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사람들, 특히 스리랑카 여성들에게 십이월 보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날은 아라한과(果)를 얻은 테리 상가미타 비구니가 보리수를 가지고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온 날이기 때문이다.
상가미타는 인도 아쇼카 왕의 딸로서, 아라한 테리 마하 마힌다의 동생이기도 하다. 기원전 삼세기에 스리랑카에 비구니 교단을 세운 상가미타 비구니는 스리랑카 여성의 도덕적이며 정신적 고양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스리랑카의 한 문헌에 따르면, 인도의 아쇼카 왕과 스리량카의 데바남피야 티사 왕은 서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아쇼카 왕의 아들 마하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도착하기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티사 왕은 사신을 보내 귀한 물건들을 아쇼카 왕에게 선물했고, 아쇼카 왕도 다음의 서신을 동봉하여 선물과 함께 사신들을 보낸 일이 있다.
나는 부처님과 그분의 말씀(담마)과 승단(상가)에 귀의했읍니다. 나는 스스로 부처님의 일반 제자라고 자처합니다. 티사 왕께서도 이 최상의 보석인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시기 바랍나다.
마하 마힌다 존자의 스리랑카 입국
그리하여 마하 마힌다 존자가 스리랑카에 오게 되었다. 마힌다 존자는 아라한 모갈리푸타 티사와 승단으로부터 스리랑카에 불법을 펼 것을 권고받고, 다섯 사람의 아라한과 일반 제자 한 사람과 함께 스리랑카의 미사카 언덕에 거주하여 불법을 폈다. 미사카 언덕은 현재 스리랑카의 미힌탈이라는 곳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아누라다프라시(市)에서 동쪽으로 팔 마일 떨어져 있는데, 해돋이가 장관이며 아누라다프라를 굽어보고 있다.
이 중요한 임무를 띤 사절단의 도착, 티사 왕과 그들의 만남, 그리고 추종자 사만 명과 함께 티사 왕이 어떻게 이 새로운 신앙인 불교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이야기가 고대 기록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236년 뒤의 유월 십오일, 불교는 스리랑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에 마하 마힌다 존자와 아라한 비구들은 승단을 창설했고, 그리하여 불법이 스리랑카에 퍼지게 된 것이다. 마하 마힌다 존자는 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평민 모두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고 깨우쳤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삼보에 귀의하게 되었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그들에게 마힌다 존자가 들려준 법문은 전대미문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한 황족의 부인 아눌라는 오백 사람의 여시종들과 함께 마하 마힌다 존자의 설법을 듣곤 하였다. 수행과 믿음이 깊어지면서 아눌라는 마힌다 존자에게 수계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 때 스리랑카에는 비구니 승단이 없었으므로, 마힌다 존자는 승가의 규율에 따라 여성들이 승단에 입문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 허락은 오직 부처님이나 비구니 승단이 결정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하 마힌다 존자는 티사 왕에게 인도에 사절단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곧, 인도에 있는 여동생 상가미타 비구니로 하여금 이 요구를 받아줄 것을 승인 받아 스리랑카에 비구니 승단을 설립하자고 했다.
상가미타 비구니의 스리랑카 도착
티사 왕은 기꺼이 응했다. 즉시 아쇼카 왕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마하 마힌다 존자와 티사 왕 자신의 바램을 알렸다. 사신에게서 전갈을 받은 아쇼카 왕은 아들 마하 마힌다에 이어 딸까지 또 떠나보내야 하자 몹시 상심했다고 한다. 아쇼카 왕은 물론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이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모든 애착을 없앤 완전한 아라한은 아니었기에, 딸을 떠나보내지 않으려 한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었으리라. 그러나 상가미타는 오빠 마힌다 존자가 왜 그러한 청을 했는지, 그 이유들을 설명하며 아쇼카 왕을 위로했다. 상가미타가 스리랑카로 떠나는 것은 스리랑카에 비구니 승단을 설립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게다가 스리랑카의 국민들, 특히 여성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결국 아쇼카 왕은 상가미타가 스리랑카에 가도록 허락했고, 마힌다 존자가 요청한 대로 어련 보리수를 가져가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그 보리수에서 떼어낸 어린 보리수를 가지고 상가미타는 열한 사람의 아라한 비구니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떠났다. 많은 불교 경전을 보면 이것이 대단한 의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가미타 비구니는 탐랄리프리라는 항구에서 스리랑카로 떠났다. 아쇼카 왕은 딸이 탄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깊은 상념에 잠겨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상가미타 비구니 일행을 실은 배는 이레 뒤에 스리랑카 북부의 잠부콜라 항구에 도착했다. 티사 왕은 깊은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경이심으로 어린 보리수를 맞아 큰 행사와 함께 마하메가 정원에 보리수를 심었다. 지금 한창 무성한 그 나무에 수백만 신도가 찾아와 경배하고 있는데, 그 보리수는 기록에 남은 나무로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이 나무로부터 자라난 보리수들이 스리랑카의 여러 곳곳에 심겨졌는데, 그 가운데에는 다른 나라에 퍼져간 것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많은 신자들이 보리수 밑에서 경의와 존경을 표하는 것은 그저 나무에 향한 것이 아니라 보리수가 상징하는 것, 곧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위대한 부처님께 향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리수는 곧 깨달음을 상징한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것과 대보리수의 어린 나무를 아누라다푸라에 심은 두가지 사실은 스리랑카 비구니 승단사(史)에 있어 가장 성스런 계기였으며, 그 이야기는 깊은 감동을 준다. 실론1)의 작가들과 역사가들은(대부분 외국인들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을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데, 그 이야기들은 아주 생생하고 감격적이다.
