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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장경각 관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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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6년 03월 169호
지난해 12월 6일에 불교계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이 나라의 문화 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한껏 드높여 준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의 고려팔만대장경 및 판고, 종묘 등 세 건의 문화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이름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지정한 세계적인 문화 유산은 모두 백 나라의 사백 사십 건으로서, 문화 유산이 삼백스물여섯 건으로서, 문화 유산이 아흔여덟 건, 복합 유산이 열여섯 건인데, 우리 나라의 문화재가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기는 이것이 첫 번째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개산 1,200년을 몇 년 앞두고 있는 해인사도 행인사이려니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서른 남짓의 세계 대장경 가운데서도, 고려대장경은 오자와 낙자가 없는 유일한 대장경으로서 그 독창성과 창의성이 크게 돋보인다. 목판 대장경으로서는 제작 시기가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규모도 세계 제일로 손꼽히는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해인사가 삼보종찰 가운데서도 법보종찰로서의 자리 매김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삼보종찰이란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그 전통이 비롯되기 시작하였으니, 신라 시대에 자장율사가 모셔온 부처의 정골 사리와 금란 가사가 봉안되어 있어 불보종찰임을 자처하는 통도사, 승보종찰의 터전을 닦아놓은 불일 보조 국사를 비롯한 열여섯 국사를 배출한 송광사, 그리고 조선조 태조 때에 고려대장경이 옮겨진 뒤로 법보종찰로서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해인사의 세 절을 이른다. 삼보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편역 드는 짓은 가당찮은 일이로되, 불사에 바쳐진 세월도 세월이려니와, 호국과 숭불의 뚜렷한 목적 아래 온 나라 백성의 성심을 바탕으로 이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 불교 문화의 찬란한 금자탑을 이루어낸 고려장경의 의미야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의 장경각은 통풍과 습도 조절이 자연으로 절묘하게 이루어지는 가야산 중턱 해발 칠백삼십 미터 지점에 세워져 있다. 대적광전 뒤의 가파른 축대 위에 세워진 장경각은 미음자 꼴로 앉아 네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채는 \"수다라장\"그리고 뒷채는 \"법보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 서 사간고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일자집으로서 벽면에 상하의 넓이가 다른 붙박이 통풍창이 달렸는데, 창에 질러진 간살의 크기도 상하가 서로 달라 통풍이 저절로 되게 했다. 바닥도, 맨 흙바닥으로 두되, 숯과 찰흙과 횟가루를 묻어 습도를 조절하게 했고, 천장도 반자가 없이 지붕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식이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는 이 장경각을 두고, 내부의 비각에 경전을 두어도 나는 새가 깃을 들이지 않는 법이 없는데도, 이 곳에는 날짐승이나 길짐승이 드나드는 흔적이 없음을 신기해 한 구절이 나온다. 화강석도 세월이 지나면 푸석푸석해지고 마는데 하물며 나무임에랴. 법보의 위력으로만 그리 될 수 있는 일이겠으나, 장경연구소의 종림스님은 그 수명이 \"이미 한계에 다달았다\"고 근심을 섞는다.

지금은 해인사에서 한주로 소일하고 있는 운범스님이 서른 해 남짓이 보물을 지켰는데, 그 뒤로 몇몇 스님들이 번갈아 소임을 맡았다가 떠난 뒤로 지금까지 십 년 가까이 장주 소임을 맡아 온 분이 관후스님이다.

해인사에 도착하니 이미 경내는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관후스님이 이른 대로 주지실 앞마당에 당도하니, 환하게 밝혀진 문창을 배경으로 스님은 그린 듯이 서 있었다. 방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왔으되 산사는 적막했다. 그러나 그 적막함은 세속의 소음에 익숙한 사람들의 빈한한 반사감정일 터였다. 동안거 중이니, 입선 시각 직전의 적막함이 예사로울 것일까보냐. 스님은 앞장 서 장주실로 향하다가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대적광전 앞에서 합장하여 허리를 깊이 꺾었다. 법당을 지나치면서 안을 향해 예를 올리는 스님은 처음 봤다.
