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 서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채경당 바람결 - 영덕
1996년 02월 168호
머리 속이 백지 상태이다. 가닥을 잠을 수 없는 혼란이 엄습하고 해야 할 일의 두서는 가슴을 죄어오는데 대책이 서지 않는 막막함. 여느 때 같으면 오히려 그러한 상태가 비상 처방이 되어 밤을 밝혀서라도 매듭을 풀며 일의성취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정작 긴장해야 할 부분에서도 정리가 되지 않았고 하루하루 보내면서 마른침을 삼켰지만 한 없는 무기력 속에서 구체적인 의단이 서지 않았다. 지난해를 끝으로 채경당 바람결을 매듭짓고 싶었지만 대중의 중의를 무시하지 말아 달라는 일갈에 어차피 버리지 못하는 유산이라면 읽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을 떄 써리라 생각했다.
이왕에 쓸 것이면 원고 마감일까지는 착실히 하자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것이 마감일까지는 착실히 하자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것이 마감일은 고사하고 다시 열흘이 더 지나도 올올하기만하니……. 어버이와 딸린 식구들 때 거리가 달린 일이라면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을까. 여하튼 중 잘되었다고 중얼거리며 막막한 설원을 헤매였다. 숨길을 막아오는 답답함이 싫어 기한이 약속된 글을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겨울 들어서 감기몸살을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한 과보가 이렇게 오는가 싶었다.
사라져가는 토종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고자 한 소재와 섬이 되고부터 섬의 고독을 앓기 시작하면서 인간과의 신뢰와 착실한 교류를 꿈꾸며 쓰고 싶은 글이 있었다. 그래서 제목부터 뽑아본 것이 \'토종 그리워!\'와 \'지음知音을 위하여\'이다. 배내옷 지어 놓고 기다리는 아들일수록 늦다 하더만 꼭 그 짝이 되고 말았다. 원고지 열여섯 장이 얼마나 광할한지 그 아득한 평원을 나는 끝내 건너지 못하고 만 것이다. 제목부터 뽑아 놓은 그 글들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다. 이번 일을 통해 느끼는 당혹과 절망감, 슷로 자신의 일을 책임지지 못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또 하나의 벽을 마주하고 말았다.
겨울 가뭄이 길었다. 죽림헌 연못에 물이 말라 큰고기들은 모두 얼어죽고 한 바가지쯤 남은 물에 모여 바글대는 금붕어 떼를 화엄회 스님들이 퍼다 주었다. 생각지 않은 식구들이 오십여 명이나 늘었다. 빨갛거나, 은색의 반짝이는 비늘, 깜박거리지도 않는 겁먹은 듯한 동그란 눈, 좁은 어항 속에서 잠시도 머물지 않고 부드럽게 몸을 뒤척이는 조용한 움직임.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담장 안을 휘돌아 나가는 바람소리와 주먹 안에서 부서지는 작은 숨소리마저 들린다.
옛날 인곡스님은 헌식할 때마다 사다라니를 외우며 밥 한 그릇이 일곱 그릇이 되고 일곱 그릇이 마흔 아혼 그릇이 되어 진법계 허공계 주린 영가 모두모두 배불리 먹어라 하며 헌식한 음식을 먹으러 다가오는 까마귀, 까치. 다람쥐, 들쥐, 들고양이, 청살모에게 골고루 음식을 나누어 주며 \'너도 먹고 내 상좌 되라\', \'너도 먹고 내 상좌되라\' 하였는데 뒷날 정말 칠십 명이 넘는 상좌를 두었다고 한다. 또 어떤 스님은 개당을 했는데 학인이 모이지 않아 늘 물가에 나가 고기밥을 주었는데 십 년이 지나니 고만고만한 청의 동자들이 스님법을 배우겠다고 구름같이 모여 들더란다. 우연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연기법을 알면 필연 아닌 것이 없다. 마음에 집히는 바가 있어 내 방에 들어온 아이들을 위하여 \'너도 먹고 내 상좌되라\'하며 이틀에 한 번씩 밥을 주고 물을 갈아 주며 교육프로그램을 짜보았다. 첫째, 다음 생의 생이지지를 위하여 초발심자경문을 조기 교육시킨다. 둘째, 관세음보살 사십이수주 가운데 관세음보살 보경수진언, 옴미보라 나락사 바아라 만다라 훔바탁(커다란 지혜를 얻으려거든 이 진언을 외우시오). 37관세음보살 보경수, 옴 아하라살바미냐 다라 바니데사비하(많이 듣고 멀리 배우려거든 이 진언을 외우시오). 문수보살 팔자진언, 옴 아비라 훔 카차랗(가장수승한 큰 위덕의 진언으로 불가사의한 신통변화 지으며 삼업오역 사중 십악죄 모두 소멸. 문수보살 친견하며 지혜 얻어 일체중생 제도하는 진언) 각각 108편씩 쳐줄 것. 셋째, 엉량징관의 화엄경소서 3편씩. 넷째, 하루 금강경 3편. 다섯째, 신묘장구대다라니 7편씩 늘 하던 나의 기도에 덧붙여 금붕어와 더불어 공부할 수 있도록 한 시간쯤 시간표를 짰다. 고기들의 반응을 보면서 청각이 무척 민감하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위의 진사왕 조식이 산 속에 있는 맑은 소에서 고기의 율동을 보고 범천의 음성을 본뜬 것이 어산魚山이다. 어산은 불교의 모든 의식을 앞에서 이끈다하여 인도引道소리라고도 한다. 짓기 어려운 짓소리는 범음梵音, 홑소리 독창을 범패梵唄라고 한다. 최치원이 오랜 당나라 생활을 정리하고 서라벌에 돌아와서 때때로 소리를 내었는데 이로써 신라에 향풍이 전해졌다.
