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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중세의 질곡이 부른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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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 - 종안┃해인사승가대학 강사 2013년 12월 382호

중세유럽에 있어서 유일하게 철학다운 주제로 알려진 ‘보편논쟁’의 핵심은 ‘신학논쟁’으로 표상되는 스콜라철학의 반대진영 사이의 권력다툼이라 할 수 있다. 즉, 스콜라신학은 고대 그리스 플라톤철학에 의거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기반한 도미니크 수도회의 대결로 치달았고, 그 대표적 인물로는 St. Bonaventura(1221-1271)와 St. Thomas Aquinas(1225-1274)가 있다. 오랜 다툼 끝에, 아퀴나스는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을 채택하여 “계시啓示신학이 반드시 반反이성적인 것은 아니다”고 주장함으로써 신앙faith과 이성reason의 조화를 꾀하였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정통신학이 되었다. 신에 대한 이해와 존재증명에 있어서 반드시 신앙이나 계시의 도움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우리의 이성과 경험에 기초하여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먼저 존재와 존재증명은 본질적으로 무연無緣이며 상호 독립적 관계이어서, 말하자면, 아무리 위대한 존재증명도 사소한 먼지티끌 하나 만들어내는 과정은 아니다. 다만 계시를 통한, 즉 신의 자유의지를 통한, 존재의 시작과 끝 혹은 부각浮刻은 우리 이성의 영역은 아닐지라도 그 존재의 가능성에 관한 이성적 판단과 경험적 체험을 통한 “자연주의”적 타당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고, 결국 (중세)보편논쟁과 스콜라신학은 William of Ockham(1285-1349)에 이르러 끝을 맺고 휴지기에 든다. 오컴은 ‘자연신학’을 더욱 밀어붙여 이성과 계시는 별개의 독립된 체계로서 서로 간섭 없이 양립할 수 있어야만 하고, 따라서, 신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며 신앙에 강제 받지 않는 ‘신 존재증명’이 허락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른 말로, 신의 “계시적” 실존은 차치하고서, 사실상 신앙에 위배될지는 모르지만 신 존재증명에 관한 어떤 이성적 시도도 모두 그 타당성에 의문이 들며 존재증명은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더구나, 오컴에 따르면, 보편논쟁의 ‘보편자’는 실재가 아니며 기껏해야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보편논쟁의 대부분은 언어사용에 대한 잘못된 습관이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기능은 크게 의미(meaning, signification)와 지시(reference, supposition)로 나누어지는데, 의미란 소리나 글자로 주어진 단어—예컨대 ‘ㄱ·ㅏ·ㅁ·ㅈ·ㅏ’ 혹은 ‘p·o·t·a·t·o’—와 그것에 해당하는 사물과의 연계를 형성하고 이해하게 하는 “마음 속” 개념concept을 말하고, 지시는 그러한 단어들이 문장 안에서 지칭하는 바를 일컫는데, 예컨대 ‘이 감자는 달다’ 혹은 ‘저 아이들은 키가 크다’에서, 곧 그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감자와 아이들을 지칭referring하는 것이다. 보편자에 해당하는 보통명사는 따라서 개념의미를 나타내며 결코 지시대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한다. 예컨대 오컴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연장선 위에 서서, 여러 개별자(소크라테스, 이순신, 피카소 등)를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표시할 때 각 개별자가 보편자로서의 ‘사람’이라는 본질을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즉 they agree not in-essence) 그들 개별자의 통칭인 언어적 개념으로서의 의미를 나눠 갖는 것(즉 they agree by-concept)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주장된 바, 존재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는 설명이라면, 설명에 필요한 존재설정에 있어서 간편한 쪽을 또는 인색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그 이론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오컴은 “가능한 한 존재설정은 인색하여야 한다[principle of parsimony]”고 주장하는데, 흔히 오컴의 면도칼(Occam’s razor)이라 부르는 존재가정의 철학적 원칙이다. 즉, 언어적 통찰을 통해 보편논쟁에 임한 결과로써 ‘보편자와 같은 존재는 “없다”’는 것을 증명을 한 것이 아니라 “없어도 되는” 존재임을 증명한 셈이다. 언어분석을 통한 철학적 문제해결은 오컴만이 아니라 고대 철학에서도 그리고 현대철학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언어 때문에 얽힌 철학적 혼돈에 통찰과 혜안을 끊임없이 던져주어 왔다. 오컴 면도칼의 유용성이 면면히 이어져 온 만큼 또한 그 반대급부인 철학적 혼돈도—특히 존재론적 혼돈—면면히 이어져 온 게 사실이다. 20세기 미국철학자 콰인Quine은 이를 두고 “오컴의 면도날을 둔탁하게 만드는 플라톤의 수염 Plato’s beard, frequently dulling the edge of Occam’s razor”(From a Logical Point of View, p.2)이라고 풍자하였다. 불교에서는, 아마도 용수의 ‘중관논리’가 극단의 오컴 면도칼임에 틀림없을 터이다.
