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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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의 염화미소 - 성전
1996년 01월 167호
새벽 세시. 죽비소리에 맞추어 눈을 뜬다. 문을 열고 추녀 끝을 서성이는 별을 바라본다. 싸하니 코끝에 와 닿는 추위, 창호지 밖에서 밤새 오들거리던 추위가 일시에 방안으로 밀려온다. 이불을 개는 소리만 사각일 뿐. 긴 고요가 겨울 바람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말을 잊은 사람들, 아니 진리를 찾아 떠나기 위해 가슴에 번쩍이는 칼날 하나를 품은 사람들이 여느 새벽은 새벽 달처럼 시리다. 말들이, 가슴에 상념이 날카롭게 베어나간다. 베어진 헛된 꿈들의 자리에서 피가 흐른다. 새 살이 돋겠지. 곧 새 살이 돋아 맑은 피부의 순결한 아침이 밝아오겠지. 가슴 속의 독백이 뽀얀 입김을 타고 새벽 하늘을 날아간다. 가부좌를 하고 좌복 위에 앉는다. 한 생애의 무게가 전부 실린 좌복이 문득 슬픔으로 투영되어 온다. 이 좁은 좌복이 내 세계의 전부라는 생각에 뉘 만져보지 못한 고독의 촉감을 실감한다. 고독의 촉감은 얼음보다 차다.
린드버그였던가. 인간은 떠다니는 고독한 섬이라고. 나 이제 그 의미의 차가움을 실감한다. 모든 것이 단절되고 오직 화두 하나만이 있는 자리에서 나 발 디딜 곳 없음을 깨닫는다. 그토록 오랜 시간과 많은 세계를 여행해 왔건만 그 어느 것도 내게 안주의 노래를 불러 주지 않았다. 문득 내가 낯설어진다. 내가 내가 아니라 타인처럼만 느껴진다. 지나쳐온 시간과 공간이 모두 사라졌듯이 그날의 눈물과 웃음 또한 사라져버렸음을 이제야 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저 생이 아름답게만 투영되어 오던 시절이 유년이 그랬다. 그 때는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언제나 즐겁게 잠이 들고 아침이면 아버지의 구수한 담배 연기 속에서 눈을 떠 따뜻한 세상을 만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생은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때는 지나간 모든 것들이 그 어딘가 한 곳에 다 모여 있으리라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고독하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가 만날 것이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지나쳐 가는 것은 사라져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앞에서 한 없이 왜소해진다.
문 밖의 바람이 침묵한 존재의 대열을 핥고 지나간다. 사라져 가는 것들 속에 사라지는 존재로 잠시 머물 뿐이다. 존재의 덧없음이 영원한 것에 눈뜨게 한다. 모든 것이 끊어진 좁은 좌복 위에서 영원한 것을 찾는다. 보일 듯도 하다. 어두워 가는 존재의 마을에서 영원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등불 하나가.
새벽 방선 죽비가 운다. 곧 아침이 밝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