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불교의 기본 성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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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6년 01월 167호
석가모니는 여러 가지 미신적 행위도 엄격히 금했다. 이를테면 땅에 누워 진흙을 몸에 바르거나 신성한 강물에 목욕하면 모든 죄를 면하여 사후에 천국에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정신적인 죄나 더러움을 진흙이나 물 따위로 정화할 수 있다면 강에서 사는 물고기나 거북은 인간보다 훨씬 먼저 천국에 태어날 것이 아니냐고 비난했다. 이 밖에도 방위方位나 일시日時에 따라 길흉을 점치거나 주거, 여행 등 일상 생활에서 금해야 할 사항들이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것도 미신적인 불합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여 배제하였다.
이와 같은 원시불교경전에는 허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석가모니가 일상의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한 제자나 신자들도 이 신자들도 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묻고, 대답도 시종일관 이 현실에 즉해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원시불교 나아가 불교의 기본 입장은 늘 이 현실을 직시하고 응시하여 현실에서 떠나지 않는 현실 중시에 있다고 보겠다. 이 현실 중시는 이른바 공리주의나 찰라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현실주의가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인 긍정적인 현실 중시를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현실 문제의 해결은 삶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여 그것을 소멸해서 이 현실 세계로부터의 초극을 실현하려는 것이며, 나아가 이상의 경지인 해탈, 곧 완전한 자유를 이 현실에서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현실 중시는 그것을 목표로 노력, 정진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갖가지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중시의 기본 입장에는 쉽게 회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른바 형이상학의 문제에 관한 것으로서 인류 역사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인류 공통의 테마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당시 인도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계의 이면에 생멸변화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변한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이 불변의 실체를 \'본체\'라 하고 이 본체에 대해 많은 의견이 제기되었다.
원시불교경전은 당시의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열네 가지로 정리하고, 이것을 열 네 개(또는 열 개)의 난문제라 하여 십사난十四難(또는 十難)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 십사난의 물음, 예를 들어 \'깨달은 자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등의 물음에 대해 석가모니는 언제나 침묵(無記)으로 일관했다-이것을 십사난무기(또는 십난무기)라 한다. 왜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이들 난문제가 모두 형이상학과 관계되는 문제로서, 이에 답하는 것이 인생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기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 경험은 모두 감각이나 지각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인데, 이 감각이나 지각의 범위는 현상계뿐이다. 가령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본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인식 능력 범위 밖이다. 따라서 사후에 깨달은 자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우리들은 그것을 절대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초경험적 그 무엇을 판단하거나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결코 문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여 무기로써 답했던 것이다.
만일 사후의 세계가 인식되고 그 존재가 논증된다 하더라도 사후의 세계는 현상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상 안에만 존재하고 있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고뇌하거나 미망의 세계를 떠나 깨달음에 이른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현상계의 일로 본체계와는 상관이 없다. 결국 고통과 행복, 어리석음과 깨달음 등을 설하는 종교 이론이나 실천에 대해 본체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본체를 문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형이상학에 관한 질문을 한 사람 가운데에는 그렇다면 왜 무기인가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석가모니는 역시 무기로써 일관했다. 그러나 그 침묵에 대해 집요한 추구가 있으면 석가모니는 드물게 적절한 비유를 들어 답했다. 그러한 비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잘 알려진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가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있을 때 한 바라문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문제가 되고 있는 본체론적인 여러 가지 철학설에 흥미를 가지고 그 해결을 위해 철학자와 종교가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라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불교 교단에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그러나 주위의 비구들은 철학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일없이 묵묵히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비구들은 철학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일없이 묵묵히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청년은 불만으로 가득 차 만일 철학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단을 버리고 세속 생활로 되돌아갈 생각으로 어느 날 저녁 석가모니를 찾아가 해답을 구했다. 이에 석가모니는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설하였다.
어떤 사람이 독을 바른 화살에 맞아, 그의 친구와 친척들이 그를 곧바로 의사에게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화살 맞은 이가 자기를 쏜 사람이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 이름은 무엇이고, 출신지는 어디며, 자기를 쏜 활과 화살, 화살촉 등의 종류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판명되기 전에는 그 독화살을 빼지 않겠다고 우긴다면 그것들이 판명되기 전에 독이 전신에 퍼져 죽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년도 본체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수행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고 우기면 본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수행에 들어갈 기회도 없을 것이며, 윤회를 벗어나 고뇌로부터 해탈을 얻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청년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고뇌의 해결을 위해 성실히 불도의 수행을 닦았다고 한다.
어떤 원리를 탐구해서 궁극에 도달하려고 하는 이른바 형이상학적 논의는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더구나 그 논쟁은 아무리 계속되어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지知를 위한 지知의 향연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현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며, 더구나 실천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버린다.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인간의 미래의 운명이나 내세 등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과제는 문제로 삼지 않고, 오직 현재의 삶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