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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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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상 목사님의 하화중생(下化衆生) - 유수상 목사님 2016년 02월 408호
날이 추워지면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10년도 넘었는데 그의 얼굴과 노부모님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2003년 1월 유난히 추웠던 일요일 오전, 어린이 예배를 마치고 간식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장모님이 창백한 얼굴로 얼른 임대 중인 폐교 창고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폐교 창고에는 무와 감자를 상자에 담아 담요로 덮어 보관했는데, 그 담요를 덮고 한 청년이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손과 발은 동상으로 퉁퉁 부었고, 허기진 데다 잠에 취해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집으로 데려와 머리를 감게 하고, 면도도 시키고, 묵은 때도 수건으로 깨끗하게 씻긴 후
옷을 갈아 입혔더니 말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조금 어눌해 보이긴 했지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도 알았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집이 청송군 청송읍의 약수탕 두 번째 골목이라고 했습니다. 청송군의 관계
기관을 통해 그곳을 조회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다음 날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안동시 임하면 고천리가 그의 집임을 확인하고 왕복 400킬로가 웃도는 길을 기쁨으로 달려갔습니다.
거창에서 두 시간 반이나 걸려 임하면사무소에 도착해 그의 가족이 있는 집 약도를 받아들고
다시 40여 분 비포장 산길을 더듬어 아늑한 산골 마을에 닿았습니다. 굴뚝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집 앞에서 남루한 노인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마 면사무소의 연락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어울려 산다’, 즉 사람들을 만난다 사귄다 가까이한다, 사람들 속에 끼인다 섞인다는 정도의 공생(共生)입니다. 배려, 도움, 나눔이 있는 공생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일상으로 사람들과 함께하거나 돕거나 나누며 사는 것이 공생입니다. 공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신(神)을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아직도 그날의 촉촉함이 빛바랜 일기장 한편에 남아 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려 합니다.
청년이 “저기, 저기”라고 외치더니 차에서 내려 아버지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아버지는 곧장 아들을 알아보고는 품에 안았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엉덩이도 툭툭 때렸습니다.
그 뒤를 따라 올라간 제게 아버지가 허리 숙여 인사했습니다.
“아이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은 다 허물어져 가고 30촉 백열전구가 한 칸 방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칠성 씨요! 이제 집 나오면 안 되는 기라요. 집에서 아부지 일 도와드리고 잘 지내야 합니데이, 알았지예!!”
내 말에 청년은 “옛” 하고 넙죽 대답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누운 지 벌써 몇 해째라 합니다. 세 식구는 그 추운 겨울에 단칸방에서 군불을 지펴 살고 있었나 봅니다.
그들을 두고 돌아서는데 어찌 그리 눈물이 나던지요. 칠성 씨와 그가 처한 환경이 불쌍해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지만 ‘그분’을 만난 감동의 눈물이었습니다.
“누가 5리를 가자거든 10리는 동행하라. 누가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까지 주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성서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왕복 400킬로 먼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과거보다 물질적, 기술적으로 편리하고 간편함을 추구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편리성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계산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고 피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은 더 공허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누가 저에게 안동까지 등 떠밀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길 잃어버린 사람을 관계 기관에 신고하거나 인계하여 수습해버리는 세상의 시스템에 조용히 저항한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서로 기대어 사는 인간’에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 사이에 살기에 인간입니다. 혼자서는 인간이라 할 수 없고 존재 의미도 찾기 어렵습니다. 혼자서 잘 사는 것도 좋지만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 살리며 사는 사람살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울려 사는 관계는 우리 조상들의 삶 속에 잘 녹아 있습니다. 바로 마을이라는 공생의 공동체입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까요? 정겨운 사람살이를 누리는 것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누군가 주선해주지 않으면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점차 개개인의 삶을 독점해버린 문화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경쟁이라는 구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경쟁을 통해 오직 강한 것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 각 종교나 복지기관들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다양한
행사를 통한 종교적 행위는 늘어나지만, 또 분야별 전문가들을 대동하여 막강한 자원을 배경으로 세상을 향해 복 있다, 복 지으라고 소리치지만, 이 모두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허울만 근사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종교, 사회복지기관이 아닌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둘러봐야겠습니다.

복스러운 것, 복스러움의 경지를 복지라 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마을, 직장, 학교가 복스러운지요? 그 속에서 복스러움의 경지를 경험하고 있는지요? 그렇지 않음은 내가 이웃을 돌아보지 않음입니다. 더불어 살도록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소박하게 누리는 종교와 복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되고 이웃 간에 도타운 정이 흐르는 사람다움이 살아 있는 사회, 이것이 복지사회가 아닐는지요. 그런 사회에서는 저절로 마음이 흐뭇해지고 뭉클해지고 따뜻해지고 촉촉해집니다. 복지사업이나 종교적 행위를 내세우기보다 내 이웃과 ‘더불어 사는삶’, 공생(共生)을 화두로 삼아 이를 실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