오컴을 끝으로 중세 스콜라철학은 데카르트(1596-1650)가 시효가 되는 근세철학이 시작될 때까지 약 3세기동안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오래도록 철학은 없었다. 대신에 중세는 근세를 향해 박차를 가하면서 사회전반에 걸쳐 다른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흔히 ‘Renaissance(Re-birth)’라 불리는 시기가 그것이며 대략 14-16세기에 걸쳐 나타난 고전 인문학의 부흥과 새로운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을 그 시대적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신성 대신에 인성을, 교황 대신에 루터와 칼뱅을, 천동설 대신에 지동설을 선호하며 전과 후를 격렬히 단절시켜 변화된 시대정신을 추구한 르네상스는 굳이 철학을 필요로 한 시기도 아니었다.
새롭게 등장한 시대정신의 단초는 14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났다. 십자군의 회군 후, 로마와 이탈리아 각지에서 일어난 신흥자본주의 세력의 등장, 해외에서 발견한 그리스 고전문화에 대한 동경, 원정遠征을 통한 지리상의 발견과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이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치면서 중세 봉건주의의 낙후된 사고와 삶의 방식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이탈리아에는 새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특히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와 같은 도시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자본과 영주의 ‘자치권’을 맞바꾸어 권위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전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인간과 자연의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는데, “신도 인간처럼 표현되던” 그리스 문학과 예술에 특별히 매료되어 문예부흥의 시기를 즐기게 된다. 그렇게 신보다 인간이 역사 원동력의 중심이 되는 휴머니즘이 탄생하게 된다. 곧이어 르네상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영국 등으로 내달았다. 아직은 이탈리아만큼 세련되지 못한 거기서, 아직은 교회와 영주와 기사들이 거리낌 없이 득세하고 있는 거기서, 갓 수입된 ‘문예부흥’은 사회비판의 문학 장르가 되었다. 기사와 영주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교회와 교황을 우롱하면서 제목은 신을 찬양한다는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룰 수 없는 낙원을 그리며 당시의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영국 사회를 시사하며 냉소하였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그리고《햄릿》등도 다분히 비현실적 낭만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사회와 인간본성의 슬픈 구석을 지적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본divinity주의가 아닌 인본humanity주의가 켜켜이 담겨 있는 그 작품들에 우리는 언제까지라도 경의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인본주의를 잉태한 르네상스는 당연히 종교에서도 개혁을 요구하였다. 교황과 교회가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착취와 부패로 얼룩지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면죄부를 반대하는 95가지 이유를 적어 교회 벽에 걸었다. 핵심은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며 또한 교황과 신부들이 아니라 성서에 따른 신앙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 따라서, 면죄부는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교황의 눈 밖에 난 루터는 피난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라틴어 성서를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 평민들도 성서를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당연히 가난한 농민들과 평민들은 ‘루터파’ 신교도Protestants가 되어 교황과 교회세력의 구교도Catholics에 대항하게 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도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종교개혁을 이끌었고, 그 후 개혁의 시대정신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각 지역으로 옮겨 붙었다. 이제 신·구교 간의 종교전쟁은 필연이 되었다. 오랜 싸움 끝에, 특히 잔인한 ‘30년 전쟁(1618-1648)’을 겪고서, 신교도들도 결국 종교 선택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르네상스를 가장 르네상스답게 정의한 분야는—즉, 고전부흥의 기치로 내건 인간이성의 가치를 가장 빛나게 한, 그래서 계몽의 근세를 앞당기는데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분야는—역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과 갈릴레이(1564-1642)의 ‘실험정신’이었다. 르네상스의 과학주의scientism는 고대 그리스 밀레투스Miletus 학파로부터 21세기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인 바로 그 과학정신이다. 과학은 이제 인류를 정의하는 가장 훌륭한 종차種差가 될 터이다!

* 연재를 마칩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머잖아 다시 인연되길 바랍니다. 宗眼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