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생각을 제대로 모을 수 없을 만큼 혹독한 더위였다. 왜 불교에서는 많은 상징들이 해가 아니고 달인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여름이었다. 그런 더위 속에서 해인사를 찾았다. 여러 가지 숙제가 있었다. 홍류동 계곡 정혜스님 석각도 살펴보고, 1200년 만에 공개되는 해인사 마애불도 찾아볼 요량이었다. 비없는 마른 장마에 홍류동 계곡의 물도 부쩍 줄었다. 고운 최치원이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시에서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라고 한 그 물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아래 세상보다는 한결 시원하다. 그렇지만 마애불을 오르는 일이 남아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11명이 해인사를 찾았지만, 세 분은 마애불까지 오르지 않기로 했다. 더운 날씨에 높은 산을 오르는 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포교국 일을 돕고 있는 김강언 처사의 안내를 받아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애불이 있는 곳은 높이가 1000m라고 했다. 가파른 곳이 길지는 않았지만 무더위 속에 마애불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나무 그늘과 계곡 물소리에 가리기는 했지만 8월 말의 날씨도 만만치 않았다. 쉴 새 없이 부채를 부쳐 가면서 한걸음씩 오르기 시작한 지 30분 만에 잠시 물가에서 쉬기로 했다. 계곡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깊은 골짜기답게 청량감이 느껴졌다. 결국 몇 번이나 더 오르던 길을 멈추고 계곡 가 바위에 앉아서 거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물을 따라 오르던 길이 계곡을 버리고 능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길은 더욱 가파르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다른 분들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연신 물을 들이켰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자 마애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치 올라오느라 고생 많았다는 듯이 우리를 내려다 보았다. 여름이라 더 힘들었겠지만 이 정도 높이면 어느 계절이라도 오르기 쉽지 않으리라. 부처의 세계에 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 짐짓 이렇게 높은 곳에 부처님이 계신 것이리라.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부처님을 올려다 보았다.
마애불이 계신 곳은 해발 1000m이다. 서울 남산의 높이가 262m이고, 경주 남산 금오산의 높이가 466m이다. 경주 남산 높이보다 2배나 높은 곳에 계신 것이다. 우리나라 불상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부처님 중의 하나다. 이렇게 높고 험한 곳에 부처님을 모신 건 극히 예외적이다. 험한 산길을 오르며 느낀 것은 이 부처님 참 만나뵙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만들었을까?
창녕 관룡사 용선대 부처님도 산을 오르기는 해야 하지만, 이렇게 힘들지는 않다. 남산 상선암 아래에 있는 마애불도 한참 산을 오르기는 해야 하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 있지는 않다. 남산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로 꼽히는 서산 미륵삼존도 산 속에 있다고는 하지만 길에서 금방이다. 영주 가흥동 마애불(보물 221호)도 큰 길 가에 있다. 차에서 내리면 바로 거기다. 이곳저곳의 마애불을 생각해 보니 큰 길 가에 있기도 하고 보통은 길목에 있다. 서산 마애불은 당나라로 출발하는 배들이 항행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빌던 부처님이었으리라. 영주 가흥동 마애불은 죽령 어귀에 있어서 소백산맥을 넘어서 전쟁터로 가던 신라의 병사들이 발길을 멈추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한 곳이리라. 그렇게 사람의 발길이 미치는 곳에, 사람의 눈길이 닿은 곳에 부처님이 계시건만, 해인사의 마애불을 높고 높은 곳에 계신 것
그림 해인사 마애불(사진 : 부경대 인쇄정보공학과 이상남 교수)
일까.
높은 곳에 서 계신 마애불은 높기만 한 것이 아니라 크기도 하다. 높이가 7.5m이다. 보통 부처님은 흔히 장륙丈六의 신체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1장 6척이라는 뜻이고 4.8m에 해당한다. 이 수치가 부처님을 형상화할 때 가장 일반적인 기준이 된다. 그렇지만 마애불의 경우는 사용할 수 있는 석재의 크기에 따라서 불신佛身 즉 부처님의 크기도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서산 마애불도 높이 2.8m에 불과하다. 남산에서 가장 큰 마애불인 상선암 마애불도 높이도 거의 다듬어지지 않은 아랫부분을 합쳐서 6m이다. 그러나 해인사 마애불은 부처님의 발까지도 다른 돌로 다듬어 정성껏 붙여 놓았다. 통일신라시대까지 만들어진 마애불중 가장 크다. 가장 높은 곳에 가장 큰 부처님을 세우다니.
