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작, TV부처(TV Buddha), 설치, 48 × 51 × 34 cm, 2002년,지난 호에서 감상했던 명대 대표적인 선화가 석도石濤의 화론은 이렇게 시작한다.“태초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었다. 태고적 본질(본성)은 흩어지는 바가 없다. 이 본성이 한번 움직이면서 비로소 법이 생겨난다. 그 법이란 것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바로 한 획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획一劃은 모든 사물의 근본이고, 만상의 뿌리이다. 이것은 마음의 작용으로 드러나지만 사람 안에 꼭 감춰져 있어 세인들은 그를 알지 못한다.(太古無法, 太朴不散, 太朴一散, 而法立矣. 法於何立? 立於一劃. 一劃者, 衆有之本, 萬相之根, 見用於神, 藏用於人, 而世人不知.)”
석도의 화론은 마치 태초 우주의 원리를 이야기 하듯이 거창하다. 석도가 이야기 한 태고무법이나 태박太朴은 아마 주역에서 이야기 하는 무극無極 이전, 기운마저 존재하지 않았던 태역(太易, 열자列子의 개념)의 시점과 비슷할 것이다. 석도의 이론을 따라가 보자면 우주의 시작점으로부터 기운이 한번 동해 생겨난 것이 한 획이라고 하였으니 그의 세상은 선線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붓은 선線을, 종이는 면을 만든다. 선과 면이 만난 2차원에서 3차원의 공간이 생기고, 작가가 만든 3차원의 공간에서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 만나 소통할 수 있으니 이것이 4차원이 아닌가 싶다.“대게 그림이란 것은 마음을 따른다.(夫畵者, 從于心者也.)”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마음이 자유자재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원래 4년 전 이 연재를 시작할 땐 이렇게 거창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전 해인지를 통해 이미 5년에 걸쳐 나조차 잘 모르는 선이나 선화이야기를 하였더니 내용이 애매하기 짝이 없다는 열혈 독자(부모님)의 원성과 함께 나 역시 아쉬운 바가 많았는데 마침 종현스님께서 지면을 주셔서 다시 한번 정리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나름 한껏 힘을 빼고 글을 쉽게 쓰자하였는데, 이번 역시 선禪 그림도 쉽질 않았다.
이제까지 선화는 개념과 구분조차 모호하고, 엄격한 잣대로 구분하기에 선화 작품은 숫적으로 열세다 보니 나 같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활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학술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또 부끄러운 내 글의 수준에도 불구하고 편수로는 근 100편, 햇수로는 10년, 선화에 대한 고민을 한 달에 한 번씩은 했다는 사실이 내심 스스로 대견하다. 처음 시작할 땐 무식
이 용감하다고 뭘 좀 아는 줄 알고 대들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대목도 적잖다. 결국 대견한 건 내 생각일 뿐이고 선이나 그림이나 제대로 감상은 했던 것인지, 어두운 눈을 하고는 여러 독자들 손까지 함께 잡고 길을 나섰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한 이래로 그림은 그린 이의 마음을 전달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해왔다. 그것이 붓을 잡은 이의 감정이든, 뜻(意)이든 결국 그림을 채우고 있는 형상들은 마음 속에 담아두지 못해 넘쳐난 것이다. 보통은 가장 쉽게 말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 실은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또 있을까마는 말 역시 오해를 낳는다.
말이 그러한데, 그림은 더욱 더 큰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한 획은 이미 마음 속에 담겨 있었고, 마음이 움직이면서 그림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그림이 말보다 더 잘 이해될 수 있겠다. 그것이 선사들이 그림을 통해 선지를 드러내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동안 그림 속 수 많은 획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오늘도 우리네 삶은 달마스님의 면벽수행보다 지극하게 티비 앞에 묶여 있다.
그동안“선과 그림”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