사적 현실의 존재방식은 연기라는 것이 근본 불교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中을 안다는 것은 연기를 아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점을 나타내는 것이 유무 •단상의 중도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후대에 나가르주나가 중도와 연기가 공임을 설하고, 이것이 곧 가설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 ②③의 중도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보다 발전적으로 지향하여 중도를 해석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는 공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역설하는데, 이는 “중도는 전체에도 집착하지 않고 中에도 집착하지 않는 데에서 실현된다”13)고 하는 해석과 일치한다.

2. 연기는 곧 공
앞에서는 공사상의 원류를 중도설에서 찾았다. 그러나 중도설이 아니더라도 공사상의 뿌리는 이미 초기 경전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공사상에는 오랜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 원시 경전 속에는 명상을 통하여 공을 관하는 실천을 가르친 「대공경(大空經)」 •「소(小)공경」 등이 있고, 또 아비달마 이래 제법의 무아를 관하는 공삼매, 무아이므로 무상(無相)이라고 관하는 무상삼매, 무상이므로 원망(願望)에 집착하지 않음을 관하는 무원(無願)삼매라는 3종의 삼매가 설해져 있다 하며, 반야경에서는 종종 이 3종의 삼매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공사상은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14) 그러나 아함을 비롯한 근본 경전에 ‘공’이라는 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사상적 기반은 역시 연기관에 있음은 이미 지적한 그대로이다. 즉 “근본불교의 이러한 근본적 실상관〔제행무상•제법무아•제행개고의 3법인을 말함〕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그 연기관이다. 따라서 불교의 공사상도 결국 근본불교에 있어서의 연기관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본불교의 연기관은 불교에 있어서 공사상의 연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15)고 한다.
근본 경전에서 사용되고 있는 공이라는 개념은 현상을 관찰하는 하나의 관점이었다. 예를 들어「숫타니파타」〔經集〕에서는 “나를 드러내는 생각〔我隨見〕을 버리고 세간을 공으로서 관찰하라”〔 V, 1118〕고 하고, 또 상응부에서는 ‘5취온을 무상(無常)으로서, 고로서, 병으로서 …적으로서, 괴멸로서, 공으로서, 무아로서 여실히 파악해야 한다”l6)고 설한다. 그런데 제법을 공의 관점에서 관찰한다고 할 때는 제법(諸法) 자체가 공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제법에 있어서 나〔我,atta〕 또는 ‘나에 속하는 것’〔我所,atta-niya〕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 공의 올바른 관찰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어떤 점에서 세간이 공하다고 설하느냐고 묻는 데 대하여 “我 혹은 我所에 대해서 공하기 때문에 세간은 공하다고 설한다”17)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근본 경전에 나타난 공사상의 대표적인 표현의 하나로서 我 •我所를 공이라고 보는 사상이 드러나 있으나, 이를 분명히 제법무아의 사상과 직접 결부되어 있다. 제법이 무아이므로 우리들이 의식하는 바와 같은 의미의 존재〔즉 나의 존재〕는 없다〔空〕고 보는 것이, ‘我 •我所의 공’이라는 공사상의 참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의 공사상도 결국은 근본불교에 있어서의 무아적 실상관에 입각해 있음이 명백하며, 이러한 무아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잡아함 권 12〕고 하는 연기관이기 때문에, 공사상의 근저는 곧 연기관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18)
근본 경전에서 이처럼 공을 연기로 이해하고 있음은 남전의 팔리(Pali) 경전인 니카야(Nikaya)와 북전의 한역 경전인 아함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즉 남전의 상응부나 증지부(增支部)에서 “여래께서 설하신 이들 경전은 심원하고 의의가 깊고 출세간의 것이며 공성(空性)과 상응하고 있다”19)고 설한 내용에 상당하는 한역에서는 ‘연기법에 수순한다’〔隨順緣起法〕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20) 또 이와 유사한 내용에 연기의 교설을 설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21)
그러나 이처럼 아함 경전에서는 공이라는 개념을 규정하거나 사용한 예를 보이고 있지만 이 경전들은 소승의 부파적 입장이나 이후 발전된 입장의 견해가 가해진 시대에 편찬된 것이리라는 점에서, 이 공이라는 개념은 아직 명확한 자각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22) 어쨌든 앞에서 밝힌 바와같이, “공사상 자체가 근본불교 자체의 근저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것”23)이라 할때, 그 필연적인 근저가 연기설이라는 점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로써 공사상의 원류는 연기 즉 중도이며, 그것도 유무 또는 단상의 중도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이러한 중도의 다른 표현이며, 심층적 해석인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의지의 자유는 단절을 겪으면서 가능하고, 노력의 과보는 연속에 의해서 성립한다. “중도는 이 단절과 연속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에만 의존하지 않고 전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지혜이다.” 또한 “중도는 분석적인 설명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24) 이 때문에 중도는 공이라는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으며, 반야경에서는 직관적 지혜인 반야를 중시하면서 다양한 개념으로써 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4종의 중도설에서 보아 온 대로, 이러한 지혜의 개발은 강한 정신력에 의한 실천을 근본 입장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II. 반야경의 공