바위를 깎아서 만든 마애불도 그 윤곽만 파내서 부처님의 형상을 나타낸 선각線刻이 있는가 하면, 얕은 부조浮彫도 있고, 아주 높게 조각한 고부조高浮彫가 있다. 선각으로는 남산 삼릉계의 육존불을 들 수 있고, 부조로는 남산 용장골 용장사지에 있는 마애불을 들 수 있다. 마애불을 어떻게 조각해야 하느냐에 따라서 만드는 품도 천양지차다. 선각은 윤곽만을 정으로 파내면 끝이 나기 때문에 회화적인 기법에 가깝다. 부조는 선각보다는 어렵겠지만 평면을 중심으로 한 작업에 가깝다. 그러나 고부조는 조각에 가깝다. 고부조의 대표적인 예가 영주 가흥동 삼존불이다. 등만 바위에 붙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다 드러나도록 조각을 했다.
그런 고부조 기법으로 정성을 들인 것이 해인사 마애불이다. 특이한 것은 바위에 새기긴 했지만, 그 바위는 암벽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암벽에서 떼어낸 석재에 조각한 것이라는 점이다. 마침 그런 석재가 따로 떨어져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굳이 석재를 떼어내서 부처님을 새기고 따로 세워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면 마애불이 아니라 석불을 만들어 세우려고 한 것인지, 암벽의 방향이 적당하지 않아서 따로 떼어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역시 일반적인 마애불의 기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높은 곳에 웅장하게 서 계시는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일까?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은 부처님이 쥐고 계신다. 어떤 부처님인지를 알려면 우선 손의 모습을 봐야 한다. 부처님의 손 모양을 수인手印이라고 하고, 부처님마다 고유한 수인을 취하고 계신다. 대표적인 것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으려는 순간 파순波旬이 나타나 이를 방해하였다. 이때 석가모니는 참선하기 위해서 모았던 오른손을 풀어 땅에 손을 대어 악마를 물리치셨다. 어찌 보면 불교라는 가르침이 만들어진 순간이다. 그래서 석가불을 대표하는 수인이지만, 워낙 유명한 수인이라 아미타불이나 약사불도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 유명한 수인은 지권인智拳印이다.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것처럼 보이는 이 수인은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기본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수인은 광명의 부처님 비로자나불을 대표한다. 약사불은 약단지를 들고 계신다.
이 부처님은 구품인九品印이라고 불리는 아미타불의 수인을 취하고 계신다. 아미타불은 중생들의 역량에 맞춰 서방세계 극락정토로 인도하신다. 중생들을 상품상생上品上生부터 하품하생下品下生까지 9등급으로 나누고, 아미타불은 그에 응하여 9가지 다른 모양의 수인으로 중생들을 맞이한다.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에 의하면 “하품중생下品中生이라는 것은, 혹 어떤 중생이 5계나 8계나 구족계를 헐뜯거나 범하는 경우이니라.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승가의 재물을 훔치고, 공양 받은 승려의 물건을 도둑질하며, 청정하지 않은 설법을 하면서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온갖 죄업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장엄한다면, 이와 같은 죄인은 악업으로 인하여 마땅히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나니, 그가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 지옥의 수많은 불꽃이 일시에 몰려들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 때 선지식을 만나 그 선지식이 대자비로써 이 사람을 위하여 아미타불의 열 가지 위력을 찬탄하여 말하고, 저 부처님의 광명이 지닌 신통력을 널리 찬탄하며, 또 계정혜戒定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을 찬탄하면, 그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나서 80억 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느니라. 그리하여 지옥의 맹렬한 불길이 맑고 시원한 바람으로 변하며, 하늘 꽃을 불어 날리며 꽃 위마다 모두 화신불化身佛과 화신 보살이 있어 이 사람을 영접하느니라. 그리하여 한 찰나에 곧 7보 연못 가운데 있는 연꽃 속에 왕생하느니라. 6겁이 지나면 마침내 연꽃이 피어나고 꽃이 피어날 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청정한 소리(梵音聲)로써 그 사람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대승의 심오한 경전을 말해 주느니라. 그러면 이 법을 듣고 나서 곧 무상의 도를 구하는 마음을 내느니라. 이를 하품중생이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였다(원광사 홈페이지. 최윤옥 번역).
