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이 어여쁜 봄날, 승려이자 무용가인 김묘선을 만나러 국립국악원을 찾았다. 운명을 지배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그녀. 인터넷으로 무용가 김묘선을 검색하면 웬만한 정보는 나타난다. 그런데도 만나자 기별을 넣었다. 다행히 약속이 정해졌고 분장실에서의 첫 대면은 엄마라는 공통분모로 급격히 친밀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교육 조교이며 대일사(다이니치지 大日寺) 주지인 김묘선의 삶은 드라마틱하다. 그녀는 우리 춤의 명인 이매방 선생 제자로 무용가의 길을 걷다가 일본인 승려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또 일본전통사찰의 주지가 되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받은 다음 개인발표회를 하고, 무용가로 인정을 받는 것이 목표였어요. 물론 계획대로 대통령상도 받았고, 유학을 다녀와 무용단을 운영했었지요. 승려는 계획에 전혀 없었던 일입니다. 1995년 시코쿠 문화단체 초청공연을 갔는데 공연단 숙소가 대일사였어요. 그날 주지 스님 질문이 유난히 많았었죠.”
이후 한 달에 한 번꼴로 초청공연이 있었고, 그때마다 대일사 주지인 오구리 고에이 스님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우리 춤 승무는 일본인 승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녀의 춤사위는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주었다. 일본 시코쿠에는 수천 개의 절 가운데 88개의 절이 순례코스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죽기 전에 소원하는 여정으로 진언종을 세운 홍법 대사가 도를 닦았던 사찰을 번호대로 돌며 참배하는 것이다. 김묘선은 절이 품고 있는 1,200년 역사의 깊이와 무게가 엄청난 13번째 사찰 대일사의 안주인이 되었다.
“마흔에 결혼해 아들을 낳고 남편 그늘에 있으니 너무너무 행복한 거 있죠. 결혼 전에는 다섯 동생의 엄마 역할, 할머니와 아버지 봉양, 그리고 무용단 운영까지, 힘겹게 살았어요. 결혼 후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춤만 추라며 육아부터 온갖 뒷바라지를 다해 줬어요.
그 11년이 내 인생의 봄날이었죠. 그 후 그런 남편이 덜컥 세상을 떠났을 땐 한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어요.”
삶에 어찌 꽃피는 봄만 있으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강한 기질과 결단력은 그녀를 다시 그녀이게 했다. 대일사 주지 승계를 두고 외국인에 대한 배타와 여자를 무시하는 일본인의 정서가 공부의 원동력이었단다. 1차 승려시험에 합격하고 작법을 배우는데 춤을 추던 사람이라 동작이 아름답고 자세가 반듯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춤꾼의 길이 구도자의 길과 다름없구나 싶었다. 주지 시험은 더 어려웠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경전을 외우고 아들이 자랄 때까지 신도들의 마음에 스며들고자 가가호호 방문했다. 부처님의 어머니도 여자이며 당신들이 존경하는 홍법 대사도 어머니의 아들이지 않느냐고. 엄마이기에 주지 소임을 더 잘할 수 있으니 믿고 맡겨 달라 설득했다. 이제 신도들은 공연으로 가끔 절을 비우는 그녀를 기다릴 정도다.
우는 그녀에게 어른이 되는 약이 있다면 먹고 지켜주고 싶다던 아들은 자라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내년이면 수행에 들어간다. 그녀는 어떤 엄마일까?
“아들은 저에게 친정엄마이자 시어머니입니다. 하지만 애틋하죠. 승려면 삭발을 해야 하는데 열 살짜리 어린 아들이 어른 스님들께 간청을 했어요. 제가 자라면 주지 승계를 할 것이니 무용하는 엄마에게 예외를 주십사하고. 그 약속 지키려고 지금까지 삭발 상태로 공부해요. 어학능력이 뛰어나 4개 국어를 해요. 대일사 외국인 안내방송도 아들이 녹음했습니다. 공연차 미국을 방문할 때, 잠시 아들을 만나면 돌아오는 비행기가 타고 싶지 않았어요.”
사는 모습이 제각각이어도 자식을 대하는 부모 마음에는 부처가 산다고 했던가. 공연에 앞서 분장한 얼굴로 아들을 말하는 그이는 무용가도 승려도 아닌 엄마였다. 그러나 박사고깔 아래 북채를 휘두르는 무대 위의 그녀는 어느새 무용가다. 지난해 도쿠시마에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공연’을 기획한 김묘선은 일본 전통축제에서 추는 아와오도리를 췄다. 한일교류에 힘을 보태고 싶은 거다. 우리 춤의 세계화를 꿈꾸는 김묘선의 공연티켓은 언제나 매진이다. 양국의 전통 무를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콜라보레이션을 하는가 하면 생활 불교로 익숙해진 일본 경전 소리에 승무를 펼쳐 보인다. 생소함과 익숙함의 거리가 춤으로 맞닿았다. 자연인으로의 삶이 그리울 때도 있을 것 같아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삶이 지칠 때면 무엇이 그녀를 잡아주는가 물었다.
“놓고 버리는 동안 자유로워졌어요. 대일사 주지 승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생각을 바꾸니 참 수월하더군요. 순례객 접견하며 주지 소임 볼 때는 승려여서 좋고 무대에서는 무용가라서 행복하고 아들을 만나면 엄마인 것이 감사합니다. 하루 일정 마무리하고 절 가까운 곳으로 떠나는 온천여행이 소소한 기쁨이죠. 온천 후의 맥주 한잔은 나를 말랑말랑하게 만듭니다. 아! 오해가 있을까 봐 알려드리는데요. 일본의 사찰에서는 불전에도 술을 올려요.”
오월, 홍류동 따라 내걸릴 연등을 떠올리며 해인사를 아느냐 물었다. 뜻밖에 고향이 옛 가야국 고령이란다. 어릴 적의 소풍은 물론, 한국 불교에 해박한 남편과 해인사에 하루 머물렀던 추억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대일사 주지승계법회장에서 천여 년 전 대일사 본사 주지가 가야국의 왕자였다는 사실을 교구장 축사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인연이 있어 가야사람 김묘선이 대일사 주지를 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말씀이었지요. 인연이 참 묘합니다.”
그녀가 펴낸 책 <인생의 끝에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해피엔딩 소설처럼 그녀는 지금의 행복을 말한다. 남편과 함께한 화양연화 같은 그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시코쿠의 대일사에는 김묘선이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