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땅의 완주는 노령산맥의 힘찬 기운을 타고 기라성 같은 큰명산들이 장관을 잇는 곳이다. 동편으로 운장산 서편으로 미륵산, 남편으로 모악산, 북편으로 계룡산이 자리잡고 있으니 말이다.
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비봉행 완행버스로 시간 반을 달리면 내월리2구에 다다른다. 봉황새가 알을 품고있다는 명당의 터에 옥토끼가 달을 보는 형국이라는 비봉면 내월리는 선비의 기개를 닮은 대나무가 곳곳에서 숲을 이루고 있다.
사월 초순의 이 남녘 땅은 봄이 한창이다. 대지로부터 뿜어져 오르는 푸르름으로 생기 도는 나무며, 피어나는 잎과 꽃에 부서져내리는 햇살은 그대로 가봄의 노래이다.
이제 막 닦인 ‘신작로’를 따라 한참 걸어들어가다 다리를 지나면 수봉산 밑에 한가롭게 자리한, 규모는 작으나 고즈넉한 맵시가 눈길을 끄는 초막이 나온다. 집 바로 뒤켠으로는 푸른 대숲이 울창하고 정결하게 손질된 앞뜰엔 석탑이 고풍스런 멋을 더하는 이곳은 비록 그 틀은 속가(俗家)이나 간데없는 청정도량이다. 지금으로부터 56년전, 별이 쏟아지는 밤, 뇌성벽력과 함께 뜰에 홍련(紅蓮)두 송이가 피어났다 하여 동리 사람들은 절도 아닌 이 초막을 ‘홍련암’이라 부른다-요즘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렇듯 예사롭지않은 일을 가까이서 접한 것을 이 동리 사람들은 퍽 소중히 여기는 터이다.
이 집은 대선(大善)스님이 태어난 속세의 고향집이되 지금은 스님께서 불법을 전하며 정진하는 도량으로 삼고 있다. 스님을 뵈러 떠나올 때 해인사 선방 스님들로부터 “눈이 십리 밖까지 비추는” “괴팍한” “선방 큰스님”인 동시에 “완주 도인”이라는 등 이곳 대선스님에 관하여 귀동냥을 한 터라, 감히 범접하기 힘든 큰스님을 뵙는다는 일로 자못 설레임이 일기까지 하였다.
구석구석까지 깔끔하게 정돈된 뜰이 환히 내다보이는, 놓인 물건 하나 없어 더욱 정갈한 자그마한 방으로 안내되어 가까운 산에 가신 스님을 기다렸다. 산에서 신라시대 가람터를 둘러보고 오신다며 여섯자 길이의 지팡이를 짚고 돌아오신 스님은 과연 홍안에 푸른 광채를 띤 눈빛이 맑은 선승의 풍모이다. 짙은 눈썹 때문인가, 웃음없이 엄격한 얼굴이지만 너그러워 보이는 것은. 그것은 선승이면서도 마을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에서 우러나온 친애심이 아닐까 싶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어 지르는 듯한 거침없는 그 말씀들은 마주한 이로 하여금 묘한 이끌림으로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스님은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우려 깊은 지적으로 말씀을 시작하였다.
“참중생은 사라진 듯해. 내 어릴 땐 도승 곁에서 환희심 내며 오로지 천하에서 중 노릇 제일로 잘할 생각뿐이었는데…어느 때부터인가 절집안에 시시비비가 생겨났어. 이런 상태에서 도인 나기는 어렵지. 하지만 숨어 공부하는 승려들이 있어서 그들 덕분에 불조(佛祖)의 법맥이 이어지는 게야.”
오늘날에 승려들이 수행하기 어려운 까닭으로 스님은 시대적 상황을 꼽는다. 서구 문물의 범람이며 소비 풍조의 만연, 그리고 개인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성향들이 이 시대의 조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기울어진 가치관이 세상을 어지럽힐수록 법력있는 스님의 출현이 더욱 절실하며, 그렇기 때문에 공부에 전념하는 수행자가 더더욱 늘어나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신미생인 스님은 올해로 법랍 만30년을 맞았다. 이곳 내월리의 마을 어른들은 스님의 어릴 적 모습을 ‘세상에서 더 배울 것이 없는 천재’로 묘사한다. 아직 출가하기 전이던 그 어린 시절의 일화 한 토막을 듣는다. 그 무렵에도 기독교는 교세가 안 미치는 곳이 없었으니 완주군 고을고을을 누비며 부흥회를 열고 있었다. 한 부흥회에서 목사가 열을 토하는 설교를 한창 진행하고 있던 중에 열살 가량의 한 소년이 손을 번쩍 들어 질문을 한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는 하나님은 왜 우리 인간을 불확실한 존재로 만들었읍니까? 결국 우리는 신의 부속물이고 노리개밖에 되지 않습니까?” 나어린 소년의 당돌하나 앞뒤가 딱 맞는 이 질문에 목사는 야유를 받으며 연단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 중학 1년 때, 스님은 금강경 서문에 매료되면서 불교에 심취한다. 일제의 밑에 있던 그 무렵에 학문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인생과 철학을 논하는 동안에 작고 작은 깨우침을 얻기 시작하였다.