상가미타 비구니는 그 도시에 비구니 사원을 만들었다. 성대한 행사와 함께 보리수를 심는 일을 마치고 아눌라와 오백 사람의 여시종들은 계를 받았고, 아라한 테리 상가미타의 지도 아래 비구니 승단이 창립되었다. 그렇게 설립된 비구니 승단은 스리랑카에서 몇 세기 동안 번성하였다. 스리랑카의 비구니들은 중국에도 건너가 포교 활동을 하여, 기원 후 429년에는 중국에 비구니 승단을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활발한 활동을 했다.
상가미타 비구니는 왕녀 아눌라 및 다른 왕족이나 신분이 높은 여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계를 주었다. 그래서 모든 계층의 여인들이 승단에 입문하게 되었다.
일찌기 역사상 유래없이 여성의 능력과 고귀한 성품을 인정하시고 여성에게 평안과 청정, 고결한 길을 일러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상가미타 비구니는 힘 닿는 대로 상층과 하층의 모든 여성들을 고양시키려 했고, 스리랑카 여성의 도덕적 수준을 비롯하여 지적, 영적 수준을 높이려고 지치지 않는 대담한 용기를 가지고 헌신적으로 일했다.
마힌다 존자와 상가미타 존자의 열반
상가미타 비구니는 성품이 덕성스럽고 고귀했다. 자비심과 성실함, 또 헌신적인 봉사로써 스리랑카 국민들의 칭송을 받은 상가미타 비구니는 오빠 마하 마힌다 존자와 더불어 스리랑카 역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상 마하 마힌다와 상가미타처럼 오빠와 동생이 그처럼 깊은 신심으로 해외에서 봉사하여 원대한 결과를 가져온 보기는 찾아볼 수 없다.
티사 왕은 사십 년 동안 스리랑카를 통치하고, 마하 마힌다와 상가미타 존자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났다.
마하 마힌다 존자는 팔십 년의 생애를 이 아름다운 작은섬의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일하며 보냈다. 티사 왕의 뒤를 이은 우티야 왕은 마하마힌다 존자의 장례식을 장엄하게 거행했다. 화장한 뒤에 존자의 사리를 모신 탑이 여러 군데에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 한 탑은 마힌다 존자가 오랫동안 살았던 미힌탈에 세워졌다. 그리고 상가미타 존자는 그 다음해에 아름다운 하탈하카 사원에서 일혼아홉살의 나이로 열반했다. 상가미타 존자의 장례식도 우티야 왕에 의해 보리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 위대한 성자들은 이제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그분들이 해 놓은 일을 통해 그분들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들의 명성은 우리의 기억에 언제까지나 남을 것이고, 스리랑카의 국민들은 이 위대한 존재들에게 언제까지나 감사의 마음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숱한 순례자들이 미힌탈 성지를 참배하기 위해 바위산의 천팔백사십 계단을 오르고 있다. 미힌탈, 일찌기 그 위대한 두 존자가 법을 펴고 스리랑카의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종교적 삶을 살았던 그 성지를 향해.
주 註
1) 실론Ceylon : 스리랑카Sri Lanka의 이전 이름. l972년, 스리 랑카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