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보게, 스님과 함께 가는 저 젊은이는 누군가?”
“자넨 아직 못 들었는가? 보양(寶壞)스님이 진(晋)나라에 유학해서 선(禪)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데리고 온 용왕의 아들이라네.”
“그래. 어찌 그를 여기까지 데려오게 되었단 말인가?”
“글쎄 스님이 서해에서 용왕을 만났다네. 용왕은 스님을 궁으로 모셔가서 불경을 청하여 외게 했다네. 그리곤 고급 비단 가사 한 벌을 선물하면서 자기 아들을 데려가 작갑(鵲岬)에다 절을 짓고 거기서 머물라고 했네. 그러면 적병도 피할 수 있고, 몇 해 안되어 반드시 부처님의 법을 보호하는 어진 이가 나타나 삼국의 난세를 평정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면서 아들인 이목(璃目)을 스님에게 딸려 보냈다지, 아마.”
“스님의 법력은 용왕도 알아보는가 보네 그려. 그런데, 삼국을 향성할 임금이 나타날 거라니 무슨 말인가? 그건.”
“글쎄 어찌 될지. 갈수록 세금은 무거워지는데 도적떼는 활개를 치고, 여기저기서 호족들이 세력 확장한다고 들고 일어나 혈안인 판이고, 관리는 관리대로 자기 주머니만 채우기에 급급하고, 백성은 백성대로 도탄에 허덕이고…. 이래서야 도무지 사람 사는 것 같은가. 이 어지러운 세상이 오래 갈 수야 없을 게지.”
“쉬-잇, 누가 듣겠네. 이 사람, 그런 소리 함부로 하다간 목숨부지도 못하려고. 시절이 어지러우면 검은 걸 검다 해도 무거운 죄가 되는 법 아니던가. 그건 그렇고, 작갑이라니? 지난 난리중에 이미 5작갑(大鵲岬 •小鵲岬 •所寶岬 •天門岬 •嘉西岬)이 모두 파괴되지 않았던가.”
“글쎄 그랬지. 난리틈에 다섯 갑사(岬寺)가 모두 없어졌는데, 스님이 북쪽 고갯 마루에 올라 살펴보니 누런 5층탑이 눈에 띄었다고 하네. 그래 내려가 찾아보니 아무런 자취도 없고 까치〔鵲〕만 가득 모여 땅을 쪼고 있기에 언뜻 작갑이란 말을 생각해내고는 그 자리를 파 보았다네.”
“그래 그 속에 무엇이 있었다던가.”
“옛 벽돌이 무수히 나왔다네. 그것으로 다시 세운 절이 지금 보양스님께서 이목을 데리고 기거하고 계신 작갑사라네.”
2
신라는 이미 사양 길을 걷고 있었다. 안으로는 육두품 세력, 반신라적 저항등이 줄을 이었고, 밖으로는 지방 호족세력과 도적떼들이 출몰, 할거하던 후삼국의 그 혼란기. 게다가 큰 가뭄까지 겹친다.
“이대로 죽을 작정인가. 어떻게 기우제라도 한번 지내도록 하세.”
“그게 좋겠네. 논밭 작물들이 다 타붙고 있네. 이러다간 우리까지도 가물들어 죽겠네. 동네 우물이 마른지도 벌써 며칠짼가.”
“그럼세. 기우제를 지내 보세.”
“괜한 짓이야. 다 니라가 어지러운 탓이지.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정치가 문란하니 하늘이 벌 낸 게지.”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팔짱만 끼고 앉아 죽기만 기다릴 텐가.”
“아 좋은 수가 있네. 일단 보양(寶壞) 큰스님께 한번 가 보세.”
“옳지. 우리가 진작 왜 그 생각을 못했던가. 늘 우리 농사꾼들 편에 서서 우리의 어려움을 염려해 주시는 분이니 분명 좋은 방책이 있을 걸세.”
우루루 몰려가는 농민들의 시든 어깨마다엔 생기가 한 줌씩 피어 오른다.
“큰스님!”
