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가팔라서 새도 넘기 힘들어 이름 지어졌다던가. 산허리에 억새가 유난히 성하다 하여 이름 지어졌다던가, 문경새재를 넘자니 희미한 멀미가 느껴졌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는 재를 넘는 새도, 억새도 보이지 않고, 그저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평지 위로 길만 하얗게 내려다 보이는 평지 위로 길만 하얗게 빛나 보였다. 그 옛날에 영남과 한양을 오가자면 넘어야 할 수밖에 없던 재였다. 힘에 겨워 콧김이 세어진 나귀를 탔거나, 혹은 짚신 몇 켤레 봇짐 끈에다 묶은 채로 오갔을 사람의 무리들이 초겨울 저녁 햇살 속으로 떠올라 보였다. 곧 문경이고, 이어 가은이고, 그리고 희양산이 품은 봉암사일 터였다.
동안거 직전의 봉암사는 고요하였다. 그저 처사 한 사람이 무심한 얼굴로 요사채 앞에서 배추 겉잎을 시레기로 엮고 있을 따름이었다. 청납이 살지 않으면 황건(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던 이 곳은 공기마저 아랫말과 달라서 한층 차갑다. 꼭대기에 사람 하나 서면 꼭 천 미터의 높이가 되는 희양산은 긴장감으로 팽팽한 봉의 머리 형상이고, 양쪽에 거느린 두 산은 날개를 쳐 막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서출 동류의 삼십리 계곡이 절터를 끼고 도니 그 형상이 용이 등천하는 형국이라 하였다.
스무 해 전 어느 겨울 날, 눈이 매서운 운수객 한 사람이 탄전 마을인 가은에 도착한 막기차에서 내렸다. 역전의 조촐한 가게에 들어가 잠시 언 몸을 녹이자니, 오가는 손님들 가운데서도 유독 스님들에게 유정하였던 주인이 스님을 붙들었다. 하루 묵어 가라는 것이었다. 봉암사까지는 삼십 리 길이라 보통 사람 같으면 서너 시간은 종이 걸릴 길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 손길을 마다고 절로 떠났다. 뛰다시피 걸었으나 얼어붙은 겨울 밤길은 녹록치 않았다. 봉암사에 도착해 보니 온몸이 동상에 걸려 피부에서는 진물이 나왔다.
정광스님의 봉암사 첫길이 그러했다. 경남 진영이 속향인 스님은 스무 살 무렵에 출가하여 쌍계사에서 사미계를 그리고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수계한 뒤로는 곧바로 선방에 드니, 나라 안의 이름난 절이나 선방을 두루 다녔으나 오래 머물지 못하였는데, 봉암사는 여느 절과는 달랐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그 순간을 느끼게 해 주었으니, 좌복 위에 앉아 있으면 졸리지도 않고 혼침이 없었다.
정광스님에게 그러했던 봉암사는 역사적으로 어떤 절인가. 가까이로는 해방 직후에 당시의 해이해진 선풍을 바로잡고자 서암, 월산, 향곡, 자운, 성철, 청담스님 등이 결사를 단행하여 현대 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바 있거니와, 82년에 \"특별 수도원\"으로 제정된 뒤로 일반인의 출입이 일절 통제되고 있는 한국 최대의 선종찰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신라의 유학승으로서 당나라에까지 빼어난 글솜씨를 떨친 바 있던 당대 최고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비가 있는 곳으로 더욱 뜻 깊은 곳이다. 팔 년에 걸쳐 지은 글은 유려한 문장도 문장이려니와, 분황사의 혜강스님이 삼십 년이 넘게 정성을 모아쓰고 각인하여 여든 세 살에 작업을 끝낸,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금석비문이기 때문이다.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는 신라 말기의 구산 선문 가운데 희양산문을 개산함으로써 \"해동 남돈종\"의 초대조인 도의를 비롯한 다른 여덟 산문과는 달리, 유일하게 북선종의 전통을 잇게 하였다. 그의 법맥은, 달마 이후의 선종 4대조인 도신에게서 법을 전수받아 도의보다 백 오십 년쯤 앞서 선종을 처음 이 땅에 소개한 신라승 법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랑의 제자인 신행은 스승의 법을 받은 뒤로 중국에 건너가, 5대조인 gd인의 양대 제자(혜능, 신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북선종의 초조가 되는 신수의 법손인 지공의 수기를 받고 귀국, 준범, 혜은을 거쳐 지증대사에 이르는데, 그가 희양산문을 개창함으로써 법의 융창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정광스님은 이런 내력을 지닌 봉암사에서 스무 해 가까이 머물면서, 이 곳과 조우한 인연을 기꺼워하며 그 인연을 이백자 원고지 삼천 장 가까운 분량의 책 한 권으로 옹그렀다.
