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나는 엄마따라 절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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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사성
1988년 05월 75호
쌀 몇 됫박, 450원짜리 양초 두어 자루, 그리고 온 식구 성명 석자 등재할 수 있는 연등값 5천원. 초저녁부터 늘어진 곤한 잠이 이들 준비물들을 챙기는 소리에 깨어나다가 “자거라, 아직 더 많이 자야한다”는 주술에 따라 다시 엎어진다. 그렇게 챙긴 준비물들을 보자기에 싸들고 엄마는 도심 변두리의 조그만 절을 찾아가 억만의 욕심을 기원한다. 수없는 구복의 절로 스스로 굴복(?)의 쾌감을 갖고 아픈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들은 무슨 일일까?
성(聖)과 속(俗). 속인인 엄마와 성직의 세계에 사는 절 집안 사람들.
무릇 종교라고 불리어지는 모든 믿음들은 비겁한 행위이며 약한 자의 약삭빠른 재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지어 버린 지 오래인 나에게 초파일 엄마의 절 나들이는 무엇인가? 지금의 나와 도대체 이어지지 않는 이 과거의 단상들은 결국 단상으로 그쳐야만 하는 것일까.
엄마는 분명 많은 바램들을 안고 절을 찾는다. 그 바램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세계가 부처님의 세계라 믿기 때문이다. 속세의 갈등을 가진 엄마는 욕망의 주체로서 미완성의 대자(對者)이다. 그 욕망과 불만을 부처님을 통해서 해소하려 하므로 부처님은 엄마의 즉자(卽者)이다. 미완성의 대자존재인 엄마는 바램을 가진 가능성의 존재로서, 절을 찾게 되는 대상인 부처님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려 한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은 곧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요, 그래서 누구나 사람 안에 부처님이 있다는 것이고 누구나 “성불하십시요”라고 합장하는 것이다.
엄마와 부처님.
성과 속. 대자존재와 즉자존재.
나는 자꾸 싸르트르를 생각하고 있다. 서양철학에서 인식과 존재의 벽을 통쾌하게 뛰어넘었다는 싸르트르식의 실존철학이 엄마와 부처님, 아니 철저한 세속 사람인 나와 부처님이 관계하는 장(場)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회통(會通)이라는 말은 본래 서로 상반되는 두 견해를 서로 소통시켜 하나의 뜻으로 귀결시킨디는 불교 용어인데 이 말이 서양철학의 변증과 논리와 같다고 생각된다. 이러다 보니 ‘나는 나의 의식이요 나의 의식은 언제나 나의 존재를 확보하려는 의욕이다’ 라고 말한 싸르트르의 실존철학이 계속 생각난다. 대자로서의 나의 의식존재는 대상(부처님)에다 스스로를 투사하여 즉자의 내 존재를 확보하려 한다. 그래서 의식은 항상 무엇에로의 의식, 즉 지향성의 의식이다.
지금 갑자기 뭔가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이시다. 사월 초파일, 그 좋은 날씨에 혼자서 절에 가선 어머니는 그냥 혼자 가신게 아니라 수십년이 지난 오늘의 내손을 잡고 절로 가셨다. 그 어머니가 방금 스쳐지나간 것이다. 그 가시는 방향이 곧 내 의식의 지향이요 가신 그곳이 내가 의식해야 할 바로 그 ‘무엇’이다. 내가 확보하고자 의욕하는 즉자의 대상이요 또한 미래의 나요 가능의 나로서의 내 존재인 부처님이시다.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붙이고 싶지 않은 일상을 살면서내 속에서 말라가는 재대로 된 삶을 속여 왔다. 그러다보니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다라고 느끼게 되고 뭔가를 찾으려고 꾀를 짜내게 된다. 그런데 그런 꾀들조차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다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비단 나만의 변명은 아닐 것이다. 아침 여덟시 전에 집에서 나와 해지고 저녁 아홉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일상 속에서 꾀를 짜내봐야 그게 그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나같은 사람이 저 스스로 알아서 부처님 찾아오도록 기다리지 말고 여기 이런 것이 있다고 광고좀 해주면 안되는가 하는 것이다. 대학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온 지 한 삼년되고 결혼할 때도 되었고, 돈도 모아야 하고 집안도 거들어야 하는 나같은 사람들의 목마름을 부처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갈증하는 나는 내가 채워야 할 존재를 한잔의 불 속에 통채로 투사하면서 그 속에 밀착된 방식으로 거처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물)은 나의 밖에 있는 여러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나와 대면하고 내가 그 속에 거처하는 나의 세계로 승격되기를 갈망한다. 절은 대자인 나와 즉자인 부처님이 공존하고 또 대자인 인간 존재가 회통으로 관계하는 변증법적 장소이며 나는 나 자신의 종교적, 역사적 지평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상황이 존재를 규정해 버리게 되는 먹고 사는 어쩔 수 없는 일상에서 존재가 사람을 창출해내는 일상을 살고 싶다. 즉자이신 부처님, 나는 목마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