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이 역사 속에서 사라질 무렵 등장한 황실의 후손 팔대산인(八大山人, 朱耷, 1625?~1705?)과 석도(石濤 1641~1720?) 두 사람 모두 승려화가이자 청초淸初 그림으로 손꼽히던 작가이다. 두 사람 모두 승려라는 점에서 승려화가 혹은 선화가로 구분되지만, 화풍은 완전히 구분되는 필묵의 운용運用을 보여주고 있다.
뜬금없이 두 사람의 나이를 잠시 비교해 보자면 팔대산인은 1625년생, 석도는 1641년생이다. 청淸의 건국이 1644년이니 팔대산인이 19세 열혈청년일 때 나라가 망한 것이다. 열혈청년, 더군다나 명황실의 후손이었던 주답에게 망국의 현실은 암담하고 절망에 빠질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반면 이때 본명 주도제朱道濟, 석도는 불과 3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가 장성하여 공부하고 활동했을 시기는 아무리 그가 명황실의 후손이었다고 하더라도 망국의 설움은 그 색이 희미해질만한 세월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망국의 한을 품었던 팔대산인과 비교적 안정된 시국에서 태어난 석도의 화풍이 비슷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팔대산인은 스스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그 후에는 미치광이 짓을 하고 벙어리나 귀머거리 행세를 하였다고 전한다. 세상의 소리가 듣고 싶었을 리가 없다. 지난 호에 잠시 감상했듯이 팔대산인 그림 속에 등장하는 새들은 귀머거리이고 외다리이며 일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서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또한 지금 우리가 호방하다고 평가하는 그의 먹과 붓 운용을 보자면 진한 먹이 튀고, 그 느낌 그대로 번지게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빠른 속도감이 느껴지는 붓질의 기세는 막을 수가 없어 마치 광풍狂風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이런 팔대산인의 그림에 비해 석도의 그림은 조용하다. 선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석定石이어서 선화, 망국, 한 등의 수식어를 붙이기가 어색할 지경이다. 그의 화풍은 특히 산수화에서 더욱 더 드러나는데, 그림의 구도와 담고 있는 내용은 당시 전형적인 산수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행보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궁정 안팎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전통적인 문인이자 선비로서 활동하였으니, 팔대산인이 벌인 기행奇行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쑤(江蘇) · 안후이(安徽) 지방에서 주로 살았지만 한편으로 중국 전역을 널리 여행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 명산대천을 다녔던 것 같다. 그의 그림 중에는 황산黃山이나 여산廬山 그림이 많으며, 소동파와 두보, 이백과 같은 문인들의 시의詩意를 화폭에 담았기 때문이다.
그림의 내용은 그러하지만 현대의 미술사가들은 그의 이름 앞에 ‘개성주의적 표현’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필묵은 전통적인 구도와 내용을 유래없는 독특한 필묵법으로 채워 재탄생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화론을 통하여 전통적인 양식을 통달한 연후에야 그 변용과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 했으므로 이러한 화풍의 구현이 충분하게 이해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는 먹을 아낀 화가 중에 하나였다. 노년에는 \"붓이 마르면 아름답고 붓에 물기가 많으면 속되다\"고 평했다고 전할 정도이다. 먹이 마른 붓(渴筆)으로 그려낸 화폭 속 산과 바위들은 마치 건조한 머릿결을 쓸어 넘기는 것과 같이 그려냈다. 오늘 감상하는 <여산폭포>에 역시 이러한 그의 화풍이 유감없이 담겨 있다. 화면의 중간을 채운 몽환적인 분위기의 바위와 멀리 보이는 여산폭포는 이백의 표현대로 은하수 물줄기가 구천에서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폭포를 따라 오르면 저 멀리 여산의 상봉이 마치 수미산과 같이 버티고 있는데, 화면 아래 두 인물은 그 폭포를 따라 승천하길 기대하는 뒷모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