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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과 야생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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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봉준 1999년 04월 206호
아침이면 잠자는 내 귓전에 가축 소리가 들린다. 오리, 거위, 닭들이 내 방 앞까지 와서 소리지른다. 꽥꽥, 거억거억, 꼬끼댁 꼭꼭, 나는 계면쩍어 모로 눕는다. 먹이도 제때에 주지 않는 게으른 주인에게 외쳐대는 소리가 흡사 시위하는 것 같다.
키워서 잡아먹지도 못하는 가축을 나는 여러 마리 기른다. 고양이 세 마리, 개 한 미·리까지 치면 모두 열 마리인 셈이다. 예전에는 오리가 열다섯 마리나 되었고 고양이도 일곱 마리였다. 오리는 아랫동네 개들이 원정을 와서 하나 둘 잡아먹는 통에 두 마리밖에 안 남고, 고양이는 암수 한 쌍에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새끼 한 마리까지 세마리를 키운다. 이제 이것들 기력도 성가시다. 끼니 때만 되면 문 앞에서 소리지르고 문짝을 쿵쿵 두드리는 놈들도 있으니 내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데 귀찮기만 하다.
사실 내가 여러 마리의 가축을 산골화실에서 기르게 된 데는 저마다 사연이 있다. 고양이는 이 집에 들쥐가 많아서 키우게 됐다. 개는 도시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놈을 데려다 길렀다. 주인이 단독 주태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처치하기 곤란해 하던 개였다. 닭 암수 한 쌍은 여주 후배네에서 주었다. 거위와 오리는 원주장에 가서 샀다. 열다섯 미리 새끼를 사다가 길렸다. 그저 보고 기르는 재미로 시작했다. 논과 들에 풀어놓고 해질녘에 휘파람을 불면 멀리서도 알아 듣고 집으로 줄지어 오는 모습이 귀엽고 대견하다.
경제 가치만 따졌다면 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동안 사료 값과 품값을 치면 댓가는 고작 종종 오리알과 계란을 주운 것이 고작이다. 나는 가축을 풀어 놓고 보는 재미가 더 좋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들판은 유난히 황량해진다. 그때 갈빛 들판에서 홀로 하얀 거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흡사 백조처럼 아름답고 고상해 보인다. 때론 우습다. 이마는 앞짱구에다 목은 가래떡처럼 긴데 그 목을 앞으로 쭉 빼고 울어대는 모습이 이 적막 강산을 생동하는 동양화로 바꾸어 놓곤 한다.
오리는 물을 좋아한다. 물을 보면 뛰어드는 습성이 있다. 추운 겨울에도 그저 물이면 다 좋단다. 부리로 물 속을 훑고 지나가는 습성이나, 부리로 깃털을 다듬는 짓이나 멀리서도 집을 찾아오는 짓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모든 오리가 한결 같다.
우리집 닭은 유정란을 낳는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수탉이 옆에서 망을 봐 준다. 풀어서 기르니 알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셔 낳는 때가 많다. 나는 그 알을 찾으러 다닌다.
우리집 고양이는 행복한 놈이다. 집고양이라지만 들고양이처럼 제 마음대로 들판을 누빈다. 도시의 도둑고양이처럼 쓰레기통올 뒤지는 일도 없고, 들판에서 땅구멍을 지키고 앉아 있다가 들쥐를 잡곤 한다. 고양이는 개처럼 주인을 야단스럽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따금 주인이 좋으면 발 밑에서 맴돌고 몸을 비비는 버릇이 있다. 밥을 달라고 할 때는 발톱을 세워 나무를 반복해서 긁거나 야옹소리를 낸다.
나는 가축들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배운다. 추운 겨울을 이기는 인내도 훌륭하고. 흙밭에 뒹굴어도 제 몸을 늘 가꾸는 깨끗한 자태도 멋있다. 동물세계는 제 몸이 흐트러지면 사람처럼 돌봐주는 이 없으니 그것이 곧 죽음을 뜻하는 듯하다.
