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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기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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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연수(소설가) 2016년 04월 410호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던 중의 일이었다. 스플리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남행 버스에 올라탔다. 오른쪽으로 아드리아해를 끼고 내려가는 길이었기에 오른쪽 좌석에 앉았다. 그 길을 따라 두브로브니크에 가려면 국경을 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관통해야만 한다. 두브로브니크는 마치 섬처럼 인접국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길이라니 어쩐지 봉우리들이 날카롭게 보였다. 하지만 고개만 돌리면 언제라도 아드리아해의 잔잔한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저무는 햇살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게 어떤 슬픔인지를 설명하자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녹야원으로 향하던 부처를 만난 유행승 우빠까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우빠까는 부처의 첫 제자가 될 수 있는 엄청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천재일우의 순간, 우빠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도반이여, 그대의 감관은 밝습니다. 피부색은 청정하고 빛이 납니다. 도반이여, 그대는 어느 분께로 출가했습니까? 그대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어느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까?”

부처는 이 질문에 진심으로 대답한다. 자신은 모든 것에 뛰어난 자요, 모든 것을 아는 자이니 누구를 스승이라 부르겠느냐고. 그러니 자신에게는 스승도 없고, 유사한 이도 없으며, 지상에도 천상에도 자신과 견줄 이가 없으니 세상에서 아라한이고, 위 없는 스승이며, 유일한 전등각자라 모든 번뇌가 꺼져 적멸을 이루었노라고. 이 대답에 우빠까는 크게 실망했던 모양이다. 그가 어떤 대답을 원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처의 대답이 그의 기대에 못 미친 것만은 분명했다. 우빠까는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고 한다.

이 일화 때문에 부처도 못 알아본, 천하의 둘도 없는 바보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긴 해도 우빠까는 아주 훌륭한 수행자였을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의 한 평생이 증명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생겼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짐작하자니, 또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정현종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생을 만나는 일이라는 말은 진실이다. 우리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평생 살아가니까.

우리가 그 ‘한 사람’이 되는 것을 학교에서는 ‘자아실현’이라고 일컫는다. 이 때의 자아가 살인자나 술주정뱅이일리는 만무하다. 그 자아란 선량하고 좋고 행복하고 멋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훌륭한 것이니 우리들 대부분은 평생을 바쳐도 그런 자아를 실현하지 못하고 죽을 뿐이며, 다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회의 존경을 받는 현자로 받들어진다. 이런 현자가 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평생 경전을 읽고 공부를 해도 현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세파에 휩쓸려 어떻게 하면 남을 이길 수 있는가에만 골몰하는 범인들에게 그런 자아는 딴 세상의 이야기이리라.

우빠까는 어느 쪽일까 생각하면, 어떻게 생각해도 현자 쪽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빠까는 부처를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빠까 앞에도 그 ‘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든 시원치 않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고운 얼굴에 화려한 옷을 입었든 봉두난발에 냄새나는 옷을 입었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한 사람’이 부처를 가린다는 점이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볼 수가 없다. 자신의 자아에 가려 부처가 보이지 않으니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떠날 수밖에. 그렇다면 부처를 만나는데에는 자신의 일생마저도 방해가 될 뿐이다.

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결국에는 한 생각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집약된, 너무나 단단한 생각이니 금강석 정도는 되어야만 깰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은 각자의, 일생이 집약된 한 생각을 앞세우고 서로 만난다. 각자의 일생은 저마다 다르니 마주 선 두 개의 ‘한 생각’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요원하다. 각자는 자신과 상대방을 가리고 선 한 사람, 곧 한 생각, 그러니까 자신의 생각을 통과한 세상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를 마주한 우빠까처럼. 그는 자신의 일생을 걸고 부처에게 질문하고 있다.
‘도반이여, 그대의 스승은 누구십니까?’라고. 자신의 일생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이미 존재했고, 그래서 부처의 답은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이들을 이기고 지배하려는 자들, 가난한 사람들을 짓밟고 오직 돈만을 아는 자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경전도 읽고 명상도 한다. 평생에 걸쳐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고 또 배우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경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이 되려는 생각, 내가 그토록 실현하고자 하는 자아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시련을 이겨내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칼을 들었던 둘도 없이 훌륭한 전사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이 세상을 망친 주역이라는 사실. 그렇다면 이 훌륭한 전사는 자신을 찌를 수 있을까?

아드리아해에서 느낀 슬픔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그토록 따랐던, 그래서 즐겨 읽었던 부처의 가르침이란 자신을 죽이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결론, 자신이 죽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 어쩌면 부처가 깨어나라고 말을 건 건 자신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진짜 존재를 향해서였다는 깨달음에 이른 자아의 슬픔 같은 것. 따라서 자아 실현은 언제라도 슬픈 일이며, 가장 훌륭한 자아도 기뻐할 줄은 모른다. 그래서 자아끼리는 슬픔으로만 공감할 수 있다.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며 슬픔을 느낀 이후로 나의 관심은 기쁨에만 가 있다. 우빠카와 마주쳤을 때, 부처는 이미 그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나에겐 스승이 없고, 지상에도 천상에도 나와 동등한 존재는 없다. 나는 세상에서 아라한이며, 위없는 스승이며 나 혼자가 정등각자이니 모든 번뇌를 끄고 열반의 적멸을 이루었다. 나는 법의 바퀴를 굴리러 까시의 성으로 가노라. 어두운 이 세상에서 나는 불사(不死)의 북을 울릴 것이다.” 부처의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으려고 하지만, 아직도 나는 기뻐할 줄을 모른다. 죽기 전에, 기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