일반적으로 반야경은 모든 현상이 공이라는 점을 반복하여 설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반야경에서는 공이라는 말이 우리가 예상하는 만큼 많이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써 「금강반야경」에서는 공이라는 말이 단 한번도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공의 취지를 총괄적으로 나타내는 말로서 ‘불가득’ (不可得)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이 불가득을 공이라는 말로 바꾸면, 반야경은 공을 반복하여 설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이라는 말도 불가득이고, 그 말 자체에 집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반야경의 사상이 전체로서 발달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처음에는 불가득의 실천을 강조했던 것이 다음에 그 의미가 공으로서 술어화되어 점차 교리화되었다는 경과를 추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25)고 한다.
그러나 반야경이라는 명칭 자체로서 알수 있듯이 반야경은 반야(般若)를 중시하고 있으므로, 반야경에서의 공사상의 입장도 반야라는 개념에서 도출하여야 할 것 같다. ‘반야’〔prajna〕라는 말은 보통’지혜’로 번역되지만, 이를 직역하면 ‘완전한〔pra〕 인식〔jna〕’이라는 의미이다.26) 그런데 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로서 즈냐나〔jnana, 智〕가 있으므로, 이 두 개념의 대비를 통해 반야의 의미를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팔리어로 된 남전 경전에서는 반야와 즈냐나에 상당하는 용어로서 판냐(pann-a)와 냐나(nana)가 각각 사용된다. 이 두개념이 엄격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가 수행적인 지혜라면 후자는 초월적인 지혜라는 차이를 들 수 있다.27) 특히 반야에 상당하는 판냐의 경우엔 접두사’pa’가 역동성이나 진행성을 나타내는데 쓰이므로, 반야라는 개념이 실천수행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대승불교에 있어서의 반야는 보살행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즉 반야경에서 반야는 보살의 실천적 지혜이다. 그런데 반야경 이후에 이 두 개념이 사용되는 성격을 살펴보면, “반야가 총합적•직관적 인식인 데에 비해 즈냐나〔智〕는 대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등의 분석적인 활동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8) 다시 말해서 반야는 분석적 인식과는 달리 구별이나 분석을 초월한 총합적이고 전일적(全一的)인 인식이다. 실천적인 입장에서는 주관과 객관, 나와 너라는 대립을 초월한 고차원의 주체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반야이다.29) 이러한 의미를 통해서 볼 때, 반야는 아함의 중도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한 개념이며, 공(空)으로의 발전 과정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반야의 전일적 인식에 의해 얻게 되는 진리를 진여(眞如)라고 한다. 즉 개념적 사유에 의한 유별적(類別的) 인식을 초월한 전일적 직관의 내용이 진여라는 것이다.30)
반야경에서 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일체의 법이 공이라는 취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네 경우가 있다고 한다.31)

①제법은 예를 들어 마술사가 보여 주는 환영과 같은 것이다는 설명.
②제법은 임시의 명칭에 불과하며 어떠한 존재성도 없기 때문에, 일체의 법은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는 설명.
③자성이 없는 공〔無自性空〕이 라는 설명.
④제법은 인연의 화합에 의하거나 연기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개개의 실체는 없기 때문에 공이다는 설명.

여기서 ①②는 직관적인 것으로서, 이 경우엔 공이라는 말이 꼭 사용될 필요는 없다 하고, ③④는 이론적인 것이라 한다. 특히 ③은 소승의 유부(有部)가 제법에 자성, 즉 독립적 실체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④는 반야경 속에서 비교적 발전된 부분에 많이 나타나는 입장인데, 후에 나가르주나〔龍樹〕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연기론의 선구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아직 그 내용은 소박한 형태라고 한다. 이와 유사한 파악으로서, 반야경에서 공을 주장하는 이유가 되는 근거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도시하는 경우도 있다.32)

+- 無法(非法) -+
공 +- 無所有 -+ 無自性 -+ 和合因緣生
+- 不可得 -+ 無我 -+

즉 일체의 제법은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겨나므로 자성이 없거나 무아이고, 그 때문에 불가득이고 무소유이며, 무법이므로 공이다고 주장하는 논리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위의 파악이다. 이는 또한 공사상의 논증적 기초를 체계화한 일반적인 형태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반야경에 있어서의 공은 반야에 기반을 두고 불가득으로 표현되면서 그 궁극을 진여로 표현하기에 이르고 있으나, 그 이론적 근거는 역시 연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야의 공관은 주로 인식론적 입장에 투철하고 실천론적 입장이 상대적으로 무시됨으로써, 중도로부터 출발한 그 근본 취의를 온전히 살리지 못하였다고 평가된다. 나가르루나가 「중송」에서 연기를 공으로써 재해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Ⅲ. 중송의 공

나가르주나의 공관을 압축하고 있는「중송」(中領)이 주장하는 바를 일반화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일체의 법은 연기의 도리에 기초하여 성립하고있다. 연기란 어떤 법이 다른 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립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법도 다른 법과 관계없이 그 자체가 독립된 성질을 지닌 것으로서 존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성〔독립적 실체성〕이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일체의 법은 공이다고 부정적으로 표현된다.33)

