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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가야산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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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6년 01월 167호
가야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가 가슴을 온통 푸르게 적신다. 눈을 들어 산을 우러르면 산자락마다 기암괴석과 미려한 기상의 소나무가 도열하고, 홍류동 계곡이 굽이쳐 흐르니 벽계청산碧溪靑山의 하늘빛 또한 푸르름이 넘친다. 해인삼매의 한 생각, 맑은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청정한 도량이 천 년의 바람 속에서 물처럼 흘렀고, 또 21세기를 향해 흐르고 있다.
해인 가람의 숨결을 처음 대한 것은 몇 해 전에 성철 큰스님의 열반으로 시작되었으니 참으로 때늦은 발걸음이었지만, 그 뒤로 가야산에 대한 애모의 정은 한시도 그친 적이 없었다.
첫 만남이 너무도 큰 감격에 사무쳤던 탓일까. 끝내 \'다비장 가는 길\'을 그리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 돌이켜 보아도 당시 화엄의 바다를 이룬 장관이 가야산 해인사가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했겠는가 싶다. 따라서 후세에 길이 인구에 회자될 추념의 현장으로서 가야산은 더욱 빛이 났다. 자연의 품 속에서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가는 님의 마지막 길을 따른 중생들의 만장 행렬은 장엄의 물결을 이루었고, 법비의 흐느낌 속에 솟아오른 다비의 불꽃은 온누리를 밝게 비추었다.
이후로 깊이 「해인」지와 연을 맺게 된 나로서는 더욱 가야산의 별빛과 시린 물소리가 선연하게 살아 오르던 삼매경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몇 차례 홍제암에도 묵고 \'해인가족 모임\'에도 참여한 뒤 지난 늦가을에는 어둠을 지고 올라와 명월당에서 배낭을 풀었다.
새벽 사물 소리에 깨어나 밖을 나서자 스산한 어둠 속에서 솟아난 가야산 산정에는 태초의 은하가 흐르고 있었고 홍류동에 흐르는 영겁의 물소리를 들으며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낙엽의 죽음을 보았다.
아침 햇살이 돌담에 감기는 퇴설당에서 마침 혜암 큰스님을 뵈었다. 스님은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이가 한바탕 큰 연극을 온 국민에게 보인 것이지요. 이럴 때 크게 깨치는 겁니다. 얼마나 물질이 허망한지를.\"
스님의 일갈에 아침 공양을 거르고도 심신이 안식에 들 수 있었고, 주먹만큼한 실패도 낳지 못한 채 바위만한 꿈을 꾸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헤아려 보니 해인사 전경을 살피러 사계절을 모두 산에 올랐다. 또 다시 화구를 들고 금강굴 뒷산 비탈을 오르는데 햇살은 이미 부풀어 있었다. 그날 그 자리르 다시 찾아 몰아 쉰 가쁜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먹을 갈고 또 갈면서 바라보는 가야산 해인사는 창공이 바다에 빠져 파도를 타고 오는 법거량으로 충만하였다. 온통 푸르름에 젖은 나그네는 가야봉과 두리봉 자락을 두루 펼치면서 마침내 푸른 물이 되어 단풍이 물든 산에 뚝뚝 흘리며 내려왔다.
경내를 순례하던 중 다시 팔만대장경 판고 창살에 코를 막고 숨을 죽였는데, 양지와 음지에 따라 판고 창문의 아래 위가 바뀌어 있음을 이번에서야 알아차렸다.
한 자 새기고 한 번 절했다는 그 치성이 천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하늘에 닿았는가. 가야산 해인사 전경을 그리려고 엎어진 시간 속에서 날아든 낭보는 마침내 팔만대장경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새날의 역사를 이루었다.
해인사 그림은 이백육십 년 전 겸재정선이 그렸다. 그의 금강산 그림에 못지 않는 부채 그림에 못지 않는 부채 그림의 백미로 꼽힌다.
부채꼴에 따른 구도의 변형은 가히 대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는 바 그의 나이 환갑 때의 일이다.
불초 후학은 이제 겨우 불혹에 들어선 미숙함으로 붓을 들자니 형形은 멀어지고 상象은 자꾸 달아나기만 하니 이를 어쩌겠는가. 하지만 세월의 연緣이 깊어질테면 언젠가 후학의 그림에도 가야산의 볕이 묻어날 수 있을는지. 지금은 다만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