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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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의 염화미소 - 성전
1996년 03월 169호
봄이 오는 길목에는 추위와 따뜻함이 혼재해 있다. 꽃들이 눈을 뜨려 하지만 그때마다 찬바람이 불어와 꽃의 눈 언저리를 흔든다. 다시 눈을 닫는 꽃. 이른 봄에 꽃들이 움트려는 모습은 안쓰럽다. 꽃들이 눈 뜨려 할 때마다 길섶 음지의 눈발은 아직은 아니라며 꽃들의 이른 눈 뜸을 향해 겨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3월이면 할머니는 언제나 어린 동생을 데리고 산언덕을 오르고는 했다. 아직은 얼음이 얕게 깔리고 길섶에 눈이 채 녹지 않은 산길을 할머니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올랐다. 어린 동생이 시린 손을 불며 할머니를 따라 오르던 산길에는 봄의 흔적보다는 겨울의 자취가 더 무성했다. 나는 할머니가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산길을 오르는 까닭을 몰랐다. 할머니가 왜 이른 봄의 산길을 오르고, 그 산언덕에서 무엇을 하는지, 늘 궁금했다.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다만 나의 물음에 웃음을 지을 뿐, 할머니의 그 미소 아래서 나의 궁금증은 차츰 더 커져만 갔다. 할머니는 이른 새벽이면 마른 기침이 잦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해소병이라 하였다. 해소병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낯설다는 나의 표정 앞에서 \"해소병이란 할머니처럼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잦은 기침을 하는 거란다\"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늙으면 다 저런 거지…….\" 하며 말을 길게 끄는 아버지의 표정에는 깊은 슬픔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할머니는 아침상을 물리고 난 다음이면 어김없이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낮은 산언덕을 향해 문을 나섰다. 아버지의 건강에 해롭다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초봄의 산행은 할머니의 버릴 수 없는 생활 습관이었다. 할머니가 나선 문 앞에 서서 아버지는 독백처럼 말씀하였다. \'무엇이 그리운 게야,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당신 주변의 친구들이.\' 아버지가 말꼬리를 길게 흘리는 자리를 나는 입춘의 문턱을 서성이는 바람처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할머니의 산행과 아버지의 말씀이 남기는 여운의 의미를 생각했다. 이제 할머니도 세상을 떠난 지 이십여 년. 해마다 3월이 돌아오면 산길을 거닐며 내 어린 날의 의문을 무슨 화두처럼 챙겨 본다. 그러면 그 때는 몰랐던 아버지의 그리움 때문이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랬을 거다. 할머니는 그리움에 산 언덕을 올랐을 테고 풀리지 않는 그리움들이 새벽이면 잔기침으로 살아나 우리들의 새벽을 열었으리라.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은 탓일까. 돌아보면 그리움들이 유리창의 성애처럼 서려 있는 것을 본다. 흘러온 시간 뒤에 앙금처럼 남는 그리움의 온도는 체온보다 따뜻한 것이 아닌지. 뺨이 유난히 따뜻했던 할머니. 그 뺨의 따뜻함이 그리움의 타래를 곱게 매듭 짓던 할머니의 아름다운 한 생애였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