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년이 다 되가는 일이다. 당시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는 아주 특별한 불화가 전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관세음보살님을 생전에 언제 다시 친견하겠냐싶어 통도사로 향했고, 나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었다. 그 불화가 바로 일본 가가미진자(鏡神社)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불화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수월관음도 인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지 무려 600년만에 일이고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고려불화가 세계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4미터가 넘는 규모의 불화는 처음이어서 이 작품을 대하면 아름다움에 놀라고, 큰 크기에 압도된다. 현재 많은 부분이 손상되면서 네 면이 좀 잘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원래는 5미터가 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5미터가 넘는 길이와 2.5미터에 육박하는 폭의 비단이 한폭으로 짜였다는 것 역시 작품성은 차치하고라도 충분히 놀랄만한 것이기도 하다.
수월관음도는 선재동자가 보살도을 배우기 위해 53선지식을 차례로 친견한다는 내용의 『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때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과의 조우를 그린 그림이 바로 수월관음도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있는 그대로(自在)만 관(觀)하신다는 보살’에게 세상의 삼라만상이 단지 물 위에 뜬 달그림자라는 것을 현상세계에만 매달려 있는 중생들에게 알려주시는 보살이 바로 수월관음의 의미이다.(물론 수월관음의 의미는 이보다는 좀더 복합적이기 하지만) 그러므로 수월관음도은 현실 속 고통에 빠진 중생들이 일체의 고액(苦厄)을 단숨에 건너고자 하는 기원으로부터 그려진 것이다.
이 불화의 기록(畵記)은 손상되고, 다시 수복하는 과정에서 없어졌지만 1812년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라는 사람이 쓴 \'측량일기\'(測量日記)에 의하면 지대(至大) 3년(1310)에 숙비(충선왕의 비)가 발원해 김우문(金祐文)ㆍ이계(李桂)ㆍ임순(林順) 등이 그린 것이다. 또한 내용 중에 1391년 일본 승려료켄(良賢)이 지금의 가가미신사에 진상했다는 기진명(寄進銘)이 있어 이 불화의 발원자와 화사, 또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일부 사연을 알 수 있다. 1391년이면 고려말 조선초 매우 혼란 시기로 왜구들이 우리 땅에 창궐하여 백성들이 나라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시기였으므로 아마도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전달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때 많은 고려불화가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 불화도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수월관음도가 그려진 1310년 즈음 고려의 사정은 매우 딱하였다. 충선왕의 아버지 충렬왕대 이후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즈음으로 충선왕은 고려와 원 왕실의 첫 번째 혼혈왕이었던 것이다. 숙비 김씨는 원래 충렬왕비인 숙창원비(淑昌院妃)였으나, 1308년 충렬왕 사후 충선왕비가 되어 숙비(淑妃)로 호칭이 바뀌었다. 숙비 김씨는 몽골군과 함께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1218년 몽골과 형제맹약을 주도한 명신 김취려(金就礪)의 증손녀였다. 충렬왕비가 되기 전에 이미 명문가 출신인 김씨는 처음 진사 최문(崔文)과 결혼하고, 사별 후 충렬왕 비가 된 것이다. 충렬왕의 사후 충선왕은 김씨를 간통하고 다시 비로 삼았으니 정치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은 풍운의 여인이다. 충선왕은 1307년 복위 한 후에도 근 5년을 원나라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고려에 남아 있던 숙비 김씨는 권력이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 시기 그려진 것이 이 수월관음도인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던 숙빈이었지만 기구한 개인사와 자신에 대한 세간의 손가락질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고 번뇌 속의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체의 고액을 단숨에 뛰어넘게 해 주신다는 이 수월관음보살은 숙빈김씨에게 과연 안식과 구원이 되었을까.
미술사를 공부하다보면 내우외환과 혼란 속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통해 태어난 작품들이 현대에 와서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늘 나에게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현정 님은 상명대학교에서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였으며 석가여래 설법도상 연구로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와 한국미술사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