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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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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의 얼과 멋 - 편집실 1996년 03월 169호
다달이 보름 앞날과 그믐 앞날, 절에서는 한 달에 두 번씩 대중이 함께 삭발 목욕을 한다. 새벽 예불을 마친 뒤 공양간에서는 오곡밥을 지으려고 어제 저녁에 운력으로 준비한 밤, 땅콩, 잣, 팥과 함께 잘 씻어 불려 놓은 찹쌉을 꺼내어 다시 살핀다.
삭발 목욕하는 날의 총림(강원, 율원, 선원, 염불원이 갖추어진 큰 규모의 절)은 행자실의 일손부터 바쁘게 돌아간다. 반찬을 만드는 채공간에서는 사시巳時에 대중방에 들어갈 김을 굽기에 여념이 없고 두부찜을 만들어야 할 찌개간 소임을 맡은 행자들은 두부를 만드느라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강당과 선원의 목욕탕 소임자는 물을 따끈하게 데워 놓아야 하고 목욕 도구를 정리해서 잘 챙겨 놓은 뒤 시간표를 만들어서 대중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인다. 아침공양이 끝난 뒤 시간표에 따라 총림의 대중은 삭발을 하고 빨래도 하면서 속옷과 멀겋게 물이 바랜 승복을 다시 잿빛으로 물들인다.
스님들의 취향에 따라 숯이나 쑥으로 물들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먹으로 물들인다. 이렇게 스님들이 잿빛 옷을 입은 것은 잿빛이 질리지도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포용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먹물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초와 잘 섞어서 몇 시간 동안 빨래와 함께 푹 삶은 뒤 헹굼과 건조를 되풀이하면 보기 좋은 잿빛으로 물이 든다.
좌복에 가부좌하고 앉아 화두와 간경에 힘을 쏟고 나니 매섭던 추위는 저만큼 물러나 앉고 훈훈한 봄바람이 코끝에 닿는다. 농부들의 손길도 이제 밭이랑을 일굴 때가 되었다. 나도 마음의 밭을 일구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