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교 계통(1): 강증산의 신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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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6년 03월 169호
천도교나 대종교가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안팎에서 숱한 독립지사를 배출했음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대종교의 경우는 교단 자체가 독립 투쟁의 \'전위부대\'로 스스로를 불사른 격이다. 때마침 독도 문제가 우리 민족에게 있어 통한의 민족 감정을 격앙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날 우리 민족 전체를 그토록 의기 충천케 했던 민족종교의 교단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영락한 모습으로 빈사의 지경에 이르렀는지 아쉬운 마음 그지없다. 그러는 가운데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는데는 그다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없는 증산교계의 몇몇 종단의 눈부신 교세 성장이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증산교 계통의 대소 종단 가운데 대순진리회는 단일 종단으로서는 근래에 와서 보기 드물게 교세 신장에 크게 성공한 사례로 여겨진다. 최근에는 단순한 교세 확장에 그치지 않고 교육 사업에도 의욕을 과시해서 종합대학은 물론 여러 개의 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정식 종교 단체로서의 일반적인 \'공인\'을 얻어내는 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지 않나 싶다. 물론 대단한 교세의 신장과 함께 대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으로 \'증산사상연구회\'가 널리 확산이 되는 등, 증산교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매우 달라져가고는 있다. 그렇지만 종교 단체의 수장들이 만날 때 보면 불교와 기독교는 물론 원불교 등 이른바 신종교(고유종교)에서도 반드시 참석하는데 증산도계는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따라서 아직도 증산도에 대하여 \'종교로서의 시민권\'을 부여하는데 일반이 매우 인색하다고나 할까.
어쩌면 편견일지도 모를 이러한 편협한 인식은 일제 강점기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 때는 증산도를 가리켜서 \'훔치는 교\'라고 하여 모욕을 했다. 증산도를 믿는 사람들이 집회를 할 때에 \'훔치 훔치\'하면서 외워대는 태을주太乙呪에서 비롯한 멸시하는 호칭이다. 실상 3·1운동을 전후해서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는 증산교라는 호칭을 쓰지도 않았다. 아주 초창기에는 태을교, 또는 주문 발음 그대로 \'훔치교\'라고 불렀다. 증산교라는 명칭은 해방 뒤에 생겨난 것이다. 증산甑山이란 창시자인 강일순姜一淳의 아호이다. 강증산은 1871에 전라도 고부에서 태어났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신격화되어 여러 가지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들이 그의 탄생부터 신변의 주위를 감싸고 돌지만, 이점에서 본다면 강일순은 한국의 고유종교 창시자 가운데에서도 유독 두드러지게 카리스마화된 일면이 없지 않다. 반대로 그의 세속적인 삶은 전기적 사실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수명이 짧았다는 사실 빼놓고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생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강증산은 20대 중반에 동학도의 일원으로 동학 농민전쟁에 종군했다는 사실과 그 뒤에 전국을 두루 여행하는 주유천하(증산도에서는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한다)를 한 뒤에 향리로 돌아와 도통해서 후계자를 가르치다가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증산도에서는 화천化天이라 한다)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강증산이 후계자와 오늘날 젊은 지식층을 망라하는 다수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는 점에서 수운 최제우나 오늘날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홍암 나철을 능가하는 점이 있다.
