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대종교(2):교단의 발전과 독립운동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6년 02월 168호
단군신화의 모티브는 모두 알다시피 환인의 아들 환웅이 웅녀와 결혼해서 단군을 낳았고, 단군이 태백산 아래에 신시를 세우고 선정을 베풀었다는 내용이다. 얼핏 세계 모든 민족으 건국 신화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얼마쯤은 황당무계한 줄거리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많은 학자나 전문가들이 단군신화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아득한 옛날 고조선의 실상을 탐구하고 여명기의 우리나라 참모습을 알아보려고 하지만 역시 가설(?)에 그치고 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삼국유사」에 있는 단군이 우리나라를 세우고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새이화在世理化로 다스렸다는 문구를 존중해서 그것을 지금 교육 이념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 대종교의 기본 경전이라고 할 「삼일신고三一神誥」는 그러한 과학적(?)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단군신화를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단군신화에는 환인, 환웅, 단군 삼위三位 말고도 천부인天符印 세 개 등 3으로 상징이 되는 숫자의 개념이 나온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것이 동양 전래의 우주론인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라고 하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관념과 들어맞는 동시에 「삼일신고」라는 대종교 경전의 제목도 거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나라가 태동한 단군 조선은 천지인의 삼재가 어우러져 우주론적인 통일을 이룬 이상국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삼일신고」는 단순하게 종교 단체의 경전이 아니라 고조선의 신성한 헌법이라 볼 수도 있다. 「삼일신고」의 각 조목은 이처럼 신성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시책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신성한 헌법이 어째서 이제서야 온 세상에 공개되는가. 이 점을 대종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래 고조선시대에는 이 점을 비롯해서 「신사기神事記」등 주요 경전이 우리의 고유한 문자로 쓰여져 내려오다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인멸이 되다시피 했는데, 다행히 백두산 밑의 보본단이라고 하는 석실에 한문으로 된 사본이 한 권 남아 있었다. 백전伯佺이라는 도사가 이것을 찾아내어 서울의 서대문 근처에서 제1세 교조인 나철에게 넘겨주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고율을 초월하는 종교적 신비성의 문제가 있으므로 여기서 진부를 가리려고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신사가 적힌 흥미로운 사실을 든다면 송화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던 나반那般이라는 남자와 阿蔓이라는 여자가 결혼하면서 황, 백, 흑, 홍, 남의 다섯 종족으로 번져나갔다고 하는 인류 기원설이다. 이것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송화강 유역 일대가 원래 우리 민족과 같은 계통인 퉁구스족이 할거 하던 지역이며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고도라는 사실과 상징적인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구한말에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 곳과 가까운 곳에 있는 지금의 중국 흑룡강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함께 중국땅이 되었다고 하는 주장과도 의미 심장한 연관을 지니는 듯하다.
일제 초기에 대종교의 활동 근거지가 간도 지역인 것도 위에서 말한 내용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는 교단 활동이 불가능했던 사실은 고려해 한다. 대종교가 개교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만여 명의 교인이 운집했던 만큼 당시 민족종교에 대한 민중의 열화 같은 기대감을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합방되던 그 해에 정훈모 등 친링 세력의 배반으로 교단의 명칭을 본디의 단군교에서 지금의 대종교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16년에 나철이 구월산에서 순국 자결하자 교단의 총본사를 백두산 북쪽 아래의 만주땅 청파호로 이전한다.
이 때부터 제2세 교주가 된 김교헌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의 노선으로 나아간다. 1918년에는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고 북로군정서를 발족시키기에이르렀다. 이리하여 1920년에 우리의 항일독립 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군공을 세운다. 이 당시 사령관으로 전투를 총지휘한 김좌진 장군과 또 휘화에서 오백여 명의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일만여 명의 일본군 대부대를 섬멸한 이범석 장군은 처음에는 대종교가 아니었다. 이들은 원래 이회영과 이시영 형제가 설립한 신흥무관 학교를 중심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교헌 교주가 북로군정서를 발족시키면서 초빙해 온 터였다.
북로군정서는 부대원 규모는 일천 명 안팎이었으나 대종교 간부인 서일의 탁월한 지도로 다른 어느 독립군 부대보다 앞서 짧은 기간에 정예 부대의 위용을 갖추었다. 그 때는 마침 러시아 혁명이 마무리되어가는 무렵이었다. 그래서 반혁명 간섭군으로 시베리아까지 진출한 체코군이 남기고 간 무기를 블라디보스톡에서 사들여서 산 속으로 수백 리 길을 져날서 북로군정서 장병들을 무장시켰다.
그럼에도 청산리 전투는 주도면밀한 작전 계획 아래 일본군을 기습 공격해서 대단한 전과를 올린 싸움이 아니었다. 일제가 3·1운동 직후 만주의 독립군 근거지를 소탕하려고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한다는 소식에 접한 재만在滿 무장 독립 단체 모두가 산 속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북로 군정서도 근거지를 장백산 속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화룡현 청산리에 다다랐을 때 일본군대부대가 골짜기에서 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불시에 습격해서 얻은 뜻밖의 전과였다.
그 뒤로 북로군정서의 운영 주체인 대종교에 대한 일제의 악랄한 보복이 뒤따랐음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1921년에 일제는 대종교 근거지에 대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비무장 민간인까지도 무참히 살육하는 만핵을 서슴지 않았다. 이 때 서일도 순국하고 말았다. 아울러 2대 종사 김교헌도 함께 분사하게 되자 교통은 제3세대 교조 윤세복이 물려 받는다. 대종교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는 길림성장 장작상張作相을 사주해서 대종교도들을 여러 모로 괴롭혔고, 이리하여 교단은 총본사를 잠시 밀산 당백진으로 옮겼다가 1934년에는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에 자리하게 된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기울면서 일제는 나라 안팎의 조선독립 단체들을 멸절시키려고 대종교 교단 간부에 대한 검속령을 내렸다. 윤세복은 무기형을 받고, 그 밖에 교단 간부 십여 명이 숨지는 일대의 교변을 맞게 된다. 이것을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이라 한다.
이와 같이 창교한 지 4반 세기에 못미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숱한 교단 간부가 처형당하는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실로 세계 종교 사상 유례 없는 대종교의 고난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이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디아스포라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유대교의 역사가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다.
제3세 교주 윤세복은 이처럼 교난을 겪는 시련 속에서도 대종교가 면목이 여실한 교단으로 우뚝 서도록 심혈을 기울여 체제를 정비하고 제도를 완성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종교는 해방 직후 국내에 금의환양해서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국면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위축되는 감이 없지 않다.
대종교와 함께 역시 단군을 숭봉하는 종교 단체로서는 단단학회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 단체는 지난 호에 언급한 이기李沂가 결성한 단체이다. 이기는 원래 나철과 뜻을 같이해서 단군교를 창설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교리의 해석상 상충하는 바가 있어 갈라서게 된다. 그 뒤를 이어 계연수가 교통을 이었는데 그는 오늘날 대종교에서 외면하는 천부경天符經의 저자라고도 한다. 이기의 뒤를 이은 계연수와 단단학회의 간부들도 모두 만주에서 서로군정서를 운영하면서 대종교와 마찬가지로 무장항일투쟁을 벌이다가 일제에 의해 비명에 갔다. 오늘날 강화도 마니산의 첨성대가 단군의 성지로 인정받게 된 것은 단단학회에서 비롯한다. 단단학회는 60년대 말까지 \'커발한\'이라는 기관지를 내면서 민족주체사상을 널리 계몽하였으나 이 역시 요즈음에 와서는 명맥을 잇지 못하는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