이러한 입장을 반야경과 비교해 볼 때, 일체의 법이 공에 귀착한다고 설하는 점, 그리고 공이 반야의 전일적인 직관과 대상에의 집착을 떠난 실천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은 반야경의 사상과 같은 입장이므로, 나가르주나는 직접적으로는 반야경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근거로서 연기의 논리적 의의를 명확히 한 점은 그의 독창적인 사고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기에 불교의 본질적인 사상 구조와 관련된 문제를 전개했다. 이 점에서 그가 예상한 불교는 반야경에 한정하지 않고 훨씬 시야를 넓힌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묻는 것은 불교 사상의 본질을 묻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34)

1. 공의 논증식
단적으로 말해서 나가르주나의 「중송」은 연기의 논리적 의의를 밝힘으로써 공의 의의를 천명한 것이라 하겠는데, 그는 공의 입장을 설함에 있어서 일정한 입언(立言)의 형식을 간단히 세우고 있다. 그형식을 다음과 같이 서로 연관된 세 개의 논증식으로 종합하여 나타낼 수가 있다. 이것은 공의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기초가 될 수밖에 없는 법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① 일체의 존재〔있는 자체〕는 공이다-〔宗〕〔일체의 존재는〕뭇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바이므로-〔因〕
뭇인연에 의해 생겨난 존재〔있는 자체〕는 공이다-〔喩, 宗〕
② 〔뭇인연에 의해 생겨난 존재는〕 자성이 없으므로-〔因〕 자성이 없는 존재〔있는 자체〕는 공이다-〔喩, 宗〕
③ 〔자성이 없는 존재는〕 존재성이 없으므로-〔因〕 존재성이 없는 존재는〔있는 자체〕는 공이다-〔喩〕35)

공의 입장을 세우기 위해 논증되어야할 사항은 위의 논증식에서 이유〔因〕를 표시하는 명제이다. 즉 ①일체의 있는 자체는 뭇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 ②뭇 인연에 의해 생겨나므로 일체의 있는 자체는 자성이 없다는 것, ③자성이 없으므로 일체의 있는 자체는 존재성이 없다는 것이다. 「중송」의 복잡한 논의도 결국은 다양한 존재에 대해서 오로지 이들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할 수 있다 한다. 다시 말하면 뭇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衆緣所生〕을 근거로하여 있는 자체로부터의 자성을 부정하고, 자성이 없음을 근거로 하여 그 있는 자체로부터의 존재성을 거부하며, 존재성이 없음을 근거로 하여 다 있는 자체가 공임을 입언(立言)하는 것이다.36)
이러한 입장을 다시 정리하면, “일체의 존재〔有〕에 자성을 부정하는〔따라서 이를 공이라 한다〕 논중과, 다시 이 공을 절대적 무〔絶無〕와 동일시하는 것을 배척하는 논중의 둘로 이루어져 있다”37)고 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나가르주나는 소위 유무의 2변을 떠난 중도의 입장에서 공론을 명확히 통일함으로써 소승불교가 非有를 내세워 절대적 무로 나아가려 한 공관을 초월할 수 있었고, 묘유(妙有) 긍정과 상즉하는 대승 공관의 근저가 논증적인 체계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이라 한다.38)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유와 무는 동일한 입장에 있는 것으로서 무는 유를 부정할 수 없다. 또 유와 무는 동시에 배척되는 것이다. 「중송」의 제 15장〔觀無有品〕에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주(常住)에 대한 고집이고,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멸의 견해이다. 이 때문에 현자는 유와 무를 고집해서는 안된다”39)고 말한 것은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그 무가 다시 한번 부정된 것이 공이다. 그것은 부정이 부정된 것이므로 절대 부정이라할 수 있다. 여기서 부정이 부정된다고 말하는 것은 무라고 말하는 것이 무가 된다는 것이다. 무는 부정되어야 할 뭔가를 항상 남기고 있기 때문에, 그 뭔가의 자체는 있는 것이다. 그 부정하고자 하는 뭔가의 자체마저 소실해 버리는 것이 공이다. 거기서는 무이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하는 일마저도 없는 것이다.40)
결국 대승의 공관은 일체有의 본질〔진실성〕로서 무자성과 관계유성(開係有性)을 주장하는데, 무자성은 일체개공(-切皆空)의 논리를 철저히 파악한 것이며, 관계유성은 단순히 공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구극적인 실재의 긍정으로 유도하는 성질인 것이다.41)
위의 고찰에서 볼 때, 공이란 단순한 무라든가 부정이 아니며 허무는 더더욱 아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허무주의와 항전하여 왔다. 단멸론을 배격하고 있는 것은 나가르주나로 대표되는 공관불교만의 장기가 아니다. 아함도 소승의 여러 부파도 이 전선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대적 무에 빠져 드는 공견(空見)을 경계하고 단멸론을 배격하고 있는 공관이 마치 단멸적 허무론인 양 간주되는 것은 심한 기현상이지만, 인도의 학계에서는 그러한 오해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42) 그러나 공관은 당시의 기성 교학인 소승불교와 인도의 여러 학파의 사상을 비판하여 스스로 새로운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 개발된 체험적인 관념이다. 당시 일고 있던 허무적 공론의 타파야말로 공관불교의 존재 이유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은 대승불교가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사상임을 표시하는데 사용된 논리이다”43)고 말할 수 있다.