「지증대사비명소고小考」란 이름으로 92년에 간행된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봉암사 경내에 있는 창건조인 지증대사와 중흥조인 정진대사의 비명을 판독하여 훼멸된 글자를 일부 찾고 번역하고 주해한 것이다. 또한 금석문 중에서도 어렵기 짝이 없다는 사산비명(지증대사비, 쌍계사의 진감국사비, 성주사의 낭혜화상비, 경주의 숭복사비)을 새롭게 판독하고 해석하였으며 구산선문에 대한 논문을 함께 실었다. 그러나 작업은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지증비문의 경우, 원문에 비해 예순 배 가까이 늘어난 원고 분량으로도 짐작이 가거니와, 초기 불교의 전래, 신라 선불교의 흐름과 교단사의 연구에까지 그 영역이 넓혀졌으니, 불경 및 유불선, 그리고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지 않고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증대사비문의 역사적인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먼저 남돈선의 초조를 비롯하여 초기 선종의 전래에 대한 최초의 금석문적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전등록」보다 앞서는 「조당집」이 근간에 발견되어 우리 나라 초기 선종 전래사에 대한 것이 좀 밝혀지기는 했습니다만, 그에 따라 구산선문 가운데서도 희양산문이 한국 불교의 주종인 남돈선에 앞서는 \'한국 선종의 발상지\'임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북선의 전래에 대한 기록은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가 없죠.\"
그는 또한 비문을 판독하는 작업 끝에 짚어낸 역사적인 오류 또는 확인 내용을 몇 가지 덧붙였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해를 애초에 「삼국사기」에 의거하여 528년으로 잡았다가 근간에는 527년으로 고쳐서 지금껏 그렇게 통용되고 있어요.
그러나 「삼국사기」에 앞서는 기록인 이 비문에는 528년으로 적혀 있으니 다시 바로잡아야 할 내용이지요. 또 하나는 법흥왕의 출가설에 관한 것입니다. 신라 때에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불교를 승인한 법흥왕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이 「해동스정」과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나온 「삼국사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어요.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해동승정」과 「삼국유사」저자가 모두 스님이었던 점을 들어 출가설에 대한 진위를 의심해 왔어요. 그러나 그것도 이 비문에서 사실로 적고 있습니다.\"
그가 \"밝혀낸\" 또 하나의 사실은 「육조단경」에서 혜능이 예언한, 자신이 세상을 떠난 지 칠십 년만에 동방으로부터 와서 법을 크게 펼치게 될, 출가 보살과 재가 보살에 관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마조와 방거사로 보고, 우리 나라에서는 성주산문의 개산조인 무염 국사와 사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 거사로 본다. 그러나 그렇게 적은 「조선불교통사」에서는 판단의 근거를 밝혀 놓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정광스님은 그 두 보살을 혜능이 간 지 꼭 칠십 년만에 도당한 도의와, 중국에서 삭발하기 이전에 법을 받고 \"동방의 성인\"으로 추앙받은 혜소(진감 국사)로 확신한다.
책의 앞머리에 \"해설\"을 쓴 돈연스님은 저자가 다른 무엇보다도 \"제 나라의 독창성을 외면한 채 중국 조사 어록의 말후구末後句에 맹종하는 그릇된 가풍\"을 크게 질타했음을 손꼽고 있다.
\"지증이나 혜소, 무염의 비문에는 선사들의 행적이 아주 재미있게 적혀 있어 수좌나 학승뿐만 아니라, 일반 불자들도 부담없이 볼 만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강당에서 필독했던 것들인데 요즘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 크게 아쉽습니다. 특히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은 스님들이나 일반인들이 꼭 읽어야 할 내용이죠. 그래야 선대의 불교사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이켜 보면서 우리 것을 애중히 여기는 마음의 터전이 닦이게 될 테니까요. 기회가 있으면 봉암사에서 강의를 통해서라도 스님들이 알도록 했으면 좋겠는데…….