세속의 소리는 흥을 돋구는 소리지만 법음은 깨끗한 소리 맑고 큰 소리로 탐진치를 씻어 내며 전후좌우가 끊어진 세계로서 형성된 소리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꽃이 지며 벌이 꿀을 찾고 산새가 지저귀며 때로는 폭우가 지고 천둥이 치며 동이 트고 낙엽이 지고 인고의 겨울이 어울어져 있는 묘음의 세계.
옛날에는 중질 좀 가르쳤느냐 하면 곧 어산 좀 할 줄 아느냐 하는 의미로 스님하면 어산이요, 어산을 익히는 것은 수행이력에서 필수였다. 경, 율, 론 삼장과 선종에서 요긴한 핵심만 추려낸 것이 염불이다. 의식은 부처님 당시 영산회상에서 묘음보살이 부처님을 찬탄하며 지은 소리가 구전되어 오다 당나라 때 범패가 유행하게 되었다. 진감 국사가 입당한지 열엿새 만에 범패를 배워 돌아와서 쌍계사에서 범패를 지도했다는 기록이 사산비명 중의 하나인 진감국사비명에 나온다. 때마침 염불 특강을 시설하여 원명스님이 사바오일 동안 좋은 강의를 해주었다. 송문관의를 강조하며 옛 어른의 행장을 통해 중 사상과 중 노릇하는 법을 고구정녕히 일러 주었다. 지월스님의 눈물을 얘기할 때는 모두 가슴 찡하였고, \"무식한 도깨비 항마진언도 안 통혀\" 할 때는 이백 삼십 명 학인의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세밀하여 한 자도 놓치는 법이 없고 질문이 있어 첫마디를 내면 훤히 꿰어 밝혀 주니 고맙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치문반 방부 들일 때 나는 오범음五梵音을 놓고 생활의 지침을 세웠었다. 행을 함에 있어서는 정직하니 바르고 곧게 하며 공부에 임해서는 청철淸徹하니 맑고 철저하게 하며 자연과의 교감으로 내면의 소리를 들을 떄는 심만深滿하여 깊고 그득차게 하며, 도반이나 대중과 함께 하여서는 화아和雅하니 화목하고 아름답게 하며 원문遠聞하니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영롱한 기도가 익어 가기를 발원했다. 돌아보며 다시 냉정하게 자신을 조율할 때가 되었다. 정직하다는 상에 묶여 많은 사람들을 첨곡하다고 비웃었는가. 시간을 잡드려 사무치게 공부하여야 한다며 제 잘난 멋에 빠져 옆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을 때 얼마나 더불어 살기 힘이 들었을까. 심만한 자연과의 교감을 꿈꾸며 기회만 있으며 산으로 사라져 버릴 때 말없이 내 몫의 일을 감당해 준 동주 도반들의 고마움에 가슴이 미어진다. 대중과 화아하고져 하면서도 내 속에는 친소증애가 끊이지 ㅇ낳았고 뜻을 달리할 때 얼마나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쳐나갔던가 원문하여 불전에 닿는 기도이기르 바라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타성에 절어 시주단월의 은혜를 당연히 여기고 내 배 부르고 등 따스하니 담밖에 배고픈 심정과 춥고 외로운 이를 잊은 지 오래이며 자기 합리화는 짜르고 사상四相은 가득 차 지실인의라 겸양지덕은 더욱 멀기만 하다. 지금 이 순간 무엇으로 참회를 다할 수 있을까. 겹겹이 입은 옷을 벗고 진참회를 통해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이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