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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목숨을 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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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혜암 1996년 03월 169호
처음에 육조단경을 강의할 때, 외람되게 육조단경을 버릴 때 견성하는 것이요, 육조 스님의 종노릇은 할 수 있지만 언제 견성성불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비법이라는 것이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몰라 무슨 공부를 하겠습니까.
개개인에게 비밀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강의를 받아야 하느냐.
참말로 구경각의 노정기를 다 알았으니 필요 없는 것이고, 노정기를 모르니까 알아야 하고 또 병통걸릴 수 있으니 병을 고쳐 주려고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조사의 말씀을 배워야 할뿐입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공부하는데 이런 것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을 때 이리 흔들리고, 저런 말들을 때 저리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를 딱 세워놓고 공부해야 합니다. 힘없는 숲이 동쪽에서 바람이 불면 동쪽으로 넘어지고 서쪽에서 바람이 불면 서쪽으로 넘어지듯 하면 언제 성불합니까. \'이 뭣고\' 하는 당처가 부처님 자리이고 성불하는 자리입니다. 흔들리면 안 됩니다. 경전 백 권을 외워도 성불 못합니다.
경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문자에 의지해서 법을 설해도 삼세제불의 원수요, 경을 한 글자라도 여의고 정법을 설한다 하더라도 마구니설이라.