2. 일체긍정으로서의 공
「중송」의 제 24장〔觀四諦品〕에서 나가르주나는 공의 두 가지 입장을 구분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공은 기존의 허무론적 공〔부정의 공〕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면서, 자신이 파악하는 공을 일체긍정과 중도의 의미로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야지마 요오기치(失鳥羊吉)는 제24장 40게의 구성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었다.44)

①제 1~6게에서는 공을 부정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반대론자의 공을 소개한다.
②제7~17게에서는 부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긍정의 의미를 지니는 일체긍정으로서의 공을 주장한다.
③제 18~19게는 중도로서의 공을 설하는 것인데, 이는 「중송」 전체의 요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공 • 불공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공이다.
④제20게 이하는 ①에서 제시한 반대론을 비판하여 ②③의 취의를 입증한다.
여기서 공관의 핵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제 l4, 18, 19게라고 하겠는데, 즉 “제 14게에서 공에는 긍정의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제 18, l9게로써 연기와 연기하는 일체에 대하여 언급되는 공이 실은 긍정의 의미를 포함한 중도의 공임을 제시한다.”45)고 말한다.

공이 성립하는 사람에게는 일체가 성립하고, 공이 성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제14〕46)
연기인 것을 모두 우리는 공이라 한다. 그것은 임시의 명칭이요, 그것은 바로 중도이다. 〔제18〕47)
어떠한 법에 있어서도 연(緣)에 의해 생기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법에 있어서도 불공인 것〔공이 아닌 것〕은 없다. (제19)48)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나가르주나가 주장하는 공은 중도의 의미를 해명함으로써 그 이해가 가능하다. 사실 「중송」에서 ‘중도’ (中道)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위의 제 18게에서의 단 한번뿐이다. 이 제18게는 결국 연기•공•가명〔실체가 없는 것을 임시로 표명한 것〕• 중도가 모두 동의어임을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도는 대립하는 입장의 한쪽을 고집하지 않는 실천적 태도인 동시에, 논리적으로는 대립 개념을 초월하는 사상을 의미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단 한번밖에 사용하고 있지 않는 이 말을 제목으로 채용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연기와 공의 실질적인 의미가 중도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49)
그런데 「중송」은 결코 중도를 연기나 연기관과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즉 「중송」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존재 • 비존재 • 상견(常見) • 단견(斷見)에 치우치지 말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불성립을 논증하는 일환으로서 설하는 것일 뿐, 오히려 연기까지도 부정하는 공에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50) 나가르주나의 중도는 「보적경」(寶積經)에서 설하는 입장의 중도를 따르고 있다고 본다. 즉 「보적경」에서는 12支연기를 관하는 것, 곧 12支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遊觀) 그 자체가 중도라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12支의 각각에 대하여 그 존재〔有〕• 비존재〔滅〕의 구별을 떠나 관하는 것이 중도라고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도는 연기를 관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유와 무〔존재-비존재〕의 2변을 떠나 연기를 관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51) 이러한 입장에서 출발한 중도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52)
공으로서의 중도는 존재-비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연기 그 자체도 부정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 공은 부정과 동시에 긍정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부정과 긍정, 존재와 비존재의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바로 중도인 것이다. 이것을 「중론」〔중송〕에 어울리는 표현방식으로 말하면 空 • 不空의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중도이다. 공은 연기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중도이다. 다만 공이 연기와 결부되는 것은, 이 공이 중도의 공으로서 연기를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연기를 공이나 중도와 결부시키는 제18게의 표현은 단지 연기를 중도로서의 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는 요구를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일체를 예외없이 부정함으로써 일체의 긍정으로 전환하는 공, 이것이 곧 중도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의 논법을 통해 일체긍정을 추구하는 「중송」의 공관은 그 이론적 근거인 연기까지도 부정하는 철저함을 보여 준다. 일찌기 학계에서는 연기를 상의상관(相依相關) 혹은 논리적 근거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발생적•시간적 인과관계와는 엄격히 구별하려는 견해가 유력하였으나, 이는 반드시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고는 불 수 없다고 한다. 즉 연기는 발생적인 인과관계인 동시에 인과관계에 대한 ‘사유방식’이라는 것이다. 다만 후자의 사유방식이 불교 특유의 것이고, 이것을 확실히 제시한 이가 나가르주나이다. 그래서 그 사유방식을 법칙화하여 상의상관 혹은 논리적 근거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정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연기는 교의(敎義)개념으로서는 유부(有部)의 12인연을 그대로 승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부가 입각하고 있는 유자성설(有自性說), 즉 제법에 자성을 인정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12인연을 비롯한 모든 인과관계가 진실한 의미에서는 성립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파악된다.53)

