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고려팔만대장경의 새로운 탐색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민영규 1996년 03월 169호
「삼국유사」말고도, 일연스님의 또 하나의 저술, 「중편조동오위中篇曺洞五位」세 권이 있어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상실한 지 오래지만, 다행히 삼백십육 년 전 일본이 그것을 복간하고 일본조동종의 중요한 전적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기까지 외로운 추적을 계속하기는 나로서 최근의 일에 속한다. 「조동오위」가 오늘에 살아남게 된 그 고마움을 이를 진데 이루 표현키 어려울 만큼이지만, 또한 일본 불교의 한계를 여기서 발견한 것 같은 무연한 느낌을 금하지 못한다. 곧 그 진정한 저자가 누구이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거기서 무엇을 호소하려 했었는지에 대하여 끝내 밝혀 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연이 경상도 남해도에 머물기는 1249년에서 1261년까지, 나이로는 마흔 넷에서 쉰 여덟에 이르기까지 십이 년 동안이다. 일연이 그 서문(1290)에서 이르기를 당시 불교의 됨됨을 개탄한 나머지 가까스로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지었노라 적고 있다. 남해도를 뒤로하고 떠난 지 팔 년 만인 1268년, 그러니까 일연의 나이 예순 셋에 고려대장경 재조의 실질적 대단원을 의미하는 대장락성회大藏落成會를 국가 차원으로 일으키고 일연은 불교계를 대표하여 그 주맹자主盟者로 추대된다. 일연에겐 또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세 권의 저서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 일연과 대장경 재조와의 관계가 결코 심상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모처럼 「조동오위」의 중편에 뜻을 품고 있으면서 정림사定林寺에 머문 지 칠 년 동안, 무엇에 쫓기었기에 그토록 그를 바쁘게 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정림사는 분사도감과 함께 정안鄭晏이 남해도에서 경영하던 유적의 하나였었다.
고려대장경이 재조된 시기가 몽고군에게 쫓기던 강화경 시대였으므로 응당 그것은 강화도이어야 한다고 대답한다면, 자료가 구비되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저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중편 조동오위 해제」(1948)를 집필하면서 나는 고려대장경이 실지로 조성된 지점을 남해도와 그 대안 진양군으로 추정했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진양군과 하동남해도는 당시 독재 권문세가이던 최이와 그 처남이자 최씨 다음으로 권문세가이던 정안의 선대로부터 식읍지였었다는 데에 있다. 개인 재산을 기울여 가면서 대장도감과 분사도감을 경영했다고 하는 그 \'사재\'라는 것은 다름 아닌, 중세적인 의미의 식읍에서 찾아야 한다. 백과에 걸쳐 자급자족이 가능했을 뿐더러 원대한 계획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남해도와 그 대안 진양군은 지리적으로 천혜의 전술적 요지를 형성하고 있을뿐더러 천연자원 등 제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경판의 자재가 되어 줄 후박나무는 지리산과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 남해안 일대에 자생하는 천연자원이다. 그들이 벌채하여 한곳으로 운반하는데 지리산의 경우 섬진강이 있고, 남해안 도서의 경우 오늘날 한려수도로 불리는 바닷길이 있다. 경판을 다지는 데 독역관염장별감督役官鹽場別監이라는 것이 있어서 일정 기간 바닷물에 담그고 그것을 되풀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내가 직접 남해도 관음포에서 경험한 이야기지만, 바닷가에 낮아 한 팔을 길게 빼 들 때 철렁거리는 바닷물이 거기에 와 닿을 것 같다. 강화도처럼 간만의 차가 심해서 십리도 넘게 노출되는 갯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조건들이다.
최이를 정점으로 한 최씨 정권에겐 오랜 세월 언젠가 한번은 자웅을 결판내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기다리는 적수가 있다. 수천 수만의 승도들이 순간적으로 군대처럼 기동화를 할 수 있는 불교 사찰 세력이 그것이다.