\"본사에서야 다 그리 하지. 처음 본 게 아니라, 못 본 게지.\"
그 동안의 마음짐이 두껍고 무거워, 실제 나이보다 십 년은 더 세월을 보낸 듯한 풍모의 관후스님이 심상히 말했다. 장경각 담장 안의 서쪽 끄트머리에 붙은 장주실은 사람 두엇 누우면 여백이 없어 보이게 조붓했다. 방문을 열면 마주 보이는 벽에서 성철스님이 방안을 이윽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제 캐비닛 한 짝과 솔나무장 두 짝이 붙박이장처럼 벽에 바싹 붙어 있었고, 「한암법어록」, 「일타 큰스님 기도 성취 영험담 모음집」 따위의 책 몇 권이 포개져 놓인 좌탁 밑으로 나무 경침도 하나 놓여 있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스님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법당에서가 아니더라도 그의 삶은 하루하루가 정진 그 자체인 듯해 보인다. 몸을 깨끗이 하고서야 장경각 출입이 가능했던 그 옛날에 비하면 요즘 대중 스님들의 마음가짐은 관후스님의 눈에 차지 않지만, 참배객들도 \"그악스러워지고 무례해져서\" 장수 소임 감당하기가 점점 더 힘들다.
\"하루에 이백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한다고 하면 말예요. 일주문에서 여기까지 두 줄로 서서 얌전히 관람하는 데라고는 한두 학교도 없어요. 고등학교 애들은 여기까지 올라와 대여섯 놈씩 모여 서서 담배 먹죠. 어린아이들은 아무 데나 똥오줌 누죠. 눈이 오면 어린애고 어른이고 좋다고 날뛰면서 동서남북 막 던지죠. 장경각 살창 안으로 눈이 끼게 되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내 살을 떼내는 것 같지요. 비가 오면 우산을 받치고 와서는 우산 빗물이 판고 안으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할 줄도 모릅니다. 살창에 가까운 경판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합니다. 어쨌든지 손을 대고 만져 보려고 들어요. 살창 아래쪽은 망으로 막혀 있으니까 목말을 하고 올라가 위쪽에 놓여 있는 것 만져 보려고 들질 않나. 그러면 내 목소리가 커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아이들커녕 어른들조차 내게 서운해하기만 해요. 이 곳에 오는 사람 중 가장 어른스러운 사람은 유치원 학생들이라요. 인솔하고 온 선생님이 합장을 하면 고사리손으로 함께 합장을 하고, \'석가모니불\'을 외면 따라서 석가모니불을 외면 다닙니다.\" 장주의 주 소임은 주로 일들이다. 많으면 하루에 이천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이 곳을 참배하되 무례함이 없게 하고, 그들이 남기고 간 찌꺼기를 살뜰히 걷어내고, 그리고 경각 안팎을 두루 꼼꼼히 살펴 손질을 할 데가 생기면 종무소에 알려 곧바로 대처하게 하고, 스스로도 그 일에 동참하지만, 낮밤으로 번을 서는, 사하촌 신부락에 사는 처사들이 경비를 제대로 서도록 독려하는 일이다. \"생각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어찌 보면 단순하고도 하찮은 일로도 비쳐질 이런 일들에 관후스님은 전심전력으로 매달리니, 두 해 전에는 복막염이 터지는 줄도 모르게 몸을 심하게 부리다가 장을 잘라내고 잇는 등 큰 수술을 받았다. 팔십년도 법난 때에는 계룡산의 조그만 절에 있다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결기를 드러내 보이다가 무장한 군인들에게 흠신 두들겨 맞았는데, 그때만 해도 \"젊을 때\"라 금방 회복을 하긴 했지만, 나이가 들자 그 일 때문인지 자주 어지럽다. 수술을 받은 뒤로 병원에서는 신경을 덜 쓰고 잘 먹으라지만 맡은 바가 한시도 신경을 놓을 일이 되지 못하고, 많이 먹지도 못하여 한창 때보다 몸무게가 십 킬로그램이 줄어 지금이 오십 킬로그램이 채 못 된다. 병원 약도 참탁찮아 그저 적은 양이나마 밥 달게 먹을 따름이다. 종무소에 스님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의 방 뒤에 잇대 붙은 곳에 법사 스님도 있건만, 그래도 한번씩 훌훌 던지고 길고 단 휴가도 가짐직하건만, 그는 십 년 동안 그러지를 못 해왔다. 가장 길게 받아 본 휴가가 사흘, \"신경은 살수록 늘어서…\"하며 관후스님은 웃었다. 부여 근처의 하대라는 마을에서 손녀 둘과 손자 하나 데리고 연명하기가 버겁던 그의 할머니가 집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갑사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의 나일 열여덟 살 때쯤이었다. 서른 살 즈음까지 그 곳서 살았으나 돌이켜보기 싫을 만큼 \"징한\"기억들뿐이어서 지금까지도 그 쪽으로는 고개가 잘 돌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뒤로는 서울의 망월사, 대둔산 태고사, 전강스님 계시던 용화사, 오대산 상원사, 향곡스님 계시던 부산 관음사, 통도사 등 제방 선원을 다니다가 나이 마흔살 무렵 해인사 선방에 방부를 들였다. 강원 다닐 것 없이 부지런히 선방에서 정진만 하라는 큰스님들 말씀 받들어 선방은 원 없이 다녔으되 강원을 가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로 남는다고 했다.