3. 자비실천으로서의 공
결국 「중송」의 요체인 부정 •긍정의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일체가 예외없고 남김없이 부정된다는 점이다. 부정은 긍정에 대립하는 한계 내에서만 부정이다. 일체가 남김없이 부정되어 긍정될 아무 것도 없게 되는 바에 있어서는, 부정은 부정의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공에 있어서의 긍정이다. 공에 의한 긍정은 부정-긍정의 대립을 초월한 긍정이고, 절대적 긍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결국 공이긍정의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공의 부정이 철저해야 하고 예외를 허용해서는 안된다.54)
이제 「중송」에서 주장하는 공의 의의에 대해 결론을 말한다면, 공은 有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의 존재방식과 같은 有가 아니다. 있는 자체의 일체를 절대 부정하는 그 자체로서의 有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절대부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진실하게 있는 것을 현실로 드러나게 하여, 있는 자체의 일체를 구제하는 것이다”55)고 한다. 바로 이러한 의의에서 공사상은 적극적인 실천도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공관은 추상적인 공무론(空無論)이 아니라 항상 선정(禪定) 및 자비행원(慈悲行願)과 표리일체가 된다”56)고 한다. 따라서 옛부터 이것을 ‘무쟁(無諍)의 도’로서 화합의 현현이라고 간주한 이유는 그 지향하는 바가 자비행원의 실천이성에 있기 때문이다. 공관과 자비는 서로 의존하고 보충하여 혼연된 불교 정
신이 되는 것이다.57)
이러한 공관에 입각한 구체적 실천도가 6바라밀이다. 근본불교에 있어서 중도의 실천적 측면이 8정도라면, 대승불교에 있어서 공사상의 실천적 측면이 6바라밀이라고 파악된다. 특히 6바라밀은 “그 전체를 반야바라밀이 일관하게 되는데, 반야〔지혜〕를 뒷받침했던 ‘공’사상이 그 기반을 지탱하고 그것이 전체에 미쳐 철저하게 되면서 여섯 항이 단순히 각각 ‘바라밀’이라는 말을 수반하여 6바라밀로서 표출된 것이다.”58) 다음 장에서 고찰하게 되겠지만, 이 6바라밀은 전반적으로 자비를 중시하는 덕목이라는 점에서도 공사상의 실천도라고 할 수 있다.

Ⅳ. 공의 실천

이제까지 고찰한 공은 곧 중도의 철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이미 관념과 현실,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는 중도가 8정도라는 실천수행도와 동일한 의미로서 설해졌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공에 대해서는 그것이 곧 6바라밀이라고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공의 사상적 맥락으로 보아 공은 6바라밀로써 그 실천을 지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추론된다. 다시 말해서 공의 실천적 의의는 6바라밀인 것이다. 8정도가 중도
의 실천으로서 설해졌으나 그것이 소승적인 출가지향의 관념론으로 젖어들어감에 대한 대승적인 자각이 6바라밀로서 구체화된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는 6바라밀이 공관의 실천도임을 밝히고, 이어서 8정도와의 대비되는 입장을 통해 그 실천적 의의를 부각하고자 한다.

1. 6바라밀
「묘법연화경」 권1에서는 “보살들을 위해 마땅히 6바라밀을 설한다”59)고 하여, 6바라밀이 보살의 실천도임을 천명하고 있다. 대승불교에 있어서 6바라밀은 불가득공(不可得空)의 실천이었다. 예를 들어 보살의 실천행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대승 경전인 「유마경」의 제 5~8장에 나오는 문답은 “유형적•상대적인 것에 전혀 집착함이 없는 활달자재한 공관의 실천이었다”60)고 평가된다.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권52의 “공의 법에 깊이 들어가 6바라밀을 행하여 대자대비를 지니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6l)는 표현은 6바라밀이 공을 실천하는 보살의 자비행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6바라밀이 공사상의 실천임을 입증하는 것은 산티데바〔Santideva, 寂天〕의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이다. 즉 「학처요집」(學處要集)이라고도 별칭되는 이 논서는 그의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과 더불어 중관의 실천을 설한 것인데,62) 이는 오로지 6바라밀의 의의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논서의 가치는, 「학처요집」에 대해서 “이 책이 인용하는 경전은 티벳역 및 한역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과 전혀 전해지지 않은 것을 포함하여 102종에 이르고 있으며 …후기의 인도불교 중 탄트라를 원용하지 않는 정통파의 교설이 어떻게 전승되었는가를 아는 데 있어서도 일대의 보고(寶庫)이다”63)고 하고, 「입보리행론」에 대해서 티벳역의 주석이 “8종이나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보급의 정도를 알 수 있다”64)고 말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6바라밀을 해설하고 있으며, 인도불교 최후기의 정통교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들의 비중과 가치는 그대로 6바라밀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 중 「입보리행론」은 「학처요집」의 축소형이라 할 수 있으므로, 「학처요집」〔대승집보살학론〕의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6바라밀이라는 공의 실천적 의의를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학처요집」에 대해서는 다행히 일본의 다무라 치지윤(田村智渟)이 「입보리행론」과 대조하면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으므로,65) 여기서는 그의 연구를 통해 6바라밀의 취지를 검토한다. 이에 앞서 6바라밀의 사전적 의미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보시〔dana〕 : 베푸는 것. 여기에는 진리를 가르치는 법시(法施), 의복 등을 베푸는 재시(財施), 공포를 제거하여 안심케 해주는 무외시(無畏施)의 3종이 있다.
지계〔sila〕 :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ksanti〕 : 고난을 감당하여 참는 것.
정진〔virya〕 : 진실의 도를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
선정〔dhyana〕 : 정진을 통일하여 인정하는 것.
지혜〔prajna〕 : 진실의 지혜를 얻는 것.66)