숙명적으로 두 세력은 그 초기로부터 앙숙이 되어 왔다. 그 절정을 기록한 사건이 고종 4년(1217), 때마침 두만강 유역 여진족의 금합세력인 포선만노군浦鮮滿奴軍이 대거 춘천과 원주 지방으로 쳐들어와 고려를 괴롭히고 있을 때에 일어났다. 「고려사」에서는 그들을 거란병으로 기록한다. 거란병을 가장한 승병들이 충헌군을 위협해 왔다. 최충헌은 도성 사대문을 굳게 닫고, 성안의 승도들을 몰살하는 작전으로 나섰다. 「고려사」는 이 때 도살당한 승도의 수를 \'팔 백이 넘게\'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틀동안의 참극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는 여름날이었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흘러내린 피가 내를 이루었다.
1249년 10월에 오랜 시름 끝에 최이가 죽는다. 이 해는 또한 일연이 남해 정림사 주지로 취임한 해이기도 하다. 최이의 죽음에 임박하여 정안이 상경할 필요가 있었다면 일연의 정림사 주지 취임은 정안의 남해도에서의 직무를 대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혹 1243년에서 1245년까지 각판의 작업량이 급상승해 있음을 감안할 때, 그것을 서두를 필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었다면, 완성된 경판을 하루 빨리 강화도로 해상 운송해야 하는 막중한 업무가 뒤따르고, 그것 역시 정안이 책임지고 나선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최이의 권좌는 그의 아들 항에게 계승된다.
1251년 정월, 정안이 지문하성사(종2품직)로 제수된다. 그리고 같은 해인 9월, 고종왕이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나아가 백관과 더불어 공이 필(功華)했음을 고하고 행향行香의 의식을 치룬다. 나는 여기서 생각하거니와, 서문 밖에 대장경판당을 서둘러 성주한 사실하며 행향의 의식이 모두 정안 한 사람의 주관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던가. 강화정부를 통틀어 처음부터 이 일에 관여해 온 이는 정안 한 사람밖에 살아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안의 인망은 더욱 높아질밖에 없다. 참지정사로 승진하고, 1256년, 일연이 황급하게 정림사를 작별하고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윤산 길상암으로 자리를 옮긴다. 고려사는 정안이 죽은 해를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최항이 차차로 그 본색을 드러내어 정안을 시기한 나머지 죄목을 꾸며 백령도로 귀양 보낸 다음 거기서 침살沈殺하고 만다. 아울러 그 재산을 몰수한다. 정림사도 몰수된 재산 속에 든 것이었다면, 정안이 죽은 해와 일연이 정림사를 뜨게 된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다.
경판의 정교성, 판본의 완벽성, 그리고 조판의 유구성,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갖춘 완성도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높다. 그 이전에도 그만한 것이 없었고, 그 이후로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칠백 사십 오 년이 되지만 아직 없었다. 도대체 그 높은 완성도를 어떻게 해서 그 어려운 시기에 이룩할 수 있었던가.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원초적인, 그러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러한 질문마저 일찍이 제기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그것을 당면한 국가의 안위와 평강을 위한 때문이었던가. 황령이 영고하고, 백곡이 함등하고, 국왕전하 수 만세 운운은 이러한 경우 식상에 걸리도록 우리가 자주 보아오던 터이지만, 해인사의 경우에 한해서 본장의 어느 구석에서도 그러한 상투적인 수작을 발견하지 못한다.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음의 사례에서 발견된다. 육천 오백 육십 권을 헤아리는 매 경전 끝장에 가서

모모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
某某歲高麗國大裝都監奉勅雕造

열 네 글자뿐, 이러한 경우 반드시 나타나는 거창한 이름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만큼 방대하고 이만큼 역사적이고 그리고 또 이만큼 완성도가 높다보면, 이것은 모두 내가 이루어 놓은 공이 외다 한껏 자랑도 할 만한데 말이다. 그 주역이 과연 누구누구였으며, 어떤 계층 어떤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었는지 끝내 이름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 유일하게 알려진 이로서 수기守其 한 사람이 있으나, 매 경전마다 그 역자나 찬자의 이름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듯이 이 경우에 있어서도 「신조대장교정별록新雕大藏校正別錄」삼십권의 찬자로서 그 이름이 필요했을 뿐, 공로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또 앞에서 언급한 바 각자공의 이름들이 문제가 되겠으나, 그것 역시 작업의 진행과 사무상의 정리를 위한 표지였을 것이며, 위와 동단同斷으로 보아서 좋다.
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은 최이와 정안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간 관계가 씨실이 되고, 이름 내세우기를 마다한 당대 불교계 지도 인사들이 날실이 되어 짜낸,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