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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간신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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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진철승 1988년 05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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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적 미륵신앙은 ‘민간신앙화’와 ‘변혁사상화’의 양면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양자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즉 민간신앙화되어 민중 삶의 저변을 관류하지 않은 미륵신앙은 절대 변혁사상으로 전화되지 못한다. 또 변혁사상으로 전화되지 못한 채 민간신앙의 저수지에 머물고 있는 미륵신앙은 민중 삶의 질적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이와같은 미륵신앙은 불교 전래 이후 지금까지 면면히 반도 민중의 삶과 더불어 흘러왔다. 민간신앙화된 미륵신앙은 전회에서 살펴보았으므로 변동기에 있어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초로 기능해 왔던 미륵신앙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삼국 시대의 민중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지배권력의 프리즘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미륵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미륵이 지닌 본래적 혁명성이나 동력을 주체적으로 소화해 내지 못한 채 국가적 신앙체계에 강제적으로 편입당할 수밖에 없었다. 익산 미륵사를 중심으로 전개된 백제의 미륵 불국신앙, 미륵과 화랑을 동일시하며 호국•호왕의 정치적 도구로 전개된 신라의 미륵신앙이 모두 이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 통일 후 화랑을 구심점으로 한 정신체계와 행동체계는 급속히 타락하기 시작한다. 외세에의 종속에 시발점이 된 신라의 삼국통일은 지배 권력의 부패 타락, 민중 억압으로 이어지면서 민중의 한과 소망을 받아낼 새로운 틀을 예비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진표(眞表)의 미륵사상이다. 진표는 이러한 새로운 민중층의 욕구를 반영하면서 금산사,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 등의 세 사찰을 건립하여 새롭게 미륵불교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권선징악과 엄격한 참회 및 용화세계의 현세적 실현에 대한 멸망을 중심으로 펼쳐진 일대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 구백제권 민중들의 증대하는 불만과 져항을 무마하기 위해 지배권력이 허용한 신앙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처럼 통일신라 중반 이후 민중들은 미륵신앙을 지배자의 수중에서 자신들의 생활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는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신라 하대의 폭발적인 미륵신앙운동을 야기하는 토대가 되었다. 신라말, 소위 후삼국시대의 미륵운동은 후백제의 진훤(견훤)과 태봉의 궁예로 대표된다.
진훤은 후백제를 일으키면서 미륵의 화신을 자처하여 많은 민중을 동원하였다. 이는 신라 말기 지배층의 부패와 가렴주구에 대한 전체 민중의 분노를 대변하는 정치투쟁이면서, 동시에 망국의 설움을 되씹으면서 미륵신앙으로 인고의 나날을 감수해 온 백제 유민들의 반란이었다. 그는 금산사 미륵이 바로 자신이며, 후백제야말로 미륵 용화세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삼국 중 가장 강력했던 후백제는 내분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궁예는 신라 왕족이면서도 권력투쟁에 의해 어려서부터 도피생활을 하다가 입산하여 선종(善宗)이라는 법명의 중이 된다. 그는 장성하여, 극심한 사회의 혼란에 따라 발생한 도둑떼 중 양길의 휘하로 들어간다. 이후, 궁예는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태봉국을 세운다. 초기에는 관제를 개편하고 세력을 넓히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고 부르며 괴이한 행적을 보인다. 결국 궁예는 왕건에 의해 제거되고, 고구려 부흥의 꿈도 용화세계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진훤이나 궁예나 모두 통일신라 중기 이후 형성된 민중적 미륵신앙의 물줄기를 입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민중은 미륵이라는 명칭의 또 다른 지배자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민중은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진훤과 궁예는 민중적 열망의 중심을 잘못 파악함으로써 중세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안으로부터 스스로 패배하고 만 것이다. 이는 단순히 궁예나 진훤의 패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적 미륵신앙이 패배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 중세적 봉건 지배의 변주곡인 왕건의 고려가 성립되는 것이다. 결국 민중은 또 다시 그 혁명적 열기를 삭힌 채 봉건 지배의 터널로 끌려가고 만다.
2)고려 시대를 불교가 가장 찬란하게 꽃피웠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왕권불교, 귀족불교, 관학불교를 역사의 중심으로 보았을 때나 가능한 일면적 진단일 뿐이다. 실제 민중들의 삶의 조건과 불교신앙은 전혀 다르게 진전되고 있었다. 특히 미륵신앙은 그 혁명적 내용이 냉동된 채 보다 기층의 민간신앙으로 전화되고 있었다.
화려하게 진행되는 궁중의 불교의식이나 이론불교와 달리 민중은 돌을 쪼고 갈아 미륵불상을 만들며 새로운 세계에의 열망을 다지고 있었다. 또 고려 중엽 각종 정변과 외침을 겪으면서 부처님 입멸 후 정법 •상법시대가 끝나고 말법시대가 시작되는 해라는 민중적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륵석상의 하체를 땅 속에 묻어 미륵이 지중(地中)에서 솟아나 현실세계로 해방시켜 주길 갈구했다. 게다가 전회에서 말했듯이 사불(祀佛) 단체였던 향도(香徒)가 고려말에 이를수록 민중 주체의 미륵신앙으로 전화되고 있었다.
