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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보리도량 주지 오성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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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3년 10월 380호

사방이 들판이며 바다인 제주도, 그곳에도 도심은 있고 그 도심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어 제주시 한복판엔 보리도량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늘 발 닿을 수 있는 곳에 절이 있었으면 하는 신도들의 청에 의해, 제주의 들판에서 살던 오성 스님은 2년 전 도심 포교당인 보리도량을 꾸렸다. 밖에서 보기엔 대도시의 도심 포교당과 다르지 않게 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으나 안에 들어서니 법당이라기보다는 세련된 갤러리 같기도 아늑한 카페 같기도 하다. 모두 오성 스님과 신도들이 손수 만든 것이다. 천에 일일이 먹물을 들여 벽에 바르고 나무를 깎아 천장을 만들고 등을 만들어 달고 크기도 모습도 단출한 부처님을 모시니 누구라도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 되었다.
“절을 만들어 놓고 사람을 세운 게 아니라 사람들의 요구가 무르익어서 그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만들 때는 힘들었지만 손수 만들었으니 시간이 갈수록 애정이 깊지요.”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지만 고민도 전혀 없다. 무르익어서 만들어진 곳이니 만큼 모든 것이 자연스레 평안하게 흘러간다. 오성 스님은 절 살림과는 무관히 신도들과 함께 일 년에 두 번 백일기도를 하고 경전 공부를 하고 강의를 하며 지낼 뿐이다. 상담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보리도량 신도들은 모두 자기 고민을 상담한단다.
“가족이 아프니 천도재를 올려야 하느니 기도를 해야 하느니 그런 상담은 안 해요. 암 말기인 남편을 둔 신도에겐 우선 본인 마음의 불안을 없애고 서서히 정리하라고 얘기해 주는 것이지요.”
요즘 젊은 세대는 제사에 대한 상담도 자주 한단다. 전통은 따르되 의미를 더하고 싶은 그들에게 스님은 가족들이 모여 옛 스님들의 열반송을 낭송하는 것을 권한다. 육지에서 온 낯선 스님의 이야기라면 그런 답을 들은 신도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성 스님은 어려서부터 제주에서 컸기에 본인들 고민의 바탕 위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을 신도들이 더 잘 아는 바다.
“승려로서의 제 모습을 갖추고 해야 할 것을 하면서 삶의 문제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 가려고 합니다.”
제주도 선흘리에는 스님이 머무는 도량이 하나 더 있다.‘선래善來왓’이라 하여 누구나 반가이 맞이하는 소박한 곳이다. 14년 전에 마련한 그곳은 쉬고 싶은 이들이 와서 쉬기도 하고 자기 성찰도 하는 수행 공간이다.
“저는 성찰의 기본은 쉼이라고 생각해요. 성찰은 마치 고요한 어둠에 서서히 불빛이 비치는 듯한 것이지요.”
선래왓도 보리도량처럼 사람들의 요구가 조금씩 무르익는 중이다. 그렇게 조금씩 스님이 생각한 수행공간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오성 스님은 그저 어디서든 멈추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인연이 안 닿으면 혼자서 가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으면 함께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길의 끝은 내가 멈춰 선 곳입니다.”
오성 스님은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랐다. 네 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어린 스님을 데리고 산에 있는 자그마한 절에 드셨다. 그러다가 스님이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큰스님을 따라 김녕의 한 어촌에 있는 작은 절로 보내셨다. 그러고 어머니는 출가하셨다. 오성 스님은 노스님 밑에서 자라며 여느 동네 아이들처럼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제주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다른 삶은 생각해 본 적도 없이 자연스레 정식 계를 받
고 출가했다. 그러고는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고 실상사 화엄학림을 졸업하고 선방에 다니다가 제주에 다시 내려왔다. 그게 20년 전의 일인데 그때에 스님은 제주 불교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한국 불교라는 큰 틀에서 고민하는 부분도 있어야 하겠지만, 지역에서 누군가 그 지역의 불교를 생각해야 지역에 뿌리를 둔 이들의 고민이 구체화되고 자기에 맞는 불교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역사 속에서 제주 불교의 현주소를 알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제주 시내에서 오성 스님과 뜻이 맞는 몇몇이 모여 작업을 했
다. 마치 전설처럼 구전되는 이야기들뿐 이렇다 할 자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일제시대의 신문을 찾고 옛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작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성과를 냈다. 제주불교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박사도 석사도 나왔다.
