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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라면 모연을 어떻게 하셨을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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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불교 - 김재춘 2016년 04월 410호
2013년 서울 서초동 법원 근처. 한국 교회의 대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 들어섰다. 그 엄청난 규모와 함께 공공도로의 밑을 파서 지하예배당으로 만들어버린 건축과정, 그리고 담임목사를 두고 두 패로 나뉜 조직 내부 갈등도 세간의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불교의 재정 활동을 연구하는 필자에게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수천억 원에 달하는 건축 자금을 모아냈는가가 더 큰 관심사였다. 다행히 홈페이지(http://sgmc.sarang.org)에 자신들의 모금 과정을 상세하게 적어 놓아서 그 전체적 흐름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전문가의 손에서 매우 체계적으로 준비되고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건축비 모금 과정은 기존 기독교적 전통 방식을 적절히 사용하였고,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여기에서 하나 놀라운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홈페이지 어디에도 ‘건축 헌금을 내는 것이 (개인적인) 복 받는 것이다’라는 기복(祈福)
적인 접근이 없었다는 점이다. 불사 모연(佛事 募緣)에는 시주하면 사업이 잘되고, 자손에게 좋고, 본인 건강이 좋아진다는 식의 기복적 내용이 꽤 많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사례였다. 그들은 어떻게 기복을 얘기하지 않으면서도 천문학적인 돈을 기부받을 수 있었을까?

불교적 전통과 가르침에 따라 조직을 운영하는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 시작된 본 연재 글은 꼭 필요하지만 법답지 않은 모습이 다분한 ‘모연 활동’에 대하여 몇 회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가장 먼저 모연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절 집안에서 중요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모연의 기술이나 실무적 요령이 아닌 불교적인 모연의 방향성과 접근법에 대한 고민을 함께 풀어 가보겠다.

모든 종교는 신도들의 기부(보시, 시주, 헌금)로 살림을 꾸리고 진리를 전파해나간다. 종교마다 기부와 모금에 관한 교리가 있게 마련이고, 수천 년간 이어져 온 관련 전통과 고유한 체계가 존재한다. 종교 공동체의 유지 및 전법 활동에 대한 (의무적) 기부의 강조, 어려운 이들을 돕는 적선(積善)에 대한 찬사, 자발적 기부활동의 권장, 강력한 기부 권유자(주로 성직자)와 조직력에 의한 모금활동, 대형 건물을 짓는 건축비 모금의 필요 등은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씩 다른 부분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 유독 중요시되는 십일조(유대교의 수입 10% 나눔 전통인 체다카를 계승한 것임), 이슬람교도들이 가지는 의무로서의 자카트(소득의 일정 부분을 타인과 나눠야 함), 안거가 끝난 승가를 위해 가사를 보시하는 전통인 까티나 등 종교마다 교리와 역사에 따라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 중 불교는 보시 활동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한다.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윤리 도덕 측면을 넘어서서 승가를 유지하고 올바르게 수행하는 수행자들에게 필요한 필수품(음식, 옷, 거처(깔개), 의약품-사사공양四事供養)을 지원하는 현실적 필요를 해결함은 물론 ‘수행’의 한 방편으로 대우하고 다른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과정으로 이해한다. 보살행인 10대 바라밀에 보시바라밀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만큼 중요한 보시를 이끌어 내는 행위로서 모연(募緣)의 현주소는 어떨까?

일부 사찰들의 불사 모연문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보시의 의미를 잘 전달하며 동참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기복신앙을 조장하는 면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보시하면 복 받는다. 복 받으려면 보시하라’는 표현은 달콤한 꼬임을 앞세우는 사법(邪法)에 더 가깝다. 이 내용은 중세시대 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복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를 바라면서 보시하지 말라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며 보살님들과 부처님을 복채를 받고 복을 나눠주는 사이비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불경한 행위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경전의 부처님 말씀이나 대덕 스님들의 법어에도 ‘보시를 하면 공덕이 크고, 특히 어떠어떠한 공덕이 있다’는 논리로 보시를 장려하는 대목이 많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수행 과정에서 중요한 보시의 원리와 결과를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지, 마치 대가성 거래처럼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기복을 벗어난 모연이 가능한가
세간에 기복신앙이 마치 불교 고유의 것인 양 이해되고 있는 것은 불교의 전승 과정에서 토속의 무속 기원신앙과 결합되고, 숭유억불 정책으로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했던 조선 시대와 일본 불교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민초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종교의 기능에 충실하다 보니 생긴 현상으로 이해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기복이 불교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게 해석하여 합리화한다.

기복을 벗어난 모연을 얘기할 때면 으레 따라오는 비판이 있다.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기복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바른 법만 말하면 신도들은 돈을 내지 않는데 그렇다면 절 살림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라고 말씀하시는 종단의 어른도 뵌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수행이지 절 살림이 아니지 않은가.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부처님께서도 보시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비구에게 “보시가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중들도 굶고 있어 사문들에게 줄 보시물이 적은 것이고, 둘째는 수행하는 승가가 존경을 받지 못해서 대중들이 보시를 꺼리는 경우이다. 첫 번째는 같이 굶는 수밖에 없고, 두 번째는 더욱 열심히 정진하면 된다.”고 하셨다. 우리가 스스로의 적폐(積弊)를 끊으려 한다면 굶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욱 정진하면 된다. 이미 거대해져 버린 조직의 덩치와 안온한 삶을 포기할 수 없으니 법 아닌 것을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변명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버림은 원래 불교의 백미 아니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기복을 벗어나서도 모연을 할 방법이 처음 얘기한 서초동의 대형교회 건축비 모금 과정에 나와 있다. 그런 대규모 불사를 하면서도 그들은 ‘교회에 기부하면 복 받을 거다’라는 얘기를 거의 하지 않고, 교회의 필요와 비전 및 역할, 건축헌금의 의미와 가치만을 얘기하며 성도들을 독려했다. 기복 이야기 없이 수백억 원을 모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외부의 일반인들이 불교를 바라보며 ‘기복’이라고 꼽는 대표적 내용들이 몇 가지 있다. 이 중 입시기도는 내 아이만의 합격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것으로 아무리 좋게 봐도 기복이 많이 담겨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필자는 ‘3개의 발원문’ 제도를 주창해왔다.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받아서 위로해주는 것도 종교의 큰 기능이니 기도 자체는 유지하되 기복적 방식은 좀 개선하자는 것이다. 내 아이만을 위한 발원문과 별도로 2개의 발원문을 더 준비하자. 준비하는 총 3개의 발원문은 내 아이에 대한 것 하나, 같은 날 시험 보는 모든 아이를 위한 것 하나, 그리고 나처럼 기원해줄 부모가 없는 수험생의 것 하나이다. 그리고 발원 기도의 내용을 ‘모든 아이가 자기 실력을 발휘하여 후회 없는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내가 이번 시험에 실망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원하고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의 입시기도비의 1.5배를 받는 것이다. 1은 원래대로 절의 운영에 사용하고, 0.5는 보육원이나 복지시설에 보내는 것이다.(사실 이 0.5의 공덕이 자녀를 더 크게 지켜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방식이라면 어느 정도 기복에 대한 비판도 피할 수 있고, 원하는 비용도 확보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 호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현실적으로 모연을 잘 할 수 있는 방법과 함께
모연에 대한 불교적 해석과 의미 찾기를 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