그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주먹을 쥐었다 폈다해야 산 주먹이 되는 것입니다. 쥐고만 있어도 병신, 펴고만 있어도 병신 아닙니까. 모든 법이 방편이므로 그때그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과 같이 버리기도 하고 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중한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거기에 가서는 속지 말아야합니다.
수행자는 운수객입니다. 동서남북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뒤로 좌로 마음대로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우리 운수납자는 걸림이 없습니다. 하물며 화두도 망상입니다. 할 수 없어서 화두 공부하는 것이지, 화두가 무슨 도입니까. 비밀법입니다. 도이면서도 도가 아닙니다. 도는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수행자가 되어 머리 깎고 목욕하고 옷 벗고 입고, 해제하고 결제만 하면 누가 공부시켜 준다고 했습니까. 신실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는 처소가 없고 시간이 없습니다. 할 줄 몰라도 딱 결정한 마음을 세워야 합니다. 할 줄도 모르면서 밤낮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려서야 되겠습니까. 부처도 내 공부를 해 주지 않습니다.
죽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수좌입니다. 생명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출가해서 나올 때 벌써 조사입니다. 죽기로 결사해 모든 난행, 고행을 이겨내는 군인과 같습니다. 되는대로, 닥치는 대로해서 성취한 사람 있습니까. 수월하게 한 사람도 있고, 뼈가 저리게 한 사람도 있고 차별이 있기는 하나 이 공부는 내 목숨과 바꾸는 공부입니다. 죽기로 결정해 강직한 마음으로 본래 마음을 찾는 것이 운수객입니다. 수좌의 생명은 도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 집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회에서 배운 더러운 시비를 여기서도 합니다. 그 것은 수좌가 아니고 선객이 아닙니다. 나는 시비를 꿈에라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어느 절에서도 죽을 주든지 썩은 콩을 주든지 그런 시비는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일휴 선사는 빵집 앞을 시자와 함께 지나다 점잖지 못하게 말합니다.
\"야, 저 빵 참 맛있겠다. 우리도 먹고 가자.\"
시자가 그 소리를 듣고 말합니다.
\"큰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면 됩니까. 빨리 갑시다.\"
시자가 빵집 앞을 지나자 사람들이 없는데서 다시 한번 말합니다.
\"큰스님께서 빵 드시고 싶은 것 하나 참지 못하고 맛있겠다. 냄새 좋다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자 일휴 선사가 말합니다.
\"이놈아, 빵을 무겁게 십 리나 짊어지고 다니느냐.\"
도인들은 그때그때 집착하는 것이 없습니다. 중생들은 대나무를 보면 대나무에 집착하고 소나무를 보면 소나무에 집착하고 단풍나무를 보면 단풍나무에 집착을 합니다. 집착이 중생의 병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 경계에 집착을 합니다. 경계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구경각에 대한 병통이 일어납니다.
어느 오뉴월 장마가 저 산골에 큰물이 나 냇가를 건너지 못하고 울고 있는 처녀에게 일휴 선사가 말합니다.
\"어째 울고 있느냐?\"
\"오늘 꼭 냇가를 건너가 볼일이 있는데 건너지 못하고 있어 울고 있습니다.\"
\"그래? 잘 만났다. 내 등에 업혀라.\"
일휴 선사가 처녀를 업고 냇가를 건너니 한참 뒤에 오던 비구들이 말합니다.
\"큰스님이 되어 어떻게 처녀의 궁둥이를 잡고 내를 건넙니까.\"
\"이놈들아, 너희들은 아직도 무겁게 처녀를 업고 다니느냐.\"
도인들은 업어야 업은 것도 없습니다. 일휴 선사도 신통력이 어느 정도 자재했습니다. 점안식에 가서도 점안식을 하라고 하면 부처님의 머리통에 오줌을 갈겨 버립니다. 신도를이 흉을 보면 모두 아프게 만들어 버립니다. 신도들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 자기가 입던 냄새 나는 속옷을 벗어 말합니다.\"
\"이 속옷에 목을 감으면 다 낫는다.\"
속옷에 목을 한번씩 감으면 신도들이 다 나아버립니다. 어찌 속인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행동은 불법을 바로 믿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 장난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아미타불도 자성아미타불이 있으니 어떻게 말하는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고, 뜻만 알면 허물이 없지만 선종법문을 하면서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는지 어떤 신도들은 나에게 공격을 합니다.
\"큰스님들도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아미타불을 부르며 나갑니다. 그러니 비방할 것 뭐 있소.\"
잠 깨는 데는 아미타불을 한 번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인과로 보면, 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는 데 팔백 겁 생사죄를 면한다고 부처님이 그러셨습니다. 나는 내가 알아서 염불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법이든지 사람에게 있습니다. 부처님보다 내가 제일입니다. 부처님이라고 하면 부처님이 아닙니다. 똥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일 연도 아니고 삼 년도 아니고 어찌 그리 오래도록 속고 있단 말입니까.
황벽스님 가풍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해탈하신 스님이 무엇 하려고 부처님에게 절을 합니까.\"
\"내가 이와 같고 이와 같을 뿐이다. 부처님에게 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해도 하는 것이 없다. 중생을 구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당나라 어느 선사는 태백산에 들어가 채근목피로 연명하며 공부를 오 년 동안 하였습니다. 눕지도 않고 좀 쉴 때에도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주장자를 가지고 흙덩이를 깼는데 흙덩이가 부서지면서 깨쳤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비법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공부하면 시절 인연이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서울 가는데 서울이 안 나올 턱이 있습니까.
글을 읽다 깨칠는지 바람 불 때 깨칠는지 모릅니다. 신짝이 벗겨지는 것에 놀라 깨친 사람도 있습니다.
화두 하나만 놓치지 않고 공부하면 됩니다. 비법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재미없다고, 해 보니 별 수 없더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꼭 믿고 해나가면 천상천하 보물이 내게 있는데 남부러울 것이 뭐 있습니까. 속세에 사는 어느 처사가 화두를 받아 행주좌와어묵동정으로 애를 쓰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날 화장실에 가 간절히 \'이 뭣고\' 하는데, 개구리가 \'개골\'하는 소리에 탁 깨쳐 버렸습니다. 깨달아 오도송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봄 하늘 달 밝은 밤에 개구리 우는 소리가 온누리에 꿰뚫으니 한 집안이 되더라.

나는 예전에 공부할 때 산중에 노스님이 산다고 하면 꼭 찾아다니며 공부하는 법을 물었습니다. 글을 배우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기역자밖에 모른 스님들에게도 배울 것은 있었습니다. 경험담을 들으면 배울 것이 반드시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부도 못한 죄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인과에 대한 신심이 없어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예전에 공부할 때 보면 비구니 스님들이 인과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습니다.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는 청정 비구니들이 참으로 많아 감회를 많이 받았습니다. 인과를 그렇게 믿을 수가 없고 절 물건을 아끼고 대중공양을 그렇게 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에 도를 배우지 않으면 깜깜한 밤에 나선 격이요, 사람이 성인의 이치를 통하지 못하면 금수들에게 옷을 입히는 것과 같더라.

사람의 옷을 입었다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들에게 옷을 하나 입혀 놓은 것입니다. 수행자들도 공부를 안 하면 짐승 몸에 법복을 입혀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인생에 정진하지 않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고 꽃나무를 끊어다가 대낮에 놓아두면 얼마나 성성할 것 같은가.
사람의 목숨이 이와 같아서 죽음은 잠시간에 있느니라.

우리의 신세도 이와 같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멀리 보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