“아니, 어인 일로 이렇게 모두…”
“큰스님, 도저히 안되겠옵니다. 연일 불볕 더위는 기승을 부리는데, 도무지 비올 가망이라곤 아니 보입니다. 논밭 전지가 다 타붙고 있읍니다.”
“스님,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굶어 죽고 말라죽을 것입니다. 스님의 법력으로 기우제라도 지내 주십시오. 스님, 물을 주십시오.”
“알겠소. 그렇잖아도 걱정하고 있었소. 하지만, 하늘에 비는 것보다 먼저 우리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되지 않겠소.”
“무슨 묘책이라도 있으신지요, 스님.”
“이목연(李木淵)을 틉시다. 어떻소?”
“스님, 그렇게 되면 나라에서 야단이 날걸요. 중앙에 있는 윗분들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지금껏 그토록 진정을 했는데도 아니된 일이 아닙니까”
“이보다 더 중대한 공공 복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이오. 뒷일은 내가 책임지리다. 걱정 말고 돌아가시오.”
“그럼, 저희는 스님만 믿겠습니다.”
스님은 이목을 부른다.
“이목아 네가 이 일을 해주어야겠다.”
잠시 후, 이목연의 못물이 고을의 가뭄을 흠씬 적셔낸다. 시들어가던 농작물과 백성들은 풍성한 생명수로 기쁨과 고마움에 겨워 눈물을 훔친다.
그러나 곧, 이 사실은 왕궁에까지 알려지고.
“아니, 나라의 저수지인 이목연의 물을 누가 감히 마음대로 헐었단 말인가.”
“이목이란 자가 범인인 줄 아뢰옵니다.”
“저런 발칙한 자가 있나. 냉큼 잡아 참형토록 하라.”
3
“보양스님!”
“누구요? 누구길래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요.”
“관에서 왔소. 국법을 어긴 죄인, 이목을 당장 내놓으시오.”
“이 무슨 소란인가. 난리라도 났소.”
“여러 소리 말고 죄인 이목을 빨리 찾아내시오.”
“국법을 어긴 죄인이라… 그래 대체 국법이란 무엇에 쓰는 거요. 국법이라면 마땅히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하거늘, 목말라 신음하는 백성에게 나라의 물을 나누었기로 그것이 범법에 해당된다 말이오. 아무리 저수지 가득히 물을 채워 두더라도 기갈로 죽어가는 백성에게 쓰이지 않을진대 어찌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할 것이며 또, 하늘이 어찌 그를 용납하겠는가. 국법이란 것이 곧, 다스리는 자들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한 것이어서야 어찌 되겠는가.”
“우리는 한낱 나졸일 뿐이오. 우리 더러 그런 설교해도 소용 없소.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오. 우리는 그런 것 모르오.”
“그 무슨 가당찮짧은 말이오. 위에서 시킨다는 핑계 하나로 자신의 양심과 인간으로서의 도리까지를 벗어던지다니…. 그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말단의 나졸이라 하나, 그러한 자각조차 없이 어찌 나라의 녹을 먹을 것이며 또한 대낮의 하늘 아래 바로 설 수 있단 말가.”
“스님!
……”
“……”
“저기 배나무〔梨木〕가 있네. 그러고들 있지 말고 그만 가서 일 보게나.”
고개를 떨구고 서있던 나졸들은 스님이 가리키는 그 나무〔梨木〕를 베고 돌아가 이목을 참형했노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4
“여보게, 이번에(고려 태조 20년,937년) 나랏님께서 작갑사를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賜額)하고 논밭 500결(結)을 헌납하셨다며?”
“잘된 일이야. 그럴 만도 하지. 몇해 전 이서산성(伊西山城)에 숨어 있던 교묘한 도적떼를 잡을 수 있도록 나랏님께 계책을 알려준 공로도 있지 않나.”
“그뿐인가 어디. 그 혼란하던 시절에 이미 삼국통일의 위업을 예견하지 않으셨던가.”
“게다가 스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 분이지. 예전 그 극심한 가물에 나라법까지 어겨가면서 우리 농사꾼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지 않으셨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