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만나고 싶은 사람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채경당 바람결 - 영덕 1996년 01월 167호
독 가득 파란 하늘을 퍼다 놓은 것 같다. 출렁거리는 쪽물에 고막 껍질이나 굴 껍질을 구워 만든 질 좋은 석회를 뿌리고 천천히 젓기 시작하면 거품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흰색 다음에는 청색, 그리고 자줏빛, 두 시간쯤 저으면 완전한 가지빛 거품이 넘쳐흐르는데 이것이 꽃거품으로 바로 색깔이 깨어났음을 기별해 주는 반가운 거품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而靑於藍)의 그 푸른색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맑고 향기롭게에서 보내온 쪽씨를 심어 놓고 싹이 나기를 기다렸다. 정성이 모자라는가 싶어 다라니도 쳐보았지만 소식이 없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쪽람아 쪽람아 새싹을 내어라 새싹을 내쟎으면 개미가 파 먹으리\' 기다리다 지쳐 나중에는 막대기로 땅을 치며 위협도 해 보았지만 끝내 쪽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옛날에는 승가에서도 치자와 꼭두서니 그리고 쪽으로 노랗고 빨갛고 파란 물을 들여 만장을 쓰고는 했다는데, 요즈음은 노스님들게 여쭈어 보아도 천연 염료로 물들이는 법을 아시는 분이 없었다. 한때 일엽스님이 가끔 쪽을 띄우실 때는 엄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꽃대가 올라온 뒤 베어내어 줄기 채 독에 밟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한 주일 가량 돌로 눌러놓는데 이때 물음 샘물처럼 조용하지도 촐랑거리지도 않는 흐르는 시냇물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쪽은 민감해서 변덕 많은 여자 다루기보다 어렵다 하여 행여 부정하거나 정성이 모자라면 제 색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란다. 화학염료에 밀려 어디론가 숨어 버린 우리의 빛깔, 자연스러운 감촉,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반향 같은 은은한 멋 그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동천冬天같이 시린 쪽이여!\" 운운하며 쪽을 부르며 다니는 내가 딱해 보였던지 어느 날 반 스님이 복사물 몇 장을 건네 주었다. \"쪽빛 남자의 대쪽 인생\" 쪽빛을 찾아 젊음을 바친 벌교의 전통 염색가 한광석씨의 선한 눈빛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농사도 이문이 남지 않고, 염색도 돈이 되지 않지만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자연에는 비밀이 있어 그 비밀을 풀지 않고서는 삼베고 무명이고 어디에도 쪽빛은 들어서지 않는데 수도 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그렇게 짙은 하늘이 스민다고 하였다. 자연의 한 귀퉁이에서 자연색을 빌려오는 것뿐이라는 그를 만나 보고 싶었다. 꽃대가 올라오는 팔월 하순경에는 아무리 바빠도 벌교행을 감행해야겠다. 내친 김에 평생 아름다운 고리짝을 만드는 기법을 연구하며 모진 삶을 살아온 사람, 채상에서 만큼은 자신 있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다는 중요무형문화재 53호 지정 보유자인 서한규씨를 찾아 담양에도 들려보고 싶다. 이 땅 곳곳에 우리 것을 지키며 살아온 대쪽 같은 사람들!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느꺼워져 이들을 위한 축원으로 나의 기도는 더 길어진다.
초승에서 그믐까지 달빛을 만끽한 음력 시월이었다. 냉냉한 야기 속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 달빛 속에 우뚝우뚝 솟은 큰산의 그림자가 신비로워 도량 안을 서성이다 들어오곤 했다. 몇 번이나 눈이 왔나 싶어 눈을 비볐는지.