이 6바라밀의 각 덕목에 대해 「학처요집」이 해설한 바를 압축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신체를 버리는 것이 ‘보시의 완성’ 67)이다. 신체가 절단되더라도 일체의 유정(有情)에 대한 자비를 버리지 않는 것이 ‘지계의 완성’ 이다. 신체가 절단되더라도 절단하는 사람들의 해방을 원하며 참는 것이 ‘인내의 완성’이다. 정진에 의해 붓다가 되려는 결의를 단념하지 않고 윤회에 몸을 맡기고 선근(善根)의 실천에 노력하는 것이 ‘정진의 완성’이다. 신체가 붕괴되더라도 붓다가 되고자 하는 결의를 버리지 않고 깨달음에만 마음을 쏟아 마음의 적정을 오로지 구하는 것이 ‘선정의 완성’이다. 신체가 절단되더라도 신체를 헛것에 불파하다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무상(無常) • 고 • 무아 • 적정으로 관하는 것이 ‘지혜의 완성’이다.68) 이러한 입장에서 「학처요집」은 6바라밀의 각 항목을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해설해 나가고 있다.

제 1장 : 보시
제 2~8장 : 지계
제 9장 : 인욕
제 10~11장 : 정진
제 11~13장 : 선정
제 14장 : 반야〔지혜〕
제 15~19장 : 6바라밀 전체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산티데바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지계이다. 그리고 끝에서는 6바라밀 전체의 실천을 청정이라 하여 공덕을 증대하라고 가르친다. 고의 해석의 특징은 신체〔atmabhava, 身心)• 재물〔bhoga, 향락〕•공덕〔punya, 功績〕이라는 셋을 주제로 삼아 보살행을 설하는 것이다. 또 이 셋은 각기 보시 • 수호〔혹은 배려〕• 정화 • 중증와 결부되면서 6바라밀에 따라 차례로 설해지고 있다.
첫째, 보시바라밀은 신체 • 재물 • 공덕의 보시를 뜻한다. 즉 보살이 베풀어야 할 것은 그의 신체이고, 온갖 소유물이며, 3세에 쌓은 자신의 공덕이라는 것이다. 소유물과 같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마저도 유정을 위해 희생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의 보시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신체의 수호’에서 생명이나 신체를 쓸데없이 버려서는 안된다고 경계하고 있다.
둘째, 지계바라밀은 신체 • 재물 • 공덕에 대한 배려〔수호〕라고 설한다. 보살이 이에 대한 배려를 태만히 하면 이타행(利他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계를 중시하는 입장은 뒤에서 말하는 “신체 • 재물 • 공덕을 베푸는 것은 유정의 향락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을 수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중생을 향락케 할 수 있겠는가. 만일 향락이 없다면, 베푸는 것도 없게 된다.”69)〔ss, p. 143〕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지계바라밀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측면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①신체의 수호〔제 3~5장〕/일체의 최악을 피해 나가는 보살은 자신의 전신(全身)과 온갖 말과 온갖 마음이 제어되어, 타인의 행복을 위해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 전혀 없게 된다. 이처럼 완벽한 마음이란 공성(空性)의 증득이고, 따라서 보살은 공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보살행에 힘써야 한다〔ss, p. 117〕고 강조한다.
②마음의 제어〔제6장〕/보살은 ‘자기억제’ 곧 몸과 말과 뜻의 억제를 위해 거듭 반성〔憶念〕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몸과 마음을 수호하길 바라는 자는 반성을 근본으로 삼아 항상 반성에 전념해야 한다”〔ss, p. 120, 첫줄〕고 강조한다. 「입보리행론」에 의하면 ‘지계의 완성’을 위해 설한 억념(憶念)이란 동요하기 쉽고 악마에 유혹되기 쉬운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라 하고, ‘몸과 마음의 상태를 항상 반성하는 것’이 억념의 정의라 한다.
③재물에 대한 배려〔제 7장 전반〕/특히 재물을 탐내는 마음이 많은 죄악을 야기하므로 재물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앞의 ①을 보충하고 있는데, 보살이 자신의 신체를 수호하는 동기는 이타행을 실천하기 위해 생명을 유지하려는 것이라 한다. 결국 재물에 대한 배려란 재물이나 향락의 악용 •과대평가 •과소평가를 경계하는 것이다〔ss, p.144, 둘째줄〕. 한편 보시의 과잉도 금할 것을 설한다. 보살이 단 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큰 손실이 될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보살의 자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고 한다〔ss, p. 145〕.
④공덕에 대한 배려〔제7장 후반〕/자신의 공덕을 타인에게 회향함으로써 다시 공덕이 축적되지만 이렇게 축적된 공덕의 과보도 자신을 위해 기대해서는 안된다〔ss, p. 147, 17째줄〕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덕에 대한 배려를 원하는 보살은 보시한 후에 후회해서는 안되고, 보시했음을 널리 알려서는 안된다고 한다.
⑤신체의 정화〔제8장〕/과거의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다. 이를 위해 네 가지의 실천을 설한다. 첫째는 과거의 죄를 고백하는 것, 둘째는 죄를 직접 다스려 나가는 것, 세째는 마음을 돌리는 노력, 네째는 귀의의 노력이다〔ss, pp.171ff〕. 즉보살은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해 죄를 고백하여 선행에 전념함으로써 과거의 죄를 퇴치하고, 살생이나 도둑질 같은 불선행으로부터 몸을 지킴으로써 마음을 고치는 힘을 얻으며, 끝으로 불•법 •승에 귀의함으로써 과거의 죄를 갚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의 시발인 첫째가 가장 강조된다.
세째, 인욕바라밀에서는 ①고뇌에 대한 인내〔고뇌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임〕, ②법을 이해하기 위한 인내, ③타인으로부터 받은 해악에 대한 인내의 셋을 설한다. 인내의 보살은 득과 실,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방,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8종의 세속 일에 무관심하다. 이 중에서도 여러 경전을 길게 인용하여〔ss,pp. 184-9〕 ③의 인내를 특히 강조한다.
네째, 정진바라밀에서는, 인내의 보살은 먼저 법을 묻는 데에 정진해야 한다고 한다. 법을 묻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머물고, 지혜의 사람에게는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0)
다섯째, 선정바라밀에 대해서는 먼저 탐•진•치의 3독을 끊기 위해 각각 부정(不淨) •자애(慈愛) •연기(緣起)를 명상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선정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하여, 이의 보완으로서 4념처(念處)를 설한다. 즉 ①신체에 관한 반성〔ss, p. 228-232〕, ②감정에 관한 반성〔ss, p. 232-3〕, ③마음에 관한 반성〔ss, p. 233-236〕, ④법에 관한 반성〔ss, p. 236-241〕71) 이 중에서 특히 ④에 대한 설명에서 “결국 현상세계는 연기이고 공이다”〔ss, p. 237〕고 하여, 이 바라밀은 공관의 완성임을 천명하고 있다.
끝으로 반야바라밀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신체의 정화’ 라는 제목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지계바라밀의 하나로서 거론되었던 주제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내용은 ‘일체법의 공성’을 설하는 것이다. 저자는 ‘신체의 정화’라는 주제하에 지계의 마지막 부분, 인내, 정진, 선정, 그리고 이 지혜〔반야〕의 다섯을 설한다. 앞에서의 내용과 대비해 볼 때, 이미 설명한 신체 •재물•공덕의 배려〔수호〕가 ‘자제의 도덕’이라면, 여기서의 ‘신체의 정화’는 ‘적극적인 도덕’을 의미한다고할 수 있다. 저자는 보살의 도덕을 크게 수호와 정화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제7장까지 설한 협의의 지계이고 후자는 제8장 이하 여기까지〔반야바라밀〕 포함한다. 여기서 지계 이하 선정을 다시 설하는 것은 이들이 공성에 입각하여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의 내용인 ‘일체법의 공성’은 바로 중관(中觀) 사상의 최종적 결론이다.72)
이상과 같이 6바라밀을 해설하고 나서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재물과 공덕의 정화〔제 15장〕, 신체•재물•공덕의 중대〔제16장~끝〕를 설한다. 이 중 공덕의 정화란 곧 지혜〔반야〕에 입각한 자비행〔보살행〕의 실천이다. 예를 들면 정화된 보시란 공성에 입각한 보시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공덕의 증대가 모든 증대의 기본이라 하여, 공덕의 증대를 위해 다시 자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상과 같이 6바라밀에 대해 산티데바가 해설한 바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결론으로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학처요집」은 대승불교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심은 자비이다. 무아와 공성도 동시에 설해지고는 있지만 저자에게 있어서는 ‘무아’가 오로지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바로 무아이기 때문에 自와 他의 구별이 없게 된다. 베푼다는 것〔보시〕과 지킨다는것〔守護〕이 우리에게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이것이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둘 다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중생을 위해’라는 기반 위에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이 ‘공성’에 입각하고 정화된 보시이며, 정화된 지계이다. 여기서는 공도 자비도 6바라밀도 모두 같은 곳을 지향한다. 보살의 知•情•意는 모두 ‘오직 중생을 위해’라는 점에 집약되기 때문이다.73)
「학처요집」의 이러한 입장은 이미 앞장의 맨 뒤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공이 자비의 실천이라는 점과 일치한다. 여기서 특히 지계를 강조한 점이 주목된다. 공이라는 자유의 경지에서는 계율이라는 것도 당연히 초월한다는 그릇된 인식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계는 모든 실천 행동의 지침이다. 흔히 개인적인 덕목으로 이해하기 쉬운 지계를 여기서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여 공의 실천적 의의를 되새겨야 할 것으로 본다.

