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균여대사(均如大師) (上)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가람의 향기 - 시명 1988년 05월 75호
대체로 9세기부터 정치 세력이 분열하고 사회가 혼란했던 신라 하대 (下代)에 걸쳐서 들어온 선(禪)은 지방 토호 세력과 함께 성장한 새로운 불교 종파로서 그때까지 화엄, 법상(法相), 법성(法性), 율종(律宗) 등의 기존 불교 종파가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신라 사회에서 새롭게 대두된 불교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조류는 급작스러운 변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번쇄적이고 학문 중심적인 귀족 불교로부터 신라 통일이후 혜공•원효대사와 같은 선각자 들에 의해서 점차로 시도되기 시작한 민중 불교의 기치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그 사회적 지반이 마련되어 왔었다. 또한 불교의 제 여건도 중앙집권적 성격에서 차츰 지방의 사찰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 예로 신라 하대, 민애왕에서 경문왕까지 거의 30년간이나 국사(國師)를 지낸 봉림산문(鳳林山門)의 개조(開祖) 원감국사(圓鑑國師)는 지방 사찰인 혜목산 고달원에서 만년을 보내었으며 또한 그는 최초의 선종 출신의 국사였다. 이후 국사를 지낸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범일국사(梵日國師)나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무렴(無染)국사 역시 선종 출신이며 그들 역시 지방 사원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따라서 800년대 이후 신라 불교는 선종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며 그 당시 중앙이던 경주를 벗어나 있었으므로 경주를 중심으로 하던 귀족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이처럼 선종은 자연스럽게 지방 호족 세력의 복전(福田)이 되었으며, 그 이후 고려 광종(光宗) 때까지 그 영향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체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선종의 교리는 사제간에 직접적으로 심인(心印)을 전수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선종의 경향은 중국의 오랜 사회 윤리인 군신, 부자 등의 수직적 질서를 수용함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선종은 철저한 계승 관계를 유지시키는 종파불교(宗派佛敎)를 낳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9세기 말부터 중앙집권층이 타락하여 혼란한 틈을 타서 지방 호족들이 결속하던 시기에, 그 인맥을 강조한 종파불교를 독립적으로 성립시킨 선종은 각기 아홉 개의 산문(山門)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당나라 말부터 일어난 남종선(南宗禪)의 입장과 일치하는데, 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나라 선의 특색이 남종선의 특색으로 규정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지방 호족과 함께 강렬한 인맥을 형성해 온 선종이 새로운 불교종파로써 불교사에 확실한 획을 긋기 시작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화엄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이미 지난 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선종과 화엄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대체로 불교의 교화사상은 그 어느 것이든 선종을 지반으로 하여 성립되고 또한 비판되면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중국에서 선이 종파로서 독립한 후 화엄의 종장(宗匠)으로서 최초로 선종과 관련을 맺은 사람은 나조 청량정관(淸凉燈觀)이다. 그는 우두선사(牛頭禪師)의 선을 받아들여 뒤에 하택종(苛澤宗)의 무명선사(無明禪師)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그 뒤를 이은 규봉종밀(圭峰宗密)은 더 나아가 선교일치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적 토양 속에서 이미 선종의 선적 체험이 요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엄과 선의 유착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만이 아니라 화엄철학의 고도한 이론을 근거로 하여 선의 실천이 꽃필 수밖에 없는 상의(相依)의 관계로 이해하여야할 것이다. 9세기경의 선승들은 대부분 의상 계열에서 선종으로 전향하였으며 또한 처음에는 출가하여 화엄교학을 익힌 다음 선종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불교 지식을 위해 화엄학을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이러한 신라말 불교의 상황에서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신라가 패망한 근본적인 원인을 훈요십조에서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불교가 지방으로 분산함에 따라 지나치게 종권 경쟁을 하였고 종파가 난립하였으며 또한 그것을 정치 세력으로 이용한 지방 호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인하여 중앙 집권층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 태조는 분산된 불교 세력을 포섭하고 선종과 교종의 범위를 유지시키는 대신 호국 불교로 국교화하여 사상계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 이후 광종 때에 이르러서는 승과(僧科)를 통한 승계 확립 등으로 중앙 집권적 입장에서 불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태조 왕건의 복전이었던 화엄종 북악파의 거두 화랑대사 이후 선종이 우세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화엄종을 선양하고 이를 주도적 종파로 등장시켰던 데에는 북악파 출신인 균여대사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균여대사가 해인사에 주석했는지의 여부를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사상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가 해인사를 중심으로 했던 북악파의 계승자라는 사실은 그가 해인사에서 주석했는지의 여부보다도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균여대사의 전기(傳記)는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장경 보판(補板) 중에서 혁연정 (赫連挺)이 편찬한 석화엄교 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圖圓通鈔)의 부록에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이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 이 전기에 의하면 균여대사의 속성(俗姓)은 변(邊)씨이며 위 (譯)는 균여이다. 그의 부친의 이름은 환성(煥性)이며 일찌기 화엄경에 달통하였고 그의 형선균(善均)도 승려였으며 누이 수명(秀明)도 비구니로서 법화경을 탐독하였다. 이와 같이 균여대사의 집안에는 승려가 많은 셈이었다.
균여대사는 서기 923년 태조 6년에 황주(黃州)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주로 활동한 시기는 광종 때였다. 그는 형 선균의 권유로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화상에게 출가하였으며 뒤에 식현화상의 허락을 받고 그 당시 화엄종의 대가인 영통사(靈通寺)의 의순(義順)화상에게서 화엄사상을 공부하게 된다.
의순화상은 그 행적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희랑대사의 뒤를 이어 북악파의 정통한 화엄학을 계승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훗날 균여대사의 행적에서 그가 희랑대사의 법을 이었음을 술회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는 균여대사의 학문적인 측면과 저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