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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의 나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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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적축 - 원철 1999년 03월 205호
부인사에 보관되었던 처음 만든 대장경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몽고족의 침입 때 불타버린 처음으로 만든 대장경판과 판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늘 부인사 앞을 지날 때마다 이것이 화두이다. 하지만 지금의 부인사는 대장경의 보관지보다는 선덕여왕 원찰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켜 놓았다. 처음 만든 대장경이 잊혀져 가는 것처럼 첫 대장경의 보관 장소도 함께 잊혀져 기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 없어져 버린 대장경은 남아 있는 해인사 대장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부인사 대장경이 현종 2년(1011)에서 선종4년(1087)에 이르는 76년, 해인사 대장경이 부인사 대장경이 소실된 고종 19년(1232)으로부터 완성된 고종 38년(1251)까지 거의 20년에 걸친 불사를 하게 한 비원悲願이 무엇일까? 고려시대에는 대장경이 국민들과 위정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길래 거란족과 몽고족과의 전쟁 와중에서 대장경을 만들었을까? 같은 아시아권에 살면서 대장경을 불지른 몽고족과 대장경을 다시 새긴 고려인과의 사상 차이는 무엇일까?

부인사의 대장경은 해인사대장경에 포함되어 있다
대각국사 의천(1055 ~1101)은 일본의 법사들에게 교장敎藏의 소疎를 구해 모으는 취지를 밝힌 글에서 초조대장경의 내용을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남겼다.
“지승智昇이 지은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과 원조圓照가 지은 「정원속개원석교록貞元續開元釋敎錄」들에 수록된 경률론 등과 송에서 새로 번역한 경론6000여 권을 모두 새기기를 끝마쳤다”라고 하였으며 또「제종교장諸宗敎藏」을 새겨 인쇄하면서는 “현종께서는 오천축五千軸의 비장秘藏을 새겨내셨고 문종께서는 천만권(千萬頌)의 계경契經을 새겨내셔서 정경正經은 비록 원근에 다 퍼졌다 하겠으나 장소章陳가 간혹 없어진 것들이 있다’라고하였다.
이 말을 종합해 보면 첫째, 현종 때 처음대장경을 만들 때 오천여 권의 경률론이 입장入藏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개원석교록」 권수와 일치하므로 여기에 수록된 모든 문헌이 포함되었다는 말이요, 둘째, 초조본初離本이 나온 뒤 이 초조본은 문종때 천만송의 계경을 새겨 보완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요, 셋째, 의천 자신은 장소章陳를 모아 속장續藏을 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넷째, 지금의 대장경에 그 외의 문헌이 들어 있다면 고종 때 다시 만들 때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K1 ~K1087(天函-英函)은 현종 때의 초조본을 다시 만든 것이라 하겠다. K1088~K1263(杜函-輕函)은 문종 때 속각된 초조본의 보완이며, K1264~K1498(磻函-洞函)은 고종 때 재조본再
雕本을 민들 때 새로 새겨 넣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함명函名의 목차는 천자문의 글자 순서이다. 남아 있는 부인사 대장경의 흔적은 1990년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94종 144권 국외에서 는 일본의 남선사장南禪寺藏 310첩 가운데 44종 170권, 장송사장長松寺藏 599권, 안국사정安國寺藏 591첩이 발견되었다. 초조대장경은 1400여 종 6000여 권이라는 방대한 양에 이른다. 지금까지 발견된 장경은 130여 해 불과하며, 각 권차 가운데에서도 반야경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낙질이다. 양으로는 얼마되지 않지만 전체 함차函次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편이라 그 편린으로도 전체의 모양을 헤아려 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의천대사는 정장正藏보다는 속장續藏 더 관심이 많았다
대각국사 의천은 19세 때 속장경 편집 불사를 발원했다.
“이제 정법이 차츰 쇠퇴하고 중생의 근기가 차츰 둔해졌으나 네 가지 의지할 선지식(四依)이 간간이 출현하여 소를 지어서 교리를 현양하였고, 삼장법사가 출현하여 간략하게 간추린 초抄를 만들어 소를 보좌함으로써 세상에서 무성하게 받들어 행하게 한다면 이것은 실로 한 시대의 할 일을 다했다 할 것입니다.” (「대세자집교장발원소代世子集敎藏發願練))
국사는 이미 이 때 속장경의 간행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부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나라로 구법행을 갈망한 것도 이 소초疎抄의 수집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체류한 지 일 년 남짓한 기간에 3000여의 소초를 수집해 올 수 있던 것도 평소의 원력과 치밀한 계획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국사가 송으로부터 귀국하여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藍을 두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에서 4000여 권의 장소를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함께 모았다. 그리하여 속장경 간행을 위한 선행 사업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綠」3권을 함께 편집했는데 각권의 안쪽에 「 해동유본현행록海東有本現行錄」이라고 제목했다.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거하여 모두 1010부 4740권의 장소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을 우리는「고려속장경」이라고 부른다.
정장(三藏)을 연구하는 데 그 주석서인 소초의 연구는 필수이다. 속장경은 정장은 물론 그 소초까지 모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로써 고려 불교는 정장과 속장을 함께 아우르는 문화적으로 기념비적인 업적을 완성했다. 고려는 바로 대장경의 나라였다. 비록 지금 대정대장경, 만속장경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지라 일본에게 대장경 종주국의 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지만, 후손이 제 몫을 다해야 조상에게 누累가 되지 않는 것은 대장경도 예외가 아니다.

대장경 판각은 진리 수호를 위한 종교 전쟁이다
대장경 신앙은 경전의 공덕으로 재난을 극복하려는 기원의 성격을 갖는다. 대장경 신앙은 불법이라는 진리를 수호하려는 것이었고 진리가 모든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고려인은 몽고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원나라 장수 흔도忻都가 고려의 장군 김방경金方慶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해동인을 보니 모두 글을 알고 불법을 믿는 것이 중국의 한인漢人들과 비슷하다. 고려인들은 늘 우리를 멸시하며 ‘몽고인들은 살육을 업으로 하니 천심이 반드시 싫어할 것’ 이라고 한다.”(「고려사 열전) 김방경전)
고려인들이 글을 알고 불법을 믿어서 늘 몽고인을 멸시했다는 문화적 자존심이 야만의 침략자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정신적 배경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대장경의 판각은 불법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종교 전쟁인 셈이다.

*지난 호 ‘조선족’ 중에서 최호의 ‘황학루’의 5행인 “한양수는 맑은 강에 역력히 비껴 있고 晴川歷歷漢陽樹”가 빠졌기에 정정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월간 「해인」 영구 독자이신 어느 거사님께서 촉한蜀漢의 비위費褘는 비의費禕, 동한東漢의 미형彌衡은 예형禰衡의 오자誤字라는 전화를 필자에게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