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겁지겁 달려와 다다른 기차역, 왜 떠나려 했는지 어떻게 가려 했는지 선명하지 않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여행 가방을 열어본다. 담았어야 할 지도와 물, 지갑, 여벌옷은 없고, 미처 비우지 않은 잡동사니만 가득하다. 이 쓰레기를 이고 지고 가야 하나? 가다가 목이 마르거나 옷이 더러워지면 어쩐담? 준비 없이 출발한 여행에선 그렇게 갈팡질팡하다 첫 번째, 서원 세우기
이 여행의 동반자는 남편. 남편과 함께 여행 갈 준비를 한다.
우리에게 식(識), 즉 아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서원(誓願)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귀한 손님을 집에 맞이할 때 초대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킨 후에야 집 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하게 되듯, 아이를 맞이하기 위해서 그 마음부터 일으켰다. “밝고 건강한 아이가 오기를 서원합니다.” 매일 아침, 남편이 거실의 작은 불단(佛壇)에 청정수를 올리고 우리는 아이와 귀한 인연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이 서원이란 것이 신기한 힘이 있는지, 그 긴 시간 나태함에 눌려 하지 못했던 ‘삶 돌아보기’를 하게 만들었다. 서원에 이어 ‘삶 돌아보기’를 하면서 남편과 계획한 것은 바로 참회(懺悔)와 삼업(三業) 관리였다. 아이를 위해 참회로써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청소하고 삼업 관리로써 몸과 말과 마음자리를 단장하고 싶었다.
두 번째, 참회하기
모든 인연은 내 업에 맞게 깃들기 때문에 ‘좋은 아이 인연’을 원한다면 우선 참회로써 업을 청정히 해야 한다. 참회란 과거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부처님이나 보살님 앞에서 고백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잘못을 아는 것이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의 기본이 된다. 《담마빠다(법구경)》 319게에도 “잘못을 잘못으로, 잘못이 아닌 것을 잘못이 아닌 것으로 아는 이들, 그런 사람들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좋은 세계로 간다”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참회문은 “이러이러한 마음을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라는 구조이다. 원효 스님의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의 일부를 살짝 뽑아봤다.
“나와 중생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무명에 취하여 죄짓기 한량없고 오역죄(五逆罪)와 열 가지 나쁜 짓 중에 아니 지은 것이 없으며 스스로도 짓고 남에게도 가르쳐서 남이 하는 짓을 보면서 기뻐하였다. 이런 뭇 죄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지만 여러 부처님과 성현들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이미 지은 죄에 대해서는 깊이 부끄러움을 일으키고 아직 짓지 않은 것은 새로 감히 짓지 않을 일이다.
- 《대승육정참회》 제1권, ‘한국불교전서’ 제1책
《대승육정참회》와 《자비도량참법》 제1권의 ‘참회’ 편을 읽다 보면 분명 아주 오래전 나 아닌 타인이 쓴 참회문인데도 가슴 절절하다. 참회할 것이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무턱대고 살아오기만 한 것에 한숨이 난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참회문이나 참회 방법을 가지고 매일 꾸준히 업을 맑혀간다면 지나치던 아이 인연도 살금살금 기웃거리며 그 부부에게 깃들고 싶어 하지 않을까?
세 번째, 삼업 관리
참회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삼업 관리이다. 삼업은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말로 짓는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이다. 참회로 업을 정화한다면 이 삼업을 잘 관리하는 것으로는 선업을 닦는 것이다. 《담마빠다(법구경)》 281게에도 “말을 조심하고 마음을 잘 제어하고 몸으로 악한 일을 하면 안 된다. 이 세 가지 행위의 길들을 청정히 한다면 현인이 말씀한 길에 이를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신체적으로 ① 살생 ② 도둑질 ③ 삿된 음행, 언어적으로 ④ 거짓말 ⑤ 이간질 ⑥ 욕설 ⑦ 꾸며대는 말, 정신적으로 ⑧ 탐욕 ⑨ 분노하는 마음 ⑩ 어리석은 마음, 이 열 가지를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길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맛지마니까야》의 〈쌀라 마을 장자들에 대한 경〉에도 나와 있다. 이렇게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를 청정하게 한다면 아이를 맞이하기 위한 최고의 단장이 아닐까?
결혼 후 받는 선물들 중 특이한 것들이 엽산제, 비타민제, 철분제 등이다. 임신 전후에 필요한 약들로 몸에 결핍되었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란다.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많은 유부녀 선배가 해주던 말이 ‘몸을 만들어야 한다’였다. 처음엔 ‘몸매’를 만들라는 것으로 알아듣고 혼난 적도 있었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따뜻하고 건강한 ‘엄마’의 몸을 만들라는 뜻이었다. 엽산제를 선물 받은 날, 남편과 나는 흰 종이를 펼치고 피해야 할 음식을 찾아 적어보았다. 그리고 식단도 짜고 운동 계획도 세웠다. 오계(五戒)도 다시금 새겼다. 물론, 계획한 대로 잘되지는 않겠지만 부부가 함께 이런 것을 계획하고 소통하면서 집 안에 밝고 활기찬 에너지가 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술 담배를 해도 건강한 아이를 낳더라’는 말에 귀 쫑긋 세울 필요가 없다. 결국 욕망이나 나태함을 끊지 못한 핑계에 불과하다. 서원을 세우고 무조건 바라기만 하는 것에는 결실이 없다. 서원에는 내 삶을 돌아보며 참회하고 정화하는 과정이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든지 서원을 세웠지만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활, 잘못된 정진, 잘못된 새김, 잘못된 집중을 가지고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보를 얻을 수가 없다. (…)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그것은 과보를 얻는 데 이치에 맞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를테면, 불이 필요해서 불을 구하고 불을 찾아 나선 사람이 젖은 나무 조각을 부싯목으로 문지르는 것과 같다. 서원을 세웠지만 젖은 나무 조각을 부싯목으로 문지르면, 불을 얻을 수가 없다. (…)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그것은 불을 얻는 데 이치에 맞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 〈부미자의 경〉(MN126), 《맛지마니까야》, 전재성 옮김
밝고 건강한 아이가 오기를 서원함으로써 여행 목적이 분명해졌으며, 지난 여행에서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를 비우듯 참회를 마쳤고, 이번 여행에 필요한 몸과 마음의 건강관리 계획도 세웠다. ‘서원 세우기.참회하기.삼업 관리’가 적힌 여행계획표를 마음에 꼭 쥐고, 이제 아이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