열아홉의 나이로 출가하여 계룡산 갑사에 든 때가 1958년으로 정화 때였다. 스님은 처음 입산하여 염불외며 공양주하던 그 시절의 발심을 최고로 꼽는다. 살림이 변변치 못한 사찰에서 죽으로 연명하고 새벽부터 밤늦도록 청소와 공양주로 일하면서도, 밤마다 잠을 쫓느라 다리를 꼬집어가며 “그렇지, 그렇지. 이게 내 복이다”를 연발하고는 표현 못할 기쁨으로 춘성스님 시봉 들던 그 무렵 말이다.
갑사 위의 북사자암에서 삼년 동안 불 안 땐 방에서 온 몸이 언 채로 화두잡고 참선에 열중한 뒤에, 서울의 도봉산에 있는 망월사에서는 암천일동안 솔잎, 쌀가루, 콩가루만으로 생식을 하였다. 이제까지 그 흔한 감기 한번, 잔병치레 한번 앓은 적이 없이 가운찬 건강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때의 생식 덕분이라 한다.
뒤에 스님은 대중 처소를 원해. 해인사에 머물었다. 고향처럼 푸근하게 스님을 맞아주던 해인사에서 스님은 철두철미한 선 수행을 할 수 있었다.
“해인사에 있을 때 선방 수좌들 사이에서 ‘독재자’로 불렸지. 스님들을 틀어쥐고 철저할 것을 채근했거든. 중다운 중이 되자는 뜻에서였어. 도반들 공부 잘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었지.”
“자존심이 강해야 수행도 잘할 수 있어. 즉 나 보란 듯한 정신이 있어야해. 상(像)이 생겨도 후에 수행을 거치면서 승화되거든. 공부에 전념하면서 지금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수행에 임해야 하지. 비록 천일기도나 육년면벽 수행의 각오는 못 낼지언정 한철 수행만큼은 잘 지켜야 공부하는 승려라 할 수 있지 않겠어.”
삼십여 년 동안 수행해 오신 ‘선’에 관하여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느냐고 여쭈었더니 “잘모른다”고 말씀한다. 그 말속에 담긴 깊고 깊은 뜻을 어찌 알 수 있으랴마는 문득 선가귀감의 첫머리가 떠오른다. 깨달음이란 본디 정해진 것이 아니며, 선이란 알거나 모르거나 깨우쳐서 이해할 수 있는 바 아님을 가리키신 말씀이라 여겨진다.
선은 평생을 두고해도 학교 공부의 성적표처럼 뚜렷한 결과가 나오는게 아니다. 이에 스님은 스스로를 솔직하게 반성해보고 한 생각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것만이 최우선의 길임을 이르신다.
“승려들이 절집에 오래 살아도 모르는게 많아 종단이 중생의 대변처가 아닌, 감투 싸움하는 곳이 되곤 하는 몰지각함을 드러내는 것도 권위만 내세우느라 중생 구제는 안중에도 없어서이지. 이판과 사판이 엄격히 분리되어 일하는 승려, 공부하는 승려가 명확해야 우리 불교가 역사 속에서 제 역할을 담당할 게 아닌가? 자질 있는 승려는 유학을 보내어 공부에 깊이와 폭을 더하게 하고, 또 승가대 같은 경우는 인가를 받아내어 정규 학교로 만들어서 공부하려는 승려들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어야하지 않겠어.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 절로 존경지심을 갖게 하는, 그런 공부하는 스님, 일 잘하는스님들이 나와야만 해.”
스님은 이판과 사판이 저마다 제 역할을 분명히 해내는 중생불교를 강조한다.
“수행하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먼저 하심(下心)을 해야겠어. 자비를 말만하지 말고 하나라도 실천궁행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야.”
“또 하나 승려에게도 소중한 것은 의리와 지조라고 생각해. 이것은 계율이상의 것이며 근본 바탕이지. 승과 속을 가릴 것 없이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바로 지조에 있지 않겠어.”
