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좁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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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강종훈
1988년 05월 75호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각 시대마다 그 의식의 흐름은 시간적, 공간적 상황 속에서 보편타당하게 전개되어 왔다. 그래서 그 시대의 의식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니라 다수 국민의 요구에 의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므로, 그 시대의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서양의 신본주의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각한다는 것은 최악이었다. 인간의 외지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직 신의 축복 속에 그가 예정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점차 인간은 문학이나 예술을 통하여 창조자적 전능을 맛보게 되어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인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각하려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창조적 가능성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인간중심의 인본주의로까지 역사의식의 과감한 대전환을 가져왔다. 이처럼 그 시대의 의식은 일순간에 일어나는 욕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욕구가 오랫동안 축적되어 이루어진 대중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란 확실하게 규정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사는 우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장식해야 하느냐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앞서 간 선각자들의 진부한 유물을 그대로 사용하느냐 아니면 현재에 맞도록 새로운 사고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중이 의식의 전환을 갈구할 때 이루어지므로 대중을 외면하고서는 사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종교는 이러한 대중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 불타께서 출현할 당시 인도 종교 사상계의 풍토는 다원적인 사상이 난무하여 대중들이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었다. 대중의 입장에 서서 이끌어 주는 사상가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직 부처님만이 대중의 입장에 서서, 대중과 불타는 둘이 아니라는 획기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펴신 것이다. 대중을 외면한 사상이란 한낱 피상적 관념이며 혹세무민의 현혹에 불과한 것이다. 대중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대중에 대한 배반이며, 더구나 중생 구제는 허황된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지나온 한국 불교를 돌이켜 보면, 호국불교라는 미명 아래 권력에 야합한 채 대중의 고통을 외면하여, 중생 개인의 고뇌를 더욱 가중시켜왔던 것이 사실이다. 대승불교의 보살도는 민중을 구제함에 있다. 그러나 과연 불교가 대중의 편에 서 왔던가. 삼국시대 불교를 오늘날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대중의 현장에서 그들과 동체함으로써 이 민족에 불교를 토착화시켰기 때문이다. 불타께서는 해탈 후 그 자비의 눈길을 대중에게 돌리셨으므로 그 위대함이 일컬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는 대중의 자각을 촉구한 인류 역사의 사건 중에서도 대사건인 것이다. 당시 불타는, 브라만은 유전적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에 의해서만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소수의 지배적 승려 계급으로부터 벗어나서 보통 사람으로서의 대중 계급으로 구체적인 인간상을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교단내의 의식, 계율까지도 가장 앞서서 적극적으로 현실에 부합하도록 하였다. 불교는 어느 종교보다도 권력이나 국가에 결합하기가 부적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현재는 불타의 근본 가르침에 역행하는 면이 너무많다 고려와 조선 후기의 불교는 그 종교적 타락함이 극에 달했다. 종교가 타락할 때 대중은 절대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대중이 없는 불교는 생각해 볼 수도 없다. 이에 반하여 불과 100년 정도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경우, 구교와 신교 모두 사회적인 업적이나 대중 의식에 있어 비교적 큰 공헌을 해왔다. 그들은 현실에 눈을 돌려 대중을 더욱 깊이 이해하였으며, 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노래하고 괴로워하였다. 또한 대중의 의식을 리드하여 인간존엄성을 인식케 함으로써 비인간화에 대해 거부하고 투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불타 사상의 근본은 스스로의 자각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분위기만을 만들어 놓았다고 불교가 할일이 끝난 것은 아니고,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몇년 전 정부와 많은 투쟁이 있었던 월남의 불교 대중화 운동은 결국 패망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그 방법적인 면에서도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그 정신만은 불국정토를 이루려는 불자들의 진실한 노력이었다.
한국의 불교가 이제까지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것은, 확고한 근본 이념이 성립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이념을 왜곡되게 이해했거나 또는 이념을 실천하는 데 너무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아서, 오늘의 불교가 나아갈 길을 바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불교는 은둔적이거나 도피적인 종교가 아니며, 어느 종교보다 현실 참여 사상이 강열한 종교이다. 또한 불교는 어느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세대의 것이 아니며 더우기 승려의 전유물은 결코 될 수 없다. 불교는 바로 중생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승가는 이 시대의 모든 계층에 눈을 돌려야 한다. 지금 세계는 힘있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밝은 미래를 갈구하며 꿈틀거리고 있다. 이러한 시대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종교는 시대의 존재성에 눈 떠 그 요구하는 바를 바르게 이끌어내야 한다. 우리는 뭉쳐서 무한한 힘을 내어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불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무지하게 사용하면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사상있는 힘, 이념있는 힘이 필요한데 이것은 오직 불타의 사상으로 바탕이된 힘, 불타의 사상을 가진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민족은 불교에 의해서 사고했고 불교에 의해서 생활해왔다. 우리의 민족 문화의 뿌리가 불교 문화에 있음은 새삼 논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민족 문화의 회복은 곧 불교문화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족 문화를 회복하여 그 맥을 현대의 민족적 사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민족적 사상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외래 문물의 유입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요사이 논란되고 있는 준선진국의 사상 고갈내지 인간성 상실은, 스스로의 사상 정립이 없는 상태에서 외부 문물을 유입함으로 빚어진 가치 기준의 혼돈과 부조화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인류의 비극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중생에서 비극이 온다. 비인간화가 만연하는 사회에서는 물질의 양적 축적이나 힘의 축적이 특정한 계층으로 치우치기 쉽다. 요사이 신식민지주의, 신계급주의라고 일컬어지는 것에서 나타나는 무력적 경향은 인류를 또다시 계급 사회로 이끌지 모른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과 사회를 구출해야 할 입무가 우리 불교인에게는 있다. 스스로 깨달은 지혜를 인간 평등주의로 이끌어 냄으로써 외부의 어떠한 무력에도 굴하지 않을 힘을 축적하여, 참다운 인간성과 정의로움이 더 이상 그늘에 가려있을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불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외부의 무력을 배제해야 한다. 힘의 사용은 지배를 낳으며 그 지배는 자신의 모든 것이 요구대로 움직여 주길 바란다.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힘으로 지배하는 국가는 일방적인 요구를 강요한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로 믿음에 대한 강요는 그릇된 믿음이나 맹신을 낳곤 한다 가장 자유적인 선택으로 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불교는 시대적인 의식의 흐름을 자각하여 자연 발생적인 시대의 요구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내재적인 힘을 길러야 하며 그 힘은 불타사상의 근본을 바탕으로 하는 사상있는 힘, 이념있는 힘이어야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은 이러한 내재적 힘으로 대중의 고뇌를 철저하게 규명하여, 이를 해결하는 것이다. 대중의 고뇌와 등진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으며, 역으로 말해 깨달음이 있으면 대중의 고뇌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좁은 소켠으로는 이 시대에 필요한, 그것도 진정으로 필요한 불교가 되어야겠다. 이제 우리는 물질의 풍요가 안겨 준 대중의 상처를 나의 아픔으로 체험하는 보살정신이 가장 절실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