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삶이 힘겹고 누추한 시절이 있으며, 또한 그 암담함을 위무해줄 자기만의 마법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내게 그것은 미술관 순례였다. 육신은 남의 집에서 청소, 빨래,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만 영혼은 늘 그림에 머물렀다는 천재화가 세라핀 루이를 학고재… 우리 것이 느껴지는 이름입니다.
갤러리 대표인 남편이 한학을 오래 공부했고 학고재라는 이름은 《논어(論語)》의 ‘옛것을 배워 새것을 창조한다(溫故而知新)’는 이념에서 따왔습니다. 1988년 인사동에서 고서화 화랑으로 출발했는데 고서화만 취급하는 것으로는 갤러리 운영에 한계가 있었어요. 지금은 전통적인 철학과 정신을 새롭게 재해석한 선구자들의 전시를 선보이고 있고요. 2013년 상하이 학고재를 개관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미술시장을 주도해나갈 뿐 아니라, 두 나라의 미술이 동시대 세계 문화 속에서 어떻게 어우러지고 성장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하고자 늘 고민하고 탐색하고 있습니다.
건폐율을 생각하면 한옥 갤러리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는 집도 한옥이라 들었는데 기와집만의 특별함이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한옥이라 전통 작품만 전시하나 싶겠지만 현대화나 서양화, 조각 들도 모두 잘 어울립니다. 많은 작가가 우리 갤러리에서 전시하기를 원하죠. 외국 작가나 콜렉터들이
여기서 미팅하고 차를 마시고 식사하기도 하는데, 대한민국 400여 개 갤러리 중에 한옥 갤러리 학고재는 기억을 해요. 특히 집 마당에 매화가 벙글 때, 백 송이가 넘는 모란이 뜰에 가득할 때, 국화가 향기를 뿜을 즈음이면 작가들과 함께하는 모임을 갖곤 하는데, 이게 한옥에 사는 즐거운 특권이지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나요?
갤러리에 많은 전속작가가 있지만 강요배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작품도 물론 좋고요. 고서화 전문화랑 시절, 학고재에서 민중 미술작가들의 작품에 가격을 매겨 전시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그분과는 지금도 1년에 두어 번씩 제주에서 밤늦도록 막걸리를 마시고 작품도 보고 바닷가를 걷지요.
그림이 담은 거친 삶의 결을 보았을까. 사랑에 빠지듯 사람과 작품에 대해 온기를 나눌 줄 아는 그이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다.
갤러리 한편 좁은 공간에 스며든 향훈에 잠시 숨 고르고 한마디 보탰다. 어느 해 향 전시장에서 만난 스님이 매일 향공양을 올리라 한 말씀을 따르면서 장만했다는 침향이란다. 불전에 올리고 나머지는 차 마실 때, 다라니 주력을 할 때 향 피우기를 즐긴다.
더불어 오늘은 월간 《해인》을 위한 손님맞이라며 차 달이는 손길이 분주하다.
부처님과의 인연은 얼마나 되었는지요?
친정은 불교이고 시댁은 기독교였어요. 새댁 시절에는 시집 가풍을 따랐는데 골프에 재미 붙여 한참 산으로 내달리던 무렵에 남편이 인로왕보살이었습니다. 마침 아이 문제로 마음이 들끓던 때라 세검정 소림사에 매일 가다시피 했어요. 초발심(初發心)이라고 얼마나 절을 많이 했던지 글쎄 절 바지 무릎에 구멍이 났지 뭡니까. 재일(齋日) 지키고 백일기도 입재하고 회향하고 또 입재, 회향을 거듭하면서 교리 공부하고 법명 받았습니다. 정화덕(正華悳)이라는 법명이 좀 무겁게 여겨지지만 이름값 하고 살려고 자주 새깁니다.
제가 참 많은 신행담을 들었습니다만 법복에 구멍 났다는 에피소드는 처음이에요. 불자가 되길 정말 잘했구나 싶을 때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소금밭 같을 때에도 그저 그냥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동안 보들보들해졌어요.
어느 해 여름, 하도 힘들어 만 배를 시작했습니다. ‘끝내야 한다, 해내야 한다…’에만 마음 두고 땀을 쏟아가며 만 배를 채웠죠.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스님께 ‘저 다 했어요’ 말씀드렸더니 ‘천 배만 더 하소’ 하시는 겁니다. 짜증나면서 화가 확 치밀데요. 그래도 스님 말씀에 거역 못하고 다시 법당으로 갈 수밖에요. 그런데 참 신기했어요. 800배쯤 할 때부터 환희심이 일면서 그 모든 것이 내 문제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더군요. 이제 참 편안해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아주, 아주 조금 알 것도 같고요. 그리고 최근 발견한 일인데 사진 속의 제가 모두 웃고 있어요. 이만하면 잘 살았구나 싶어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입니다.
나이 들어 갤러리 운영에 합류했고 그동안 엄마, 아내, 며느리, 여자, 딸 등의 모습으로 살면서 어떤 역할이 가장 어렵고 힘들었으며 행복한 때는 또 언제였는지요?
제가 갤러리 일을 늦게 시작했지만 가계부 쓰며 집안 살림 하듯이 안살림 꾸렸고, 아트페어에 참가해 성과도 웬만큼 냈어요. 일하며 느끼는 성취감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 기쁨, 힘듦, 이 모든 것은 엄마 노릇 할 때 다 맛본 것 같아요. 아이들로 인해 부처님 법 만나고 성숙한 것도 감사한 일이고요.
갤러리는 정말 우리 부부가 최선을 다해 일구어낸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늘 부지런하라고 주문하죠. 그래야 당당하다는 말 덧붙여가면서요.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아, 이것은 남편의 꿈에 부창부수되어 동참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청동 학고재가 좁아서 부암동에 땅을 확보했어요. 연면적 1,800평 정도로 설계 중인데 이곳에 한국 고유의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예품을 기획전시하고 그 작품들을 해외 시장에 내놓고 싶어요. 스위스에서 열리는 바젤 아트페어(1970년에 시작된 세계 3대 아트페어)가 대표적이죠. 바젤
아트페어는 엄격한 심사를 거친 화랑에 참여 자격을 주는데 학고재는 이제 웨이팅(waiting)에 올라 있어요.
인터뷰 말미에 학고재 대표인 그이의 남편 모습이 보인다. ‘인생 최고의 어시스트’라 말하고 싶었으나 침을 삼켰다. 학고재가 미술관의 범주를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확장되는 부암동
시대를 꿈꾸는 그들이다. 늦겨울 해거름 녘, 정화덕 보살이 마음 쉼의 장소로 꼽고 있는 미황사 동백숲길을 손잡고 걷자 기약하고 학고재를 나섰다.
인터뷰를 끝내고 갤러리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있는 그이의 한옥을 찾았습니다. 살림집을 구경한다는 것은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만나는 거지요. 누마루 딸린 한옥서재에는 학고재출판사 책들로 문향이 가득했습니다. 마당가 10여 그루 청매가 볼록볼록 꽃눈을 켜고 해묵은 모란이 맨몸인 채 삼동을 나는 모습은 결코 추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 꽃들로 풍류가 넘칠 때 그 어느 자리쯤에 월간 《해인》이 놓여 맑은 기운 더하는 인연이 지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