그러한 생각에 연유히여 스님의 법문에는 동양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삼국지’의 관운장이 왕왕 등장한다. 제 군주이자 의형인 유비에 대한 충심 하나로 죽을지언정 조조의 부하는 아니되겠노라며 적토마만 받던 관운장의,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는 지조와 의리를 대선스님은 무척 아낀다.
십여 년 전, 산사에서 수행에 전념하여 득도하신 스님은 그때에 얻은 가슴 뿌듯한 희열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계룡산 찾아갈 제 걸음걸음 눈물이라
3년을 하루 같이 명산을 바라보며 스님을 시봉했네
도봉산 돌고돌아 높고높은 춘성선사
40년 동안 그 밑에서 마음달을 희롱하며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두다 바치었네
천년 전 원효성사 터좋다고 찬탄한 곳
천진하신 도천선사 오래오래 머무신 곳
그 속에서 무심으로 무자탑을 갈고 갈며
눈 덮인 대둔산에 원만한 보름달이 중천에 솟았더라.
그 이름도 유명한 합천의 해인사에
팔만장경 맴돌면서 3년을 소일했네
지나간 20여년 허송세월 생각하면
후회막급하지만은
그래도 불법 만나 정법 속에 뛰어들어
눈 밝은 명안종사 훈훈한 휘하에서
산 정신을 고이고이 뼈 속 깊이 간직했네
이제라도 슬금슬금 부지런히 닦아가면
머지않아 타성일편 나타나서
패침망찬 할 지경에 활연히 깨달아서
일 없는 대선당이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며
일체처 일체경에 하나도 걸림없이
어릴 적 그때마다 기탄없이 벌거벗고
어화둥둥 춤을 추며 태평가를 부를 걸세
어화둥둥 달동네의 복많은 보살들아
언제부터 닦았길래 그리도 잘하는가
요덕사 번성할 때 큰 스님 모셔놓고 설법듣던 보살들아
아-아 다시 묻지 않아도 삼생인연이 분명하구나.
스님의 하루 일과는 새벽 세시 예불로부터 비롯된다. 미명의 어둠을 가르며 한시간 반쯤 걸려 진행되는 새벽 법회에는 마을 신도 스무명쯤이 동참한다. 십리 밖의 먼 길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도 여럿이다. 그보다 놀라운 일은 신도들이 날마다 삼천배를 올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불과 서너 시간밖에 되지않는다는 사실이다. 과연 스님의 말씀처럼 이곳 내월리는 불지촌(佛地村)인 듯하다.
“이백년 전만 해도 이 마을에는 일곱개의 크고 작은 암자와 함께 요덕사라는 대가람이 있었지.그 정기를 이어받아서인지 오십호 남짓한 이 마을의 주민들은 내가 이 곳에 머물면서부터 다시 모여 신행에 열심을 쏟고 있지.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호남지역은 유난히 불교가 열세에 있어. 이러한 땅에서 불법을 세워 크게 일으키는 게 내 할 바라는 사명감이 요즘은 절실하게 느껴져. 그래서 그런 뜻을 펼치나갈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내년쯤엔 이곳에다 절을 잘 지을 원력을 세웠지.”
종합 총림은 아니어도 세상의 흐름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사찰을 건립하려는 원을 세웠다 한다. 스님의 사찰 건립의 계획에서 조금 두드러진 점은, 다른 사찰들은 대체로 수련대회 차 오는 학생들을 썩 달가와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에서, 바로 그런 어리고 젊은 학생 불자들이 언제든지 친숙하게 달려와 머물 곳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학생들을 위한 법회뿐만이 아니라 유치원도 반드시 운영할 계획이지. 지금도 이 집에서 한 사십명쯤 되는 어린이를 모아 법회를 보고 있는데, 이들이 성장하여 불법을 통해 진리를 실천하는 ‘참 인간’ 이 되었으면 하는것이 내 바램이야. 내가 지금도 선방에만 앉아 있다면 반대할 이야기겠지만, 정말 우리 불교계에서 청소년회관이니 유치원 같은 것을 건립하는 것이 시급해.”
대선스님은 이 초막에다 자그마한 법당을 마련하여 놓고 어린이법회뿐만 아니라 초하루, 보름, 관음재일에 각각 법회를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법문을 들려주고 있다. 한편 초사흘에는 신도들이 업장 녹아드는 듯한 환희심 속에서 용맹정진을 하고 있다.
