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시사아속 공동체 (1) 소비는 적게, 남은 것은 모두 사회 환원,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역 공동체, 나눔의 경제 공동체, 생태적 기업 등이 태국 시사아속 공동체를 대표하는 표현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생태 공동체나 자급자족 공동체를 꿈꾸는 곳에서 시사아속 공동체의 성공 사례를 탐방하러 많이들 다녀온 듯하다. 불교 공동체인데 탐방을 주로 다녀온 단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불교계 사찰이나 불자 단체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공동체의 기원은 부처님께서 이루신 사방승가가 최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승가 공동체가 엄연히 존속되고 있으나 형식만 그러할 뿐, 그 안의 실질적 삶은 과연 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공동체적 요소가 많이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태국 시사아속을 찾는 사람들의 얘기를 접하면서 현대 사회의
대안인 사부대중공동체를 찾는 불교계의 노력과 발걸음은 너무 느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태국 시사아속 공동체에 대해서는 두 번에 걸쳐 소개할 예정으로, 이번 호에서는 시사아속
공동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사아속 공동체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지속 가능한 자급자족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아소케(Asoke) 공동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고, 그다음은 푸미폰 국왕의 ‘자족경제론’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구성원이 끊임없는 자기 수련을 통하여 선업(善業)을 쌓고 깨달음을 얻는 것 또한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태국의 불교
태국은 상좌부 불교(남방불교)와 대승불교(북방불교)를 모두 따른다. 태국의 상좌부 불교는
인도의 아소카왕이 새로운 불교 교리를 포교하기 위하여 동남아시아에 파견한 스님들을 통하여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기념탑이 있는 나콘파톰에 B.C. 3세기경에 도입되었다. 대승불교는 5세기경 북인도 지역의 대승불교 승려로부터 전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국 남쪽 지역에서 현재까지 번성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이후 태국 중부 지역과 캄보디아로 전파되었다. 태국은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를 모두 받아들였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태국인은
상좌부 불교를 따르며, 중국계 태국인들이 대승불교를 따르고 있다.
불교가 태국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태국의 대부분 가족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의 남자는
사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태국에서 20세가 넘는 남자 불교 신자는 적어도 일생에 한 번, 5일에서 석 달 사이의 기간 동안에 사원에서 수행하는 풍습이 있다. 태국의 사원은 사원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외에도, 전통적으로 마을의 여관 역할, 마을 소식 제공, 고용 및 정보 제공, 학교, 병원 및 진료소 등 공동 사회 중심지의 역할을 함으로써 태국 국민에게 중요한 여러 가지 봉사를 해왔다.
아소케 공동체의 불교적 가치관
아소케 공동체는 마을 단위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룬 이 분야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아소케 구성원들은 과도한 물질적 소유를 부정하고, 최소한 생존에 필요한 물질만을 소유하며 ‘복’을 쌓는다는 의미에서 보시를 실천하거나 성실하게 일한다.
1969년, 아소케 수행을 하는 승려들과 재가 불자들의 헌신을 통해 이런 삶의 철학을 현실에서 실천 가능한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체계화시켰다.
지도자 보디락사(Phodhiraksa) 스님이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를 모두 적용한 수행법을
만든 뒤에 방콕 북쪽 외곽 지역에 ‘산티 아소케’라는 공동체를 첫 번째 창설하였다. ‘아소케’란 단어는 ‘고통 없음’을 뜻하고 ‘산티’는 ‘평화’를 뜻한다.
아소케 공동체는 의·식·주 및 약(藥), 이 네 가지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며 사는 것만이
오염된 마음이 야기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방지하는 길이라며,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바탕으로 한 대안적인 경제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복짓기주의에 대한 열정을 키운다. 복 짓는 수행을 통해 오계를 지키며,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전통적인 운동인 것이다. 오계는 살생하지 말며,
훔치지 말며, 음행하지 말며, 거짓말하지 말며, 중독성 있는 것들을 취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푸미폰 국왕의 자족경제론
농업에 기반한 태국의 전통사회는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중요시했었다. 태국인들은 풍부한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먹을 것과 땔감은 늘 풍족했고 평화로운 국가 안에서 국민은 행복했다.
많은 외국인이 비옥한 대지와 온화한 기후를 찾아 태국으로 이주하였다. 그중에는 특히 중국 출신의 노동자가 많았다. 태국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이후 상업에 종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태국이 농업 경제사회에서 상업 경제사회로 전이되는 시발점이었다.
태국은 사릿 타나랏 장군(1957~1963)의 집권을 계기로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기술관료제를 도입하고, 민간투자와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했으며, 대규모 농촌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교육시설을 확충했다.
냉전시대 동안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 정부는 태국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했다.
그 결과, 1958년 태국의 국민 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였으며, 국제수지는 흑자로 돌아섰고, 외환 보유액은 미화 8억 달러로 늘어났다. 당시 태국은 쌀과 원목(티크)의 최대 수출국이었으며, 관광산업 또한 호황을 이루었다. 각종 기반 시설과 경제 체제는 현대화되었으며, 태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시장경제를 주도함과 동시에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일자리는 돈이고, 돈은 곧 일자리다. 그것이 행복의 원천이다”라는 정부의 슬로건은 일자리가 풍부한 도시로 농촌 인구가 이동하는 대규모 이촌향도의 현상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급격한 도시화는 다양한 문제점을 낳았고, 특히 집안의 가장이 도회지로 떠난 경우, 시골에 남은 가족들은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로 인한 가정 해체는 태국 사회 전반에 새로운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삶의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서구식 생활습관이 보편화되고 대부 금융제도가 도입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금융기관에서 무담보 신용 대출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한 결과, 태국은 국가 경제 전체를 흔드는 금융 위기에 직면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점 해결을 위한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중도(中道)를 바탕으로 한, ‘자급경제 이론’을 주창하였다. 국왕이 주창하는 ‘중도’는 다음과 같다.
“모든 면에서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 자족 (…) 그리고 (…) 외부에서 도래하는 충격으로부터
태국 경제를 지킬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지식과 신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하며, 무한 경쟁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균형 있고 지속 가능한 경제 정책을 시행한다.”
실제로 다수의 태국 농민이 이러한 모델을 시행했으며 그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유네스코를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 또한 이 이론의 우수성을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