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스님, 출가는 현실도피가 아닙니까?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학사대 - 일진 1996년 01월 167호
만행을 마치고 산사에 홀로 앉았노라니 이번 만행길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이 꼬리를 물고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만행 뒤 생길 수 있는 이러한 산란심 때문에 옛 스님들은 함부로 산문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 것을 그렇게 당부하였나 보다. 어쨌든 세속 경계에 이다지도 끄달리는 것을 보면 이번 만행은 실패작이었음이 분명하다.
철마다 해제가 다가오면 산문 밖을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만행이 가져다 주는 좋은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보다는 결제 기간 동안 소중하게 다스려온 마음 공부의 순일함이 만행으로 인해 중단됨이 무척이나 아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나의 고민은 언제나 만행을 가는 쪽으로 결정난다. 사실 만행은 그 자체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학인 입장으로 보면 동국대나 승가대 등에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고, 다른 사찰과 선지식을 참배함으로써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재가불자들의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대하면서 출가 의지를 새롭게 다질 수 있다. 그러하여도 만행에 앞서 다질 수 있다. 그러하여도 만행에 앞서 늘 두려움을 느낌은 그만큼 내 수행의 정도가 형편 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라 아쉽다.
이번 해체에는 다른 때에 비해서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특히 젊은 불자들과의 만남과 진지한 대화는 그들만이 갖는 사회를 향한 독특하고 신선한 시각에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또 출가 전부터 스스로에게 물어오던 몇 가지 다짐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반조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한마디로 나는 이미 완전한 구닥다리가 되어 있었다.
\"스님, 출가는 현실 도피가 아닙니까?\"
만남에 참석한 청년이 느닷없이 그러나 당당하게 던진 질문이다.
물론 이 질문이 나오기 전에 나는 출가의 좋은 점에 대해서 그들에게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머리 깎고 스님이 되면 말하지 않고 지내고, 또 남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또 그것 때문에 시비 거는 사람 없고, 예쁜 여자 보아도 고민할 이유가 없어서 좋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지 않아 건강에 좋고, 맑은 물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음은 그것만으로도 산에 사는 보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자랑하고 있던 터였다.
그 청년의 질문은 일시에 좌중을 긴장시켰다. 나는 속으로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궁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질문이야말로 몇 번이나 출가를 망설이게 한 바로 내 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질문 속으로 스스로를 더욱 구속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인사로 돌아오는 차속에서도 그 청년의 눈빛은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출가의 정당함과 명분을 인정하면서도 출가가 현실도피라는 논리 때문에 주어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망설임의 눈빛, 그 청년의 고민이야말로 나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해 많은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순간에 그 청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 청년에게는 더 큰 고민과 더 많은 방황이 필요했고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그 청년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을 만큼의 수행이 되어 있지 않았다. 해답은 현재 진행형이다.
어쩌면 그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을 때야 말로 내 수행의 긴 여정은 막을 내릴 것이다.
더구나 그 질문의 이면에는 출가가 현실도피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그렇게 보이는 부류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더불어 살기 때문에 받아야 할 비난의 강도는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의 출가는 현실 직시에 대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 도피가 아니라고 강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떠한 출가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출가자의 직무유기일 뿐이다. 출가에 대한 아무리 사소한 비난이라도 수행자는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작은 비난이라도 부둥켜 안고 고민해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을 향한 수행자의 기본적인 의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출가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스님들의 출가 동기에 대해서 세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 속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출가 그 자체는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출가 그 자체는 나쁘고 공교에 포함되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고 방식은 문제으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출가,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오히려 출가 뒤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출가의 의미가 결정된다.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들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출가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폄하시켜서도 안 된다. 출가라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그 무엇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밭 갈고 씨앗 뿌려 공양하지 않는 출가자들의 생활이 비생산적이며 현실도피라고 비난하는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이 출가의 의의를 설명하였다.
\"바라문이여 나 또한 밭 갈고 씨앗 뿌려 공양하고 있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앗, 고행은 철따라 내리는 비, 지혜는 쟁기 끄는 멍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끌채, 올바른 생각으로 스스로를 지키니 이것이 훌륭한 소몰아이로다. 몸과 입과 마음 잘 지키기를 창고에 먹을 것을 잘 관리하듯 하며 진실을 타고 게으르지 않음에 기꺼이 머물러, 정진으로 황폐한 밭을 없애 편안한 마음으로 밭 갈고 있다. 이와 같이 밭 갈아 감로의 열매를 거두노니 윤회의 몸을 받지 않으리.\"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육체적으로 하는 일만이 일이 아니라 수행자는 수행자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본분을 지킴이며 그것이 하나의 생산 활동이라는 것으로 출가가 결코 비생산적이거나 현실도피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 출가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가의 의미를 고의적으로 폄하시킨다고 해서 그 숭고한 가치가 퇴색되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여 출가를 위대한 포기로 승화시킨다고 해서 출가가 현실도피라는 비난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출가 뒤에 전개되는 수행자의 행위로 말미암아 비겁한 출가가 떳떳한 출가로 되기도 하고, 위대한 출가가 현실도피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단순히 현실도피라는 이유만으로 출가를 망설이고 있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가 그러한 비판 정신을 늘 간직할 수 있는 한 얼마든지 출가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출가가 현실도피라는 비판을 언제나 가슴 속에 담고 사는 수행자는 어떠한 고행의 길목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타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수행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 비판, 자기 부정의 정신이 살아있음이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세상에서 태어나서 사람 몸을 받고 그 가운데에서도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복이겠는가.
그러나 가사 장삼 입고 절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부처님의 참 제자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출가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벌써 타성에 젖어들고, 수행자이기보다는 성직자가 되어가는 내 초라한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든다.
나는 과연 나의 출가가 현실도피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