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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의 꿈, 개산 1,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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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종림 1996년 01월 167호
종림/해인사 장경연구소 소장

2002년은 해인사의 개산 1,200년이다. 1,200년의 역사도 역사지만, 해인사는 한국 불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장점들이 있다.
첫째는 법보의 종찰이라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세계 최고의 판본으로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불교의 법보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재를 봉안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총림이라는 기구가 가지는 특성이다. 총림은 선원, 강원, 율원 등의 종합교육기관이다. 종합교육기관이라는 장점 외에 정치적인 의미도 있다. 정화 이후 혼란스러웠던 종단의 총무원으로부터 얼마쯤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성은 한 산중에 여러 문중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문중 중심의 사고나 태도를 형성할 수 있던 원인 가운데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200년의 역사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2002년은 앞으로 육 년밖에 남지 않았다. 꿈을 꾸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그림들을 구체화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가속도나 의외성의 변수가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변화의 속도가 우리들의 노력보다 앞지를지도 모른다.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에도 힘겨워하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변화를, 흐름을 관망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필요할 것 같다.
해인사는 한국 불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모델 케이스적인 기능이 때로는 자신의 변화를 시도하는 데는 방해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문명의 씨앗은 문명의 중심권이 아닌 주변 문명권에서 발생되듯이 말이다. 그러나 한계는 있지만 노력한 만큼은 변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역할이 확보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정보화 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고 탈현대가 이야기되고 있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늦춘 걸음 덕에 승가라는 집단은 아직도 삐그덕거리고 있다. 종단의 혼란은 이념의 혼재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제도적인 면에서 본다면 합리적인 운영 체계를 도입하는데 실패한 데에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편입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와 불교의 이상은 맞지 않는 구석이 많다. 그러나 맞으면 맞는대로 맞지 않으면 맞지 않는대로 영역의 분할이 있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소지는 아직도 남아 있다.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본주의에 물들었는데 제도는 봉건적인 조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런 상태라면 개인의 기능을 펼 장을 열어 줄 수밖에 없는데 집단의 결속력이 약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능에 따라 분화되어 재편의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구성원들을 조직의 봉사자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념과 동기 부여가 뒤따라야 한다. 여기에서 이념의 문제는 접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요인이 있다. 이념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었다면 제도의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승가라도 조직을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편제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승가의 구성원들이 조직의 봉사자로서의 기능을 하던 자본주의적인 태도를 가지던 간에 상관이 없다. 또 집단의 구성 역시 현대의 제도를 유지하던 자본주의적인 제도를 도입하던 간에 상관없이 승가라는 조직이 사회 체제 속의 역할이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창경원의 원숭이일 수도 있고 복을 파는 장사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선禪을 팔아도 좋다. 선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아도 좋고 선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세계를 정복해도 좋다. 그러나 선을 표방하면서 복을 파는데 의존하는 것을 의존하는 만큼 영역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하여튼 체제나 세계 속의 역할이나 영역의 확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다.
해인사가 아직도 희망을 걸어 볼만한 것이 있다면 교육기관으로서의 장이다. 교육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천차만별이다. 교육의 문제는 수평적 사고와 수직적 구조의 차이에 있다. 강원의 구조는 수직적인 조직이다. 화엄을 정점으로 하는 상하의 수직적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치문도 있고 치문중강은 있어도 치문의 전공자는 없다. 학문간의 전공의 수평적인 분화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은 학문간의 경계도 사라져 가고 있다. 추구되는 것은 방법의 확실성과 이론의 타당성이다. 철학도 철학자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물리학자는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가설의 제기나 증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접근하는 방법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소재에 대한 집착보다는 방법에 대한 문제다. 문제되는 것은 불교적인 사고나 태도가 어떤 것이냐는 것이다.
강원이라는 제도나 교과 편성을 성층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삼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미래 사회를 바라보는 승려의 교육이라면 다양한 접근 방법과 전문적인 기능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러한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는 특수교육은 영역의 축소를 가져올 뿐일 것이다. 지금 해인사가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면 승려의 기본 교육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념의 문제야 일반적인 문제이지만 교육의 기능적인 측면을 감당하기에도 한계가 있다. 오히려 몇 개 전문기관의 운영이라면 해 볼 만할 것 같다. 특수교육기관으로서의 장점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해볼 만한 것이라면 해인사의 역사를 찾는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한국 불교의 얼굴을 잃어가고 있다. 잃어버린 얼굴을 찾는 일이다. 문화 아니면 정서일 수도 있다. 기능이나 유용성이 아니라 순수한 종으로서의 역할이다.
세계는 열려 있고 문명 간의 접촉이 잦으면 잦을수록 원형이라는 종으로서의 역할은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팔만대장경도 정보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판본이라는 원판이 가지는 의미는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세계적이다. 특히, 이번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의 지정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건물은 물론 전통이나 관습 속에서도 시간의 때가 묻어 있다. 우리가 의식하던 못하던 간에 종으로서의 정보는 소중한 재산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데에는 역사적인 전통도 짐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진행은 직선적이지만은 않다. 순환하면서 진행하는 것이다. 또한 순환의 재충전이 없이는 역사의 원동력이 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