\"출가 본사는 아니지만 해인사는 제게 그와 다름없는 곳입니다. 승적도 여기로 되어 있고, 물처럼 흘러 다닌 제방 선원 가운데 이 곳이 제일 많이 살았던 곳이라요.\"
인연도 지중했을 터이려니와 장경을 수호하는 마음 바탕이 신심이라고는 하지만, 그 마음자리 여일하게 붙들기가 선방의 수자 노릇에 못 미친다고 할 것인가. 장주 소임 일이 하도 고되어 걸망 챙겨지고 편할 도리 찾아서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두 해 전에 떠나신 성철스님은 하루에도 두 번씩 포행 삼아 장경각을 둘러보고 관후스님을 눌러 주시곤 했다.
\"자네가 올해 나이가 몇이고? 여기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된다. 엄벙덩벙 지내지 말고…, 그리고 어데 딴 데로 갈 생각 말고…….\"
그 말씀이 너무도 고마워 또 그의 신심이 북돋아지곤 했다. 부모 덕도 은사 덕도 썩 탐탁치는 않았고, 늘 어렵고 고단했던 그에게 이런 \"보약\"이 되었던 것에는 또 어떤 일이 있었나. 법보전에서 천일기도할 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장경각에 있는 법보전에는 난방커녕 전기도 없이 몸이 얼 지경이었다. 때로 꾀가 나서 고단한 몸 핑계 대고 방에 누워 언 몸을 녹이자면, 방선 시각에 법보전에서 꼭 백팔 참회를 드리곤 했던 지월스님이 와서 문을 똑똑 두들기고 했다.
\"보약 잡수십시오.\"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 보면 지월스님은 빗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아침 공양 전에 하는 빗지락질은 보약이 되니라.\"
그런 말씀도 관후스님의 신심에 큰 보약이 되어 주었다. 그의 요즘 보약은 해인사의 젊은 대중들이다. 결제 때에는 방부들이는 스님의 수효가 쉰이 넘고, 상주 대중도 이백이 훨씬 넘는다. 화산火山의 기氣 탓인지 해인사의 대중은 다른 절 대중보다 성정이 칼칼한 편이니, 상좌뻘 되는 그들 모두가 관후스님의 보약이고 스승이 된다.
\"대중들이 이렇게 많이 사는 데가 없지요. 이렇게 시간 지키고, 모양 갖춰 대중 공양하고, 예불 올리는 데가 없지요.\"
일요일 아침이라 학인 스님들이 더운 입김 내뿜으며 장경각 주위를 싹싹 쓸어내고 내려간 뒤, 함께 빗질하던 관후스님은 뜰 가운데 우뚝 서서 호흡을 추스린다. 모든 것이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는 말이 입에 붙은 스님, 이 스님 목에 밝고 고요한 기운 차 오른다. 그리고 부처보다 더 깊은 신심 불러일으키는 장경각 회벽과 나무 빗깔 그대로 닮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