홍련암에서 오백미터 거리에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다. 마을 주민의 애경사에 제 일 마냥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보살도를 그리는 ‘중생불교’가 그와 다름없음을 느낀다고 한다.
“교회가 생기는 것을 보고 적대감정이 들기보다는 나 공부하라고 자극을 주는 것 같아 오히려 좋게 생각들더구만. 불교는 그들처럼 끈질기고 적극적인 기질을 기르지 못해서 안 되는 일도 되게 하겠다는 노력 따위는 엄두도 못 내. 중생을 위해 목척을 세워놓고 정진해도 모자랄 이 마당이 아닌가.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 반성할 점이 많다고 느껴져.”
스님의 하루 일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일은 고추, 배추 같은 채소밭 가꾸는 일이다. 홍련암 뒤편에 있는 작은 터밭에는 스님의 정성이 거름이 되어 갖가지 채소들이 싱싱하게 자란다. 앞으로 불사가 이루어지면 농토를 장만하여 약초 따위를 심고 가꿀 계획이란다. 일하는 절, 생산하는 터전을 가꾸어 자급자족의 생활공간을 이루고, 특히 현대병에 걸려 몸아픈 신도들이 노동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것도 구상하고 있다. 이러한 불사를 계획하고 있는 이즈음을 스님은 스스로 수행 생활에서의 새로운 전기로 짚고 있다.
“재발심이 중요하지. 초발심에 못지않게 소중한 기회거든. 초발심에 세운 서원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경우에는 새로운 계기를 포착해서 수행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터인데,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아. 그래서도 더구나 이 가람 건립의 불사를 잘 실현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지.”
단주를 돌리며 새삼 서원을 다지시는 스님께 요즘의 한국불교신앙의 특정인 기복화에 대해서 여쭈었다.
“초심자는 불공으로부되 불교를 시작하는 법이지. 이게 바로 조선땅 불자들의 매력이 아닌가. 신도들이 내게 사주를 보아달라 하면 서슴없이 보이주지. 그것 자체를 저질이라고 제쳐놓을 수는 없어. 낮은 단계에서부터 치츰차츰 신앙의 수준은 변화하기 때문이지.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나가 부지런함과 자비심이 드디어 결합할 때 흔들림없는 단단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라네.”
스님은 일흔여섯 되신 노모(이 미륵자)를 봉양하며 수행한다. “오로지 이웃에게 즐겨 베푸시며 살아오신, 덕 많은 어머니로부터 시봉을 받는 셈인지라 생전 효도 한번 못해 부끄럽다”며 겸손해하나, 실상은 스님의 효행은 비몽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큰스님과 함께 생활하는 까닭에 언제나 마음이 풍요롭다”고 말씀하시는 노보살님의 잔잔한 인상에서 존경스러운 수행인이면서 또한 슬하의 자식이기도 한 아들에 대한 자상한 마음씀씀이가 그대로 전해 온다.
속가 시절 스님은 삿갓시인 김병연의 일생을 깊은 감동으로 받아들어 형식화된 세상을 풍자한 김삿갓의 시를 다 외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송강 정 철의 한평생 삶이 마음에 인을 새긴다고 한다. 공인일 때는 철저하게 나랏 사람으로서, 자연인일 때는 또한 철저하게 자연인으로서 모습을 나투었던 송강 정 철이기 때문이란다.
이 곳 완주는 고승 대덕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걸림없는 선풍으로 뛰어난 경허스님의 고향인 동시에 석가불의 후신이라 불리는 진묵선사가 노모를 모시고 평생을 사셨던 곳이기도 하다.
“입산 당시엔 천풍납자가 되고자 했지. 지금은 공부에만 열중한 탓에 덕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어 중생 제도를 위한 덕을 키워야지. 이(理)와 사(事)를 겸비해야 대중교회에 나설 수 있지 않겠어?”
스님의 법음을 접하고 보니 스님은 결코 ‘선’ 만 하는 선승이 아니었다. 한국불교의 현실에 죽비를 내려치시며 어느 날엔가는 스러져가는 선풍을 진작시킬 ‘도’를 아는 ‘선승’인 것이다.
실다운 용맹정진과 대중포교를 함께 강조하던 스님은 동리 밖 버스길까지 자상하게 배웅해 주셨다. 길목에서 합장올리는 마을 주민들에게 넉넉한 미소와 함께 합장 나누시는 대선스님은 이곳 내월리의 불지촌에서 뭇중생을 너른 가슴으로 품어 안는 ‘우리 스님’임을 가슴 버겁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