우리들의 역사 인식의 수준은 우리 나라 남돈선의 초조인 도의스님에 대한 인식 정도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형편없거든.\"
그리고 정광스님은 도의 선사가 \"시운을 타지 못하여\" 북악(설악산)으로 숨은 것이 아니라, 운수 납자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법을 배워갔다는 기록이 지증비문에 적혀 있다고 덧붙였다.
정광스님은 올해 승랍이 삼십 오 년이나 그 동안 주지를 맡은 적도 상좌를 둔 적도 없다. 선원장 같은 것은 \"그 이름도 모르며\", 그저 방부를 들이면 마당 쓰는 소임, 법당에서 예불 보는 소임 따위나 맡으며 지금껏 살아왔다며 웃었다-스님은 지금 봉암사에서 법이 높은 구참 스님이 맡는 \'선덕스님\' 소임을 맡고 있으면서 가끔 대중 법문을 한다. 본분사가 참선이요 수행이니, 저술은 이 책 한 권으로 끝낼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선 수행에 관한 실질적인 지침서가 될 만한 글은 한번 적어보고 싶어한다.
\"선은 선객의 것만이 아니고, 일반인도 다 이해하고 닦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 하고요. 일상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닦아야 하는 것이죠. 용맹정진이란 특정한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 잊지 않고 늘 지니면서 놓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면 하루 종일 잠 안 자고 선방에 앉아 있다고 해서 용맹정진하는게 아닙니다. 일심으로, 마음이 변치 않고, 불교에 대한 근본 이치에 마음을 두고 생활하는 사람이 곧 용맹정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지금 바로 해야 합니다. \'다음\'은 없어요. 기회는 지금보다 적고, 없어져 버립니다. 안 좋고 어렵더라도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예요.\"
왜 망상이 들고, 염념이 화두가 성성적적하게 들리지 않는가.
\"잘 안 된다 함은 깊은 곳에 \'내가 그렇게 나아가기 싫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되기가 소원이라고 입으로는 되뇌지만, 중생들과 왈가왈부하면서 밀고당기기 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들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이중 생활이지요. 불법을 근본적으로 깨닫기 이전까지는 그런 습習이 다 있습니다.\"
\"알고 있는 것은 다 타파됩니다. 알려해도 알기 어려운 습, 자신이 모르는 습이 문제지요. 알고 있으면서도 타파가 안 되는 일은 없어요. 그건 잘 모랐기 때문이죠. 겉으로만 알고, 실질적으로는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정말 아는 것은, 통찰해서, 사무쳐서, 눈꼽만큼도 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문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자면 평소 어떤 마음이어야 하나.
\"배우기를 일삼고 좋아해야 합니다. 공자도 날 때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어렵습니다. 공자도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제자 중에 요절한 안연말고는 없었다고 그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세상에 있을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다 배웁니다. 그러나 있지도 않고 생각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것을 그 다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사람의 감정으로 이렇다 저렇다 표현하기 이전 상태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소 군자이고 인을 행하는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바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떠한 것인가.
\"먼저 우리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구, 맛난 것 먹고, 게으름 피우고 싶고, 이름을 떨치려는 마음 따위의 중생락을 쉬면 첫 번째 깨달음이 옵니다. 그것을 법아상法我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마저 쉬어야 청정한 본디 마음에 이르게 되니, 그것이 견성입니다.\"
그러고 보니 스님이 십 년째 머물고 있는 동암의 방 안에는 \"휴휴실休休室\"이라는 글귀가 큼직하게 붙어 있다. 쉰다는 것은 곧 버린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또 버려라. 봉암사의 후원에는 옷을 입은 행자 한 사람이 장작으로 군불을 때다 말고 부엌문을 두드리며 법고 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문에는 두꺼운 종이 판지를 붙여 놓아 둔탁한 소리가 났다. 뭇중생들에게 감로의 법을 들려 줄 수 있으려면 버리고 또 버려라. 맑은 소리 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