하품중생의 중생을 위해서는 아미타불은 하품중생인을 취하신다. 하품중생인은 들어올린 오른손의 엄지와 중지를 맞붙이고, 아래로 내린 왼손도 엄지와 중지를 맞붙인 모습이다. 마애불의 수인을 보면 오른손은 들어올린 채 엄지와 중지를 붙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왼손도 인지를 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엄지와 중지를 붙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왼손도 수인이 제대로 보이게 해야 하지만, 부조라는 조건 때문에 손등을 보이는 모습으로 변형시킨 것 같다.
한편 마애불은 능선을 올라가는 길에 올려다보면 정면을 향하지 않고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그 방향은 동쪽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계시는 부처님이고 서쪽에 계시기 때문에 서쪽에서 중앙을 바라보면 동쪽을 향하게 된다. 부석사 무량수전에 가보면, 불전의 한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불전 왼쪽 끝에 앉아서 동쪽을 보고 계신다. 무량수전을 남쪽을 보고 있지만,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은 동쪽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산세 때문에 불전을 남쪽으로 앉힐 수밖에 없었지만, 모시는 불상은 무량수불이므로 동쪽으로 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인사 마애불도 같은 모습이다. 산세는 남쪽을 보고 있지만, 부처님은 길을 비키듯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인사 마애불은 수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약사불로 보는 분도 있지만, 약사불이라면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중생들이 쉽게 가서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왼손에 약단지를 든 모습을 나타내려면 손바닥이 수평을 이루어야 한다. 마애불이 아미타불이라면 부처님이 가야산 높은 곳에 계신 이유도 분명하다. 서방극락정토로 가는 길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숨이 턱에 걸리고 다리를 옮기기도 힘들 만큼 노력해야 갈 수 있는 곳이 극락세계다. 그만큼 간절한 심정으로 산을 오르듯 올라야 하는 곳임을 보여준다.
해인사 마애불은 높은 곳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온전한 모습으로 계실 수 있었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불상들이 훼손되었다. 여인네들은 아들을 얻으려고 부처님 코를 갈아 먹기도 하였고, 선비들은 불교의 가르침에 맞서기 위하여 불상의 목을 자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눈을 파내기도 하고, 큰 석불을 쓰러트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남산의 부처님들을 보면 목이 떨어져 나가고, 턱이 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인사 마애불은 워낙 높은 곳에 계셔서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스님들만 왕래하는 참선길에 자리하였으니 1200년 동안 바깥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였다. 오랜 세월의 풍상에도 발 부분을 제외하면 어느 한 곳 상한 데 없이 온전한 모습이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가장 큰 마애불이고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높은 능선에 아미타불을 세웠으니 가야산을 극락정토로 여긴 것이고, 이 땅에 불국토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기획이 분명하다. 이렇게 온전한 부처님을 보물로 지정하는 데 그친 것이 아쉽다. 워낙 높은 데 있어서 올라가기 쉽지 않은 것이 이유였을까? 통일신라시대 마애불 중 으뜸이다. 이름도 “해인사마애아미타불입상”이라고 제대로 불러 드려야 할 것이다. 조성한 의도가 분명하고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된 것이라면 국보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다.
앞으로도 가야산은 아미타불의 가호 아래 사철이 바뀔 것이고, 중생들은 극락정토를 꿈꾸며 산자락을 찾아들 것이다. 오늘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극락정토를 향하여, 우리를 향해 두 손 모으신 아미타불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