2. 공의 실천적 의의

공의 실천적 의의가 6바라밀에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와 대비되는 실천도로서 8정도는 독립된 교설로서 4제설보다도 먼저 성립되었다고도 하는74) 불교의 핵심적인 근본 교설일 뿐만아니라, 중도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실천적 성격을 6바라밀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즉 8정도는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실천 덕목인 데 비해, 6바라밀은 대(對)사회적인 입장을 아울러 고려한 실천 덕목이라는 성격상의 차이가 드러난다.
물론 8정도가 가장 근본적인 실천도라면 처음부터 개인지향적 덕목인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리의 발달 과정에서 8정도는 일상적인 삶의 현실과는 괴리된 출세간적 입장으로 해석되고, 수행도론(修行道論)과 결부되면서 이론화 되어 간다. 예를 들면, 8정도를 설명하는 초기의 경전들은 세속적 입장에서 8정도의 각 덕목을 설명하는데, 후기의 경전들은 여기에 출세간적 입장에서의 설명을 첨가하고 이것이 올바른 길이다고 강조하며, 37도품이라는 수행도 중 최고의 단계로서 8정도를 언급한다.75) 8정도설이 세속적 正道라는 입장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은 불교가 “범부로서는 실천궁행의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고, “근본불교가 이론보다 실천의 방도를 중요시”76)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8정도가 출세간적 입장으로 전환되었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기는 하다.