강증산은 여느 민족 종교 교단에서 볼 수 없는 배일排日 독립운동의 심볼도 아니고 살아 생전에 광범위한 민중을 접촉해서 인도의 간디와 같은 범민중적인 위력을 지닌 인물도 못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강증산으로 하여금 명부에서까지 이토록 엄청난 카리스마의 위력을 갖게 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 원인을 정신적인 뜻에서의 자기 전통문화에 대한 향수와 또 하나는 정감록의 사상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일 백여 년 전에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특히 8.15해방과 6.25전쟁을 거쳐 최근 삼십여 년 동안 산업화를 서두르면서 물질적 조건 못지 않게 의식의 면에서도 맹목적으로 서구화 일변도에 치우쳐서 그만 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자기 회의에 빠졌지 않나 싶다. 거기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바람이 단순한 욕구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갈구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신현상이나 영혼과 같이 유현하면서도 가장 우리의 주체 의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종교면에서도 지나치게 서구 일변도로 가다 보니 정작 \'우리의 종교\' 진정 \'나의 종교\'가 무엇인지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가령 요즈음 유행병처럼 번져 가는 기氣사상에 대한 탐구를 예로 들 수가 있다. 실제로 요즈음 거리에서 증산교를 선전하는데 보면 기사상氣思想에 대단한 무게를 싣고 있다. 이것이 전통문화에 대한 향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증산도 역시 교조의 강일순이 태어난 시대이래 일 백여 년 동안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난의 연속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학이나 대종교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교단의 성립을 본 것이지만 증산교는 종교적 결집을 통하여 외세에 대항한다는 정치적 명제보다는 갑작스런 후천 개벽으로 이상세계가 열린다는 지극히 신비적인 명제가 교리의 중심의 축이 되고 있다. 증산교 교리의 골자를 말한다면 후천 개벽으로 이루어지는 선경仙境과 해원상생解寃相生이다. 물론 후천 개벽의 해원상생이 이루어지는데는 인간 집단의 조직적인 활동에 따른 노력보다는 천지의 운수에 따른 변화에 민첩하게 적응해야 하겠는데 구한말이래 우리 나라의 역사 사회적인 사정이 바로 그러한 시운이 도래하는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개념을 차용해서 설명한다면 운세運世의 기미 혹은 시운時運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절박한 시운의 기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강증산은 속류의 상수론象數論이나 역학 내지 음양오행설의 이론을 복잡하게 나열하고 있다.
상수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숫자 풀이라 할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동양의 수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동양의 상수학은 서양의 수학과는 달리 1부터 9까지의 자연수에 각각 특별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를 테면 홀수는 양이고 짝수는 음이라 하여 이것의 조합이 길흉화복을 점지한다는 주장이다. 가령 우리가 장례를 지낼 때 짝수의 날에 발인을 하지 않는 풍속도 모두 상수학과 관련이 있다. 또 1은 하늘이고, 2는 땅이며, 3은 사람이라고 한다든지 짝수는 여자이고 홀수는 남자라 한다든지 9자는 완성을 뜻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의미 부여가 모두 상수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학이란 동양의 고전인 주역을 실제 생활, 미래의 운수를 판단하는데 널리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는 주역이 우주와 인간 사회의 여러 가지 변화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매우 의미심장한 학문으로서 조선시대에는 후기로 내려올수록 통속화해서 재야의 지식인들이 이것을 가지고 개인이나 세상의 운명을 예점하는 지식으로 활용했었다. 덧붙여 음양오행을 설명하자면 그것은 자연세계나 인간사의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범주형식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육갑 따진다고 할 때의 시간을 의미하는 간지干支나 공간 방위 색깔 및 음에 대한 양과 같이 상대적인 존재 상황 따위가 모두 음양오행에 들어간다. 이런 따위를 문제삼는 영역이 기론氣論에 가깝다.
물론 강증산이 학문적인 입장에서 기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대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당대에 운세 사상과 맞물려 유행병처럼 번져간 기론을 구사해서 후천개벽설을 폈다.
한편으로는 그가 정감록에 나오는 진인을 자처했다고 본다. 정감록은 음양오행설이나 상수 역학 등의 기론을 망라해서 후천개벽의 예언을 집대성한 총괄서인데, 거기에 등장하는 정도령이 강증산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스스로 말세에 메시아로 나타난다고 하는 미륵불의 화신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즉 미륵불의 화신인 동시에 정감록에 나오는 진인으로서의 강증산의 신비성이 우리 나라 고유종교의 어느 창시자보다 더한 카리스마의 위력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