“불교인들이 정리하는 불교와 사학자들이 정리하는 불교는 다를 수 있어요. 그런 게 불교 역사를 정리하는 데에 있어 맹점이죠. 제주 불교는 전문가들이 제대로 정리해놓았습니다. 자료만 찾아놓으면 사람에 따라 해석이다를 수 있어서 2차 작업을 통해 논문으로 발표했기에 크게는 어그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매체가 발달이 되어 중앙 불교와 긴밀한 관계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불교는 신앙의 태도가 조금 다르다. 제주도뿐 아니라 해안가의 불교는 민간신앙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역적 특색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 또한 또 다른 특색을 만들어냈다. 제주도에 원나라 특색의 불교가 자리를 잡고 그 후 조선시대엔 중앙에서 박해받은 불교가 제주도로 옮겨와 이끌어 가고 일제시대를 겪고 4·3항쟁을 겪으면서 고
민과 아픔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수행이 아닌 민간 신앙적 특색이 강조되는 제주 불교는 당시의 지식인 승려들에게도 최대의 고민거리였단다.
“역사적 흐름을 알면 지금의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런 역사의 고민 속에서 서두르지 말고 수행자로서 한 걸음 한 걸음 내 방향을 갖고 걸어가는 게 중요한 것이지요.”
오성 스님은 현재의 제주 불교에 잣대를 갖다 대고 옳다 그르다 하지 않는다. 불교적이다 비불교적이다 따지지 않는다. 근본 불교에 비춰 다른 형태로 굴절되어 있으면 그 굴절된 모습과 삶의 굴곡과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생각한다. 그렇게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옳다 그르다 시비를 가르는 건 중요치 않다는 말씀이다.“지역민들이 삶의 바탕에 갖고 있는 신앙적 태도라고 봐야 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잘 이해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줘야 합니다.”
오성 스님은 그 후 해인사와 법주사 강원에서 강의도 하고 미얀마에서도 한 철을 살기도 했다. 그러고는 다시 제주에 내려와서 살았다. 그 길을 되짚던 스님이 문득 말씀하신다.“누구나 마음의 고향이 있잖아요. 저에겐 어렸을 때 노스님을 모시고 살던 김녕 어촌 마을의 그 시절인 것 같아요. 노스님의 모습이 늘 눈에 선해요.”
힘든 일이 생길 때면 노스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면 정화되는 것만 같다. 나이를 먹으면 꼭 그런 모습이
고 싶단다.“옛날엔 선비들이 중앙에 진출해서 일을 마치면 고향에 돌아와서 훈장을 했잖아요.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지역에서 인생의 후손들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했지요. 그런 사람들이 좀 많아졌으면 해요. 그렇게 자란 후손들은 힘들거나 방향이 안 잡힐 때 그분을 떠올리면서 한번 쉬어가기도 하고 방향도 찾아가는 것이지
요. 제겐 노스님이 그런 분이세요.”
참 작은 어촌 마을의 작은 절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살았단다. 몸이 힘든 사람도 마음이 힘든 사람도 함께 모여 아침 예불을 드리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 금강경을 독송하고 모여 앉아 공양을 하고 모두 쉬지 않고 구석구석에서 일을 했단다. 오성 스님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노스님은 일을 하나 맡기셨단다. 화장실 앞에 있는 돌항아리에 사람들이 손을 씻을 물을 매일 아침 마련해 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닷가이니 작은 바닷게들이 올라와 놀다가 그 물에 빠져 죽곤 했다. 어린 오성 스님은 그것을 치워내는 게 꽤나 마음에 걸렸다. 그것을 본 노스님은 지나가며 한 마디 하셨다.‘죽은 게 아니라 몸을 바꾼 것이다!’ 그 후론 그것을 치우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고, 그 말씀은 지금껏 오성 스님의 가슴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살다가 힘들거나 불현듯 지칠 때면‘아, 몸 바꾸는 시간인가 보다’그렇게 생각을 해요.”
오성 스님은 사는 내내 최고의 살림인 노스님의 말씀을 품고 산다. 그렇게 노스님처럼 누군가에게 살림이 되는 말 한 마디 건넬 수 있다면 중노릇 참 잘했다 싶겠단다.
그저 그 모습만으로 귀감이 되는 사람이 있듯이 그저 그곳에 자리하고 있어 편안해지는 곳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인생을 평온하게 하는가.
“쉼과 성찰의 공간이면 돼요. 종교라는 틀 속에 가두고 방향까지 제시하면 일시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그게 또 다른 고통을 낳습니다. 종교는 언제든 찾아가면 쉴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되어야지요.”
스님은 나이가 좀 들면 선래왓에 앉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이고 싶단다. 한자도 가르치고 같이 걷기도 하면서 살았으면 싶단다. 캄캄한 밤에 다 같이 오름에 올라앉아 명
상도 좀 하면서 말이다. 그 모습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빛처럼 어른어른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