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1): 나철과 단군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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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6년 01월 167호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조금 지리하게 설명한 천도교가 창건되기까지 동학의 발자취는 우리 나라가 서세동점에 따른 열강의 협박과 사회 경제적인 피폐로 인해 민생이 지리멸렬해져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 때문에 혼란기에는 으레 무성하게 마련인 정감록의 감결에 따른 예언 신앙이 아주 무서울 만큼 재빨리 번져나갔다. 또 동학의 사상적 바탕이 거기에서 우러나왔음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1905년의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이 송두리째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즈음에서는 백척간두니 하는 따위의 위기 의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모름지기 국권을 되찾는 광복 운동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절박한 국면에 다다른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사람의 혼을 쥐고 흔드는 종교가 앞장 서게 마련이다. 물론 종교 지도자가 이끌고 나아가야 한다.
이런 정황들을 염두에 둘 때 한일 합방이라고 하는 경술국치를 앞뒤로 민족정기의 명맥을 잇고 우리가 그래도 앉아 죽을 수만 없다며 기백을 떨치고 나선 종교가 대종교이자 그 창시자인 홍암弘巖 나철羅喆이다. 나철은 본디 전라남도 보성 사람이다. 그는 조선말기에 과거에 급제해서 승문원가주서承文院假注書를 역임한 일이 있었던 만큼 정통 유림의 올곧은 정신을 이어받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요즈음 권력에 눈독을 들인 정치 군인들을 지탄하는 것처럼 옛날에도 선비라 해서 다 지조가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썩어빠진 부유腐儒의 무리들이 더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철과 동시대 사람 가운데도 면암 최익현이나 매천 황현을 빼놓고는 모두가 흔들린 적이 있는 \'거짓 선비\'들이 아니었나 싶다.
「음청사陰晴史」란 책을 써서 잘 알려진 운양 김윤식만 해도 그렇다. 구한말 최대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그는 비록 친일파 노릇은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처음에는 개화파였다가 나중에는 친청파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한일합방 뒤에는 일본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3.1운동 뒤에 작위가 박탈되었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지조없는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비록 시골 출신어었을망정 3.1운동이 일어나기 삼 년전에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서 단식으로 순절한 나철이야말로 진정한 선비나 지식인이라고 하면 지조와 칼날 같은 비판 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구시대의 선비는 불사이군이라고 해서 서로 다른 왕조의 두 임금을 섬기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더 명예로운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원인도 거기에 있고 조선시대에도 사육신이니 생육신이니 하는 지조가 곧은 선비들이 여러 명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불사이군의 절대적인 도덕률은 주자학의 가르침인 정윤론正閏論에서 파생한 믿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지배권을 장악하는데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비록 시골 출신이지만 주자학으로 정신 무장을 한 나철이 \'오랑캐\'나 다름없는 일제에 국권이 유린당하는 사태가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그냥 비분강개하는 정도에서 머뭇거릴 수만은 없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노릇이다. 실상 1894년 갑오경장에 따른 단발령이 선포된 뒤로 전국의 유림들이 벌떼같이 일어난 의병봉기가 거의 이십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유림들의 봉기가 단순히 전통적이 유교의 가치를 고수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어서 당시의 국제 정세에는 어두운 일면도 없지 않았다. 그 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들은 우리 나라를 가리켜 소중화小中華니 하여 또 하나의 \'작은 중국\'이라고 여겨 아직도 케케 묵은 모화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러 점에서 본다면 시골 출신이었을망정 나철은 툭 트인 선비였다.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기 한 해 전인 1904년에 관직을 사임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유신회란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기李沂 등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 일, 청 세 나라가 선린의 우방으로써 한국을 도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일방방이 된 것을 알고 단도 두 자루를 품에 품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을사 오적을 죽이려 했다가 미수에 그쳤다.
요약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나철은 당대의 유림으로서는 드물게 보이는 민족주의자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더 설명을 하면 적어도 1910년 한일합방 경술국치를 당하기까지는 우리 나라 재야의 선비들이 투철한 내셔널리즘, 곧 민족주의를 체득하기란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본다. 무슨 말이냐고 하면 민족주의를 개인에게 있어서 자아에 대한 의식의 발달과 비교해 보면 쉽사리 이해가 될 것이다.
사람은 보통 사춘기 무렵에 들어가면서 자아의식이 확립된다고 한다. 그런 사춘기를 인생의 위기라고까지 말한다. 이 때에 길을 잘 들어서면 대성하고 그렇지 못하면 평범한 사람으로 일생을 마치거나 범죄의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민족으로서 또는 나라로서 우리 나라는 20세기가 다 될 무렵에야 민족적인 사춘기에 들어섰다고 할 수가 있다. 그 전에는 훌륭한 선비마저 우리가 민족적 자주성과는 거리가 먼 소중화라는 쓸데없는 자부심에만 들떠 있었을 뿐이었다. 진정한 자의식, 곧 내 민족 내 국가 또는 오늘날 흔히 말하듯이 \'배달겨레\'라고 하는 민족적 자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동안 우리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나 하는 반성이 오늘날의 지식인들 사이에 적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철은 유림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민족주의자이다. 그가 대종교를 창교한 이유를 바로 거기에서 찾을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도 대종교에서 숭배 대상이 되는 단군은 조선말기쯤이면 주자학과 모화 사상에 젖은 선비들에 의해서 잊혀진 지 오래된 전설의 인물이었다.
단군하면 오늘날에는 우리 나라 건국 설화와 관련이 깊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에 개천절을 공식 국경일로 선포하고 북한에서는 단군릉을 거창하게 복원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그 많은 문헌 중에 누가 지었는지 문헌 자체의 신빙성 여부에 문제가 있는 「규원사화揆園史話」에만 단군이 언급되었을 뿐 전혀 거론조차 되지 않았었다. 다만 무당들이 굿을 할 때 펴보는 「선생안先生案」이란 cr에서 단군이 무당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민중들에게서는 단군 신앙이 대단했었으리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는 정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에 관한 정보는 고려 때의 승려인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언급된 것이 전부이다. 그 중에서도 「삼국유사」의 기이편奇異篇에 적힌 내용이 주요 골자가 된다. 그렇다면 고려 때에는 단군신앙이 제법 왕성했던 것으로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떤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고려 때 몽고군이 침략하게 되자 민족 의식이 싹트면서 단군신앙이 왕성하게 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정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단군신앙이 고려 이후에는 전혀 공식적으로 거론이 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조선 왕조 실록에 보면 신하들이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도 천제天祭를 지내야 하는데 그 신앙의 대상을 단군으로 하자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신하들이 우리 나라는 중국의 신하 나라이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반박을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원구제圓丘祭 문제인 것이다. 지금도 조선 호텔의 경내에는 원구단이라는 유적이 있는데 이것은 1895년에 고종이 제위를 선포하면서 우리 나라도 황제(天子)의 나라이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여 급조한 것이다.
아무튼 이런 정황을 검토할 때 국조 단군을 신앙 대상으로 승봉하는 종교를 태동시킨 나철을 탁월한 민족 사상가라 아니할 수가 없다. 당시까지도 중국은 천자의 나라요 우리는 제후의 나라라고 굳게 믿었던 유림 출신에게서 이러한 발상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