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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종교로 정의定義된 암흑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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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 - 종안┃해인사승가대학 강사 2013년 09월 379호

주지하듯이, 중국의 진秦, 한漢 시대는 농경사회로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이룩하여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있던 반면에, 같은 때 북방민족들로 흉노, 선비, 월지 등은 유목사회로 초원스텝지대와 사막지대를 점하고 있었지만 삶이 여의치 않으면 종종 농경세계와 무력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흉노는 북방 기마민족의 호전성과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력을 가진 전형적인 약탈자의 모습으로 한족漢族은 물론이고 다른 유목민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찬란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도 그 시절의 한족에겐 ‘공포’의 계절을 의미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흉노의 빈번한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의 필요성을 느꼈고, 한 고조 유방은 나라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기원전 201년 흉노의 묵특(冒頓, 흉노의 시조)과 한판승을 겨뤘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여 도망친 수모를 겪고 난 뒤 거의 ‘군신의 예’를 갖춘 굴욕적인 화친을 맺는다. 한 무제武帝(즉위 기원전 141년)에 이르러 농경사회는 60여 년간의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책宥和策을 버리고 맞대응에 나서, 여러 차례에 걸친 정벌로 10년간의 한·흉노 전쟁(기원전 129-119)을 가까스로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흉노와의 전쟁을 앞두고 외교사신 장건張騫이 서역의 월지와의 화친을 명받아 떠났으나 오랜 고난 끝에 돌아와 오히려 서역의 ‘부강한’ 많은 소국가들의 존재를 알리고 교역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중국과 서역의 문물이 교류되는 비단길silkroad의 탄생이 돋보인다. 비단길은 흉노의 세금징수와 중국의 자유로운 교역이라는 또 다른 생존권 투쟁터가 되기도 했다. 결국, 흉노는 고비사막 너머로 쫓겨 물러난 후 점점 힘을 잃으면서 거의 2세기동안 한나라와 ‘평화롭게’ 공존하다가, 왕망의 신을 거쳐 후한(광무제 유수, 서기 25년)이 들어서자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되고(50년), 남흉노는 곧 한족에 융화되고 북