은하 푸른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뜨거랑 나는 가련다
목숨壽자 박힌 淨한 그릇으로
체할락 버들잎새 띄워 물좀먹고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고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달그락 달그락
달뜨걸랑 나는 가련다

월북 작가 이병철李秉哲님의 \'나막신\'이다. 계급 투쟁의 길로 전향하기 전의 서정시이다. 이미지가 주는 청옥색 조화나 산뜻한 리듬도 좋지만 내가 이 시인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노들강변 지금의 노량진 나병환자 집단촌에서 \'그림 잘 그리고 노래 잘 하고 시 잘 쓰는 문뎅이가 누꼬?\' 하여 문드러진 손마디를 반갑게 잡아 흔들며 코마저 떨어져나간 한하운이를 찾아 「신천지」에 \'전라도길\', \'데모\', \'소록도\', \'황혼길\' 등 십여 편의 시를 발표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 준 사람, 그 뒤 「한하운 시초」를 묶어 서문을 써 주었는데 그 서문이 또한 걸작이 라는 소리를 들었다. 인환의 거리, 그 누황에서 한 사람의 한을 묶어 보리피리같이 세상에 전해 준 사람으로 오래도록 따스하게 그를 기억할 것이다. 월북 작가 해금 조치에 따라 김용준의 「근원수필」, 이태준의 「무서록」은 수필공원을 편집하는 박연구 선생님의 정성으로 범우사에서 문고판이 나와 있다. 평생을 수필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온 박선생님께서 두 권의 책을 보내 주어 이 산중에서도 귀한 책을 돌려가며 읽을 수 있다. 월북작가전집에 몇 편의 시가 전할 뿐인 이병철 시인을 위해서는 내가 아는 그의 시 제목을 낮은 목소리로 나마 한번 더 불러 주는 일밖에는 \'소\', \'소야 뿔을 써라 소야\', \'역두에서\', \'다시 강가에서\', \'대열\', \'수장 水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 가운데에 또 한 사람은 극작가 이은성이다. 미완의 걸작 소설 「동의보감」을 쓰다가 심장이 터져 숨을 거두면서도 죽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글을 쓸 것이라고 했다는 징하게 외로웠던 사나이. 하나같이 바보스럽도록 억척같고 끈끈하고 뻑센 이 땅의 토종 인간들을 형상화시키는데 모든 것을 걸었던 그의 삶, 역사 속에서 굵은 인간만을 찾아 굵은 인간만을 만들다가 집념의 사람으로 그를 기억한다. 서민 속에 깃든 민족 정신의 맥과 민중을 발견한 자로서의 판소리 대가 신재효를 다룬 「광대가」, 대동여지도를 통한 국토 사랑의 뜻을 담은 「고산자 김정호」, 학문, 천문, 지리, 산수, 의약, 주역에 조예가 깊었던 토정 이지함의 생애와 일화를 통해 생을 투시하는 철인의 진면목을 그리고 있는 「토정비결」, 유의태와 허준을 대상으로 한 「집념」은 당시 활자에 대해 냉소를 보내며 돌아섰던 많은 사람들을 활자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다시 돌려 세웠다는 평을 받았다. 전 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이었던 이진섭씨의 회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리에도, 왕명에도, 신분에도, 정분에도 한눈 팔지 않고 그게 누구의 병이든 오로지 병 낫우는 스스로의 직분, 천분에만 온 정성을 바치는 어기찬 한 인간상을 비록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나마 대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천天, 지地, 인人 합일사상을 구체적인 인간의 몸을 통해 표출시키는 동의의 진득한 깊이에 흥건히 취해 「집념」의 향후 전개를 두고 나름대로의 비판과 아이디어를 주고 받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전한다. 크고 올곧은 진정한 민족애를 진하게 그려 보이던 그를 어떻게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다시 이 땅에 와 우리의 얼을 얼얼하게 소리치는 대찬 붓을 다시 휘두를 수 있기를 축원한다.
중심도 알 수 없는 세계화의 물결 애매모호한 세계화의 정의, 최소한 내가 누구인지 근원이나 알고 하는 소리인지…….
노자는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기지만 결코, 소홀함이 없다고 하였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필연적인 과보를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민심을 얻지 못한 자는 스스로 목숨을 재촉한다. 이것이 권력의 생리이다. 우리는 옛부터 하늘과 사람과 땅을 어우르며 융화와 화목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며 살아온 것을 상기해야 할 때이다. 이 감염시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