동물은 종마다 개성이 다르다. 이 종의 기원은 아주 오랜 옛날지구가 태어나기 전에, 빅뱅 이전의 우주먼지 속에서부터 흘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종의 개성은 지·연 속에서 학습되면서 차츰 진화하여 저마다 색다른 개성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하나의 동식물의 습성이란 우주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생태계의 개성 속에 감춰진 역사적 우주의 다른 말일 것이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가축은 아무리 방목을 하며 지면으로 돌려보내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이미 먹이를 주는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학습 받은 탓에 낮에 들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도 제 집으로 달려왔다. 거위나 오리가 들판에서 재두루미를 만나 잘 어울려 놀다가도 돌아가는 길은 정반대였다. 하나는 자연으로 하나는 인간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가축을 방목하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돌아가라는 무언의 손짓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번 길들어 주인의 밥을 먹기 시작한 가축은 그 밥줄을 끊지 못한다. 가축과 야생 사이는 너무도 멀다. 오래 전부터 인간은 많은 동물을 먹이와 교배로써 가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이 길들이지 못하는 동물도 있다. 특히 아프리카 야생 동물은 길들이지 못한 종이 많다. 대표적인 동물이 얼룩말이다. 영국인들이 얼룩말을 길들이려고 무진 애를 쓴 모양인데 실패하였단다.
어쩌면 인간도 가축처럼 길들여질지도 모른다. 내가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지 모르지만 인간은 너무 길들여져 왔다. 제도, 풍습, 교육, 질서, 도시환경 등 우리는 반생태적인 사회에 비판 없이 길들여졌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늘 옳고 좋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가 만일 거대 문명과 거대 권력에 길들여지지 않고 사랑과 신의가 보장되는 작은 공동체에서 자율적인 학습을 통해 인격이 성장하여 왔다면 우리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이 오매불망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도 단순히 옛날 어린 시절에 살던 시골이 생각나서가 아니다.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기 위함이다. 그것은 인간의 처음 성품, 본성일 것이다. 소박하고 협동적이며 자연 친화적이며, 자유롭고 영적인 품성을 누구나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청소년을 보면 불쌍하다. 사회는 경쟁력 있는 인간을 바라는데, 무엇을 위한 경쟁력인가? 이제 얼마남지 않은 지구의 지원을 마저 다 써서 생산력의 속도를 높이자는 경쟁력이다. 경쟁력 있는 인간이란 생산력주의에 길들이려는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은 영원히 본성을 찾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문명에 학습된 결과 완강한 ‘문명의 사슬’을 끊을 힘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환경 위기로 전지
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도시 문명은 날로 더 규모가 커지고 개발과 건설을 멈추지 않으니 말이다. 토인비의 금언처럼 “인류문명의 앞에는 숲이 있었고, 문명의 뒤에는 사막이 있었다.”

나도 우리집 가축처럼 길들여진 지 오래된 문명인이다. 제아무리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얼마 있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또 다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나른한 문명의 혜택 속에서 오리털 이불까지 덮고 예술을 생각하고 인생을 말하며 돈까지 벌고 있다. 언제부터 고상해졌는지 모르지만, 내 몸이 익힌 잘못된 학습이 나를 고사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벗과 함께 문명의 사슬을 잠시라도 끊어 보기로 했다. 더 늙기 전에 단 석 달이라도 좋으니 가출을 해서 저 높고 깊은 산맥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백두대간을 아랫녘에서 윗녘으로 따라 오르며 우리 산맥의 대간을 타는 여행을 할 것이다. 산악인처럼 산정상을 향해 종주하기보다 봄 산을 즐기면서 산수화도 그리고 술도 마시고 산촌에 들러 된장국도 얻어먹는 인심을 만나며 풍류객이 돼 보려는 것이다. 물론 산에서 텐트 점을 잘 것이다. 말은 쉽게 늘어놓는 것 같아도 마음은 비장하다. 가축 같은 문명 생활을 탈출해서 야생의 현장을 가려는 것이니, 내 깐에는 온몸을 던지는 몸부림이다. 아이엠에프 시절에 돈벌이도 버린, 간 큰 남자가 되기로 했다. 우리집 가축처럼 풀어 줘도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가축과 야생-본성-사이에서 방황 끝에 얻을 수 있는 깨달음 하나 있을까? 번뇌 즉 보리라 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