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는 인도 스님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다. 연기스님은 화엄사에서 부처님의 본국인 인도적 화엄사상을 설하였는데 이것은 신라말에 이르러 중국 화엄과 더불어 신라 화엄사상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 뒤에 자장 율사가 당나라에 가서 법法을 얻고서 돌아오는 길에 부처님 진신 사리 일흔세 과를 모셔왔는데, 이 곳 지리산 화엄사에 공양탑과 함께 삼층사자 사리탑을 세우고서 그 안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뒤 의상 대사가 이 곳에 머물면서 문무왕 10년(670)에 삼층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그 둘레를 석각 화엄경(석경)으로 둘렀다.
이로써 화엄사는 대도량으로서의 틀을 잡게 되었다.
한편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엽까지 활약했던 도선 국사는 마침내 화엄사를 총림으로 키우니, 그로써 개창 이래 최대의 규모를 가진 대총림이 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왕명에 따라 한 차례 중수한 뒤로 계속해서 홍경 선사, 정인 왕사, 조형 왕사 들에 의하여 중수 및 보수가 이루어졌고, 명종2년에 도선국사비가 건립되었다.
조선초인 세종 6년(1462)에 선종의 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서도 많은 고승 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이 될 수 있었다.
지난 10월 초순에 가을 정취를 느끼면서 지리산 일대를 돌아보고자 화엄사를 찾았다.
때마침 화엄사 서오층석탑 부처님 사리 친견 대법회가 열리고 있어 전국에서 모여 든 불자들과 함께 법복과 안복을 더불어 누릴 수 있었다.
화엄사 입구에 들어서노라면 맨먼저 일주문의 앞뒤에 \"지리산 대화엄사
智異山 大華嚴寺\" 와 \"해동선종대가람 海東禪宗大伽藍\"의 대형 현액이 늠름하게 나타난다. 이는 몇 년 전에 작고한 서예가 석전石田 黃旭 옹이 아흔하나의 나이에 쓴 작품이다.
고창 사람인 석전은 말년에는 수전기로 붓을 손 전체로 잡는 그만의 독특한 악필법을 구사함으로써 웅장한 기개와 예수러운 멋이 우러나는 빼어난 필치를 보여주었다.
\"각황전覺皇殿\"의 현액은 중건 당시 형조 참판이던 이진휴가 쓴 글씨로서, 중후한 품격이 돋보이는 해서풍의 작품이다.
한편, 행서체로 쓴 \"원통전圓通殿\" 현액은, 비록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서풍의 활달함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앞의 대웅전과 각황전, 원통전에 걸려 있는 주련 글씨이다. 이 주련의 글씨들은 모두가 광주 사람으로서 작고한 근대 서예가 남룡南龍 김용구金容九의 작품인데, 저마다 체를 달리하여 전서, 예서, 행서로 쓴 이 글씨들은 그의 독특한 필치가 거침없이 드러나는 수작이다.
대웅전은 여섯 폭 주련의 정중한 전서의 필치이고, 원통전의 주련은 네 폭의 행서이며, 그리고 각황전은 여덟 폭의 예서이다.
그 가운데 각 한 폭씩만 부분으로 위에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