이처럼 기층으로 전수되던 미륵신앙은 고려말 지배질서의 와해와 더불어 역사의 표면에 등장한다. 먼저 사승•요승으로도, 혁명가로도 평가되는 신돈이 이 미륵신앙을 활용하고 있다. 신돈은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면서 미륵석상이 땅속에서 솟아오르게 하는 이적을 보임으로써 대중의 신뢰를 얻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의 사실 유무를 떠나 당시 미륵신앙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또 우왕 때에는 스스로 미륵의 화신이라 하면서 무리를 짓거나 반란을 꾀하다가 참살된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중 경남 고성의 이금(伊金)은 미륵을 자칭하며 무리를 모으자 수많은 사람이 재물을 바쳤으며 무당까지도 당집을 철거하고 그를 부처와 같이 숭앙했다. 더구나 수많은 무리가 이에 부화뇌동하여 이금의 제자를 자칭하며 서로 속이고, 이금이 이르는 곳마다 주•군의 수령들도 나와 맞으며 환대하였다. 심지어는 판사 양원격(陽元格)도 이금의 설을 신봉할 정도였다. 이에 도당(都堂)에서 명을 내려 그 무리를 모두 체포 처단하였다.
고려말의 이와 같은 미륵신앙은 신라말의 미륵운동과 달리, 정치권력의 획득까지 포함하는 변혁운동적 성격이 많이 약화된 채로 나타난다. 이는 통일신라와 고려에 일관되는 미륵신앙의 혁명성을 제거하고 기복적 신앙으로 변질시킨 지배자들의 책략 탓이기도 하다. 미륵의 혁명성은 냉동된 채 실제적인 신앙의 중심은 무속과 결합되어 보다 기본적이고 수호신적인 형태로 기층화된다.


3) 이조의 숭유억불정책은 불교 전반에 걸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 타격은 고려의 호사스런 불교와 승단이 입은 것이었을 뿐 민중의 신앙은 단절없이 전승되었다. 민중은 머리가 잘려진 불상에 아무 돌멩이나 얹어 놓음으로써 소박한 신앙의 세계를 지켰다. 또 판석(板石)에 희미하게 미륵상을 조성하여 인가가 없는 산기슭이나 구석진 곳에 모시고 치성을 드렸다.
미륵신앙은 이처럼 민간신앙화되지만 그 혁명적 활력은 죽지 않고 계속 역사의 지층을 두드리고 있다. 임진 •병자의 양단 후 급격한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미륵은 여러 모습으로 출현한다. 때로는 직접적인 하생미륵으로, 때로는 정감록과 결부되어 진인(眞人)의 모습으로, 때로는 신종교 교주의 모습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먼저 미륵하생신앙이 변란(變亂)의 형태로 출현한 것으로는 숙종조 미륵반란 사건을 들 수 있다. 숙종 때의 승려 이환은 칠성님에서 나라를 주겠다는 언약을 받고는 용녀(龍女) 부인인 원향을 얻어 아들을 낳고자 하였다. 여환과 그 동조자들은 ‘석가 대는 진(盡)하고 미륵 대가 오며, 세간에도 역시 다른 대가 온다’라는 밀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경치도 양주에 무리를 모아 관아를 습격하고 이어 한양으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지도층의 전략적 실수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억불의 조선조에도 일관되게 기층 대중들이 미륵을 신앙하고 있었으며, 그의 탄생에 의해 이루어질 새로운 해방세계를 꿈꾸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 미륵신앙은 미륵의 ‘미래 출현’과 ‘해방세계의 실현’이라는 속성으로 인하여 민중 사이에 유포되고 있던 참언이나 미인, 진인, 도인, 아기장수 설화 등과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민중의 소망을 담은 ‘정감록’이나 ‘남조선사상’ 등으로 집약되어 이조 후기 각종 민란이나 변란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대중 동원의 방편이 되었던 것이다. 가장 비근한 예가 홍경래난이라고 불리우는 관서농민전쟁이다. 홍경래 등은 변란의 명분을 진인설에 가탁하였으며, 변란을 일으킨 것은 진인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미륵신앙이 변란 내지 농민전쟁의 배후 사상•역할을 한 사례로는 동학도의 선운사 미륵비결 탈취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는 ‘선운사 미륵의 배꼽 속에 있는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망국(亡國) 참언에 따라 동학도가 그 비결을 꺼내자 관아에서 동학도를 탄압한 사건이다. 그 이후 이 사건은 날개 달린 듯 소문이 번졌으며, 동학도는 잡혀간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수만의 군중을 동원, 관에 압력을 넣었다. 이는 동학도의 최초의 대중동원훈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미륵에 의한 세계 해방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가를 증명해 준다.

미륵은 석가모니의 완성이며 혁명의 완성이다. 그 완성을 위하여 봉건제하 기층 대중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봉건제의 계급 모순을 부수기 위한 사상적 기초로 작용했던 미륵신앙은 오늘날 단지 흐릿한 잔영만을 드리우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미륵에 대한 ‘관점’ 의 혁명이 없이는 다시 미륵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 변혁사상으로 기능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미륵은 미륵이되 미륵이 아니다. 오늘날의 미륵은 미륵의 자기혁명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