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모금액수는 불교보다 몇 배에서 몇십 배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대형 교회의 헌금액이나 비용이 대형 사찰보다 대략 뒤에 0이 하나 많은 수준임을 미루어 보자면 그렇다.) 헌금받는 데 적극적인 기독교에 비해 불교는 돈에 대한 인식과 적극성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원래 기부와 모금은 불교의 개념과 전통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음을 일반인들이 잘 모른다. 마치 ‘종교(宗敎 : 으뜸 되는 가르침)’라는 단어가 원래 불교의 용어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불가에서 ‘기부’를 뜻하는 ‘보시(布施)’는 그 어원이 Dana(檀那)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Dana가 ‘기부’의 현대 영어인 Donation의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 산속 사찰에서 아직도 시주자를 ‘단월(檀越)’이라고 부르는 것도 Dana에서 비롯된 것이며, 남방불교에서 시주자를 Danapati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했다고 보기도 한다.
전 세계 모금 전문가들이 꼽는 모금의 기본 개념이 있다. ‘모금은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모으는 것이다.’ 이선언적 지혜 역시 불교의 모금관(募金觀)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불교에서는 모금(募金), 즉 ‘돈을 모은다’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대신 모연(募緣), 즉 ‘인연을, 사람을 모은다’라는 표현을 쓴다. 단 한 글자의 차이가 이렇게 크고 그 말이 내포한 깊이가 완전 다르다. 모금 활동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는 지혜 역시 불교적 사유의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가 보시할 때 자주 쓰는 단어인 ‘적선(積善)’ 역시 심오한 말이다. 거지에게 한 푼 던져준다는 의미로 격하되어 쓰이고 있는 단어이지만 원래의 뜻은 한자 그대로 ‘착함을 실천한다. 선을 쌓는다’라는 의미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보시하는 행위인 ‘적선’이 선을 쌓아서 결국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임을, 착함의 낟가리(선업)를 쌓아 올려 결국 지혜에 이르게 하는 길임을 표현해주는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청정한 기부행위를 강조하는 불교모든 종교에 유사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거리 모금의 원류는 불가의 탁발 전통일 것이며, 요새 유행하고 있는 기부상품(기부를 목적으로 구매하는 팔찌나 크리스마스실, 카드 등의 제품들) 역시 염주 등 불교용품의 거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해외에서 수백억 원의 돈을 모금해내는 방식인 ‘선물하기 캠페인(염소 한 마리 사주기, 씨앗 다섯 포대 사주기, 우물 하나 파주기처럼 특정한 내용을 지정하여 후원하는 방식)’ 역시 불가의 오랜 전통인 ‘기와 불사’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기와 불사는 심지어 기원을 직접 적을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나은 방식이다.) 위시트리(Wish Tree:아이들의 소원을 써놓은 나무) 방식 역시 소원연등을 다는 불교적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현대 모금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이 모금 윤리이다. 모금할 때 지켜야 하는 도덕과 규율에 관한 것인데,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이 ‘어떤 물품은 기부받을 수 있고, 어떤 물품은 기부 받을 수 없냐’는 것이다. 현장에서 사람마다 의견이 엇갈리는 일종의 딜레마이다.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일정한 답을 가지고 있다. ‘삼륜 청정(三輪淸淨)’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원 표현은 ‘삼종원만청정보시(三種圓滿淸淨布施)’이다. 아마도 아래의 중아함경(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 편에 나온 부분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본다.)
계행을 지키는 자가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굉장한 과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을 떠난 자가 탐욕을 떠난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세간적 보시 가운데 최상이라고 나는 말한다.
-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N142),《맛지마니까야》
이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불교에서 기부와 모금을 할 때 3가지가 깨끗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주고받는 물건이 깨끗한가를 따지는 것이다. 선하지 않은 의도를 가진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며, 투명하게 법다운 곳에 사용하지 못하는 자는 받을 자격이 없으며, 남의 불행을 기반으로 모은 돈은 받지 말라 하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 모금 계에서 중요시하는 상당수의 개념이 불교에서 유래되었거나 불교의 정신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 불교는 바라밀 수행의 가장 시발점을 보시바라밀로 볼 정도로 청정한 기부행위를 강조하는 종교였다. 하지만 현재 기부에 가장 적극적인 종교는 자타공인 기독교이다. 불교 신도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에 대한 기부는 물론이고, 사회 약자를 돕는 자선적 기부나 사회 변화에 대한 기부 참여 역시 상대적으로 낮다. 부처님께서 직접 모연을 하신 적은 없다. 출가자는 보시를 요구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계율도 존재한다. 보시 역시 상가가 아닌 개인에 하는 보시는 허용되지 않는 엄격함도 있다. 하지만 침묵으로 좋은 보시는 인정하시었고, 재가자들의 보시는 적극적으로 권장하셨다.
‘재물을 아끼는 마음을 버려 늘 보시를 행하는 것이 우바새가 버림(捨)을 완전히 갖추는 것’ - <우바새경>(제33권), 《잡아함경》
‘출가하지 않은 사람이 후세에 편안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은 보시를 완전히 갖추는 것. 아끼는 마음을 떠나 항상 자기 손으로 주며, 버리는 공부를 즐겨하며, 평등한 마음으로 베품.’ - <울사가경>(제4권), 《잡아함경》
성철스님께서도 불공의 참된 의미는 ‘예불하고 치성드리는 것’이 아닌 ‘절 밖에 나가 남을 돕는 것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보시의 전통을 현대에도 계승하려면 모금(모연)을 단순히 돈을 모아 승가 살림에 보태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게 하는 행위,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기초적 행위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가 불교계 모금 가를 자비 캠페이너이자 열반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Nirvana Proposer)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 회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어떻게 하면 많은 보시금을 모을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방법에 대해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