출세간적 8정도가 제시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 윤리적 선행까지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세간적 8정도에서 제시되는 윤리적 선행은 그 세간적 집착을 버릴 때 그대로 출세간적 8정도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원시불교에 있어서의 8정도가 일반의 세간적 •윤리적 선행에 즉응하면서 그것을 초월한 출세간적 •종교적 입장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다시 그 입장으로부터 세간적 •윤리적 선행을 포섭하여 승화시키고자 하는 사고방식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77)

그러나 이러한 이론화의 과정에서 8정도가 현실적인 역동성을 상실해 가고, 對사회적 공감을 상실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8정도를 수행도론과 결부시키고자 한 이론적 노력도78) 그러한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8정도의 세간적 입장과 출세간적 입장을 설한 경전은 원시불교가 발달한 단계에 성립한 것으로서 8정도의 윤리성과 종교성을 적확하게 서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79)고 하지만, 결국은 종교성의 강조가 수행도론으로의 이론화를 추구케 함으로써 8정도의 실천적 의의가 약화되어 간 것으로 간주된다.
기존의 불교 행태에 대한 반성과 일신으로부터 흥기한 대승불교가 공관(空觀)이라는 새로운 인식 태도와 더불어 이에 걸맞는 실천도를 추구하였을 것임은 지극히 당연하고, 이러한 입장에서 채택된 것이 6바라밀이었다고 파악된다80) 이 6바라밀의 특징은 기존의 수행도에 비해 보시와 인욕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즉 “여섯 항목 중 보시와 인욕은 사회적인 〔또는 對他的인〕 덕목이고, 나머지는 소위 개인적인 덕목이다. 즉 3학이나 5근• 5력 또는 8정도에 비교하여 볼 때 ‘타인에의 지향=사회성’을 더하여 통괄하고 있는 것이 6바라밀설의 큰 특색이다.”81) 8정도와 비교하면 보시와 인욕에 상당하는 항목이 8정도에는 없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6바라밀의 조직을 8정도에서 찾기도 하는데, “원시불교에 보이는 8정도가, 바라밀로 재편성되고, 거기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하나 즉 보시가 맨 앞에 첨가된 것”82)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 중생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보살이 보시를 맨 앞에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한다. 이러한 6바라밀도 교학의 진전에 따라 3학과 연결되기도 하지만,83) “本生보살의 실천도로서는 보시와 인욕에 중점이 있으며, 3학 등은 본래적인 요목이 아니다”84)고 하여, 역시 6바라밀이 기존의 수행도에 비해 이타적 실천을 중시한 것임을 밝히기도 한다. 또는 6개의 덕목 중 앞의 셋〔보시•지계•인욕〕은 요익(饒益) 중생의 화대행(化對行)으로서 利他를 추구하며, 뒤의 셋〔정진•선정•지혜〕은 번뇌 퇴치의 自行으로서 自利를 추구하는 것이라고도 한다.85) 이는 곧 6바라밀의 특색이 자비의 실천에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 자비의 구체적 실천 방향이 앞에서 소개한 산티데바의 「학처요집」에 제시되어 있다.
결국 6바라밀은 현실을 긍정하고, 긍정된 현실 속에서 자신과 사회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인 실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이 현실 긍정의 불교적 입장은 「중송」의 공관에서 제시되었다. 그것은 철저한 부정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6바라밀의 실천은 진실을 드러내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개인의 내면은 물론이고 우리 주변의 사회전체이다. 진실이 통용되는 사회가 불교적 열반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처요집」에서 설하는 정진바라밀의 입장이 ‘윤회에 몸을 맡기고 선근(善根)의 실천에 노력하는 것’86)이라는 점은 공관에 입각한 보살의 실천적 자세를 여실히 보여 준다. 윤회까지도 회피하지 않으므로 세속의 현실세계도 회피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살의 계율〔지계바라밀〕을 설하면서 대승보살의 수행 방법 및 방편을 상세히 설하는 논서로서 유명한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Bodhisattvabhumi〕이 시사하는 바가 크게 주목된다. 즉 제4장〔眞實義品〕에서는 반야가 보살의 대방편인 이유를 이렇게 설하고 있다.
보살은 그 공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여러 生에 걸쳐 수행하면서, 자신과 중생을 위한 佛法을 잘 성숙시키기 위해 生死 속에 함께 흐르며, 또 그 생사를 여실히 잘 파악하기 때문이다.87)
이어서 속히 열반에 든 보살은 일체의 佛法과 중생을 성숙시키지 못할 것이라 하면서 생사의 윤회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다시 生死윤회를 여실히 잘 아는 자는 누구나 번뇌심이 없이 생사윤회 속에서 함께 흐른다”고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결국 공성의 체현이 개인적인 목적 달성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세속에의 참여 속에서 세속의 惡과 邪를 극복하는 것이 공의 진정한 실현이요, 바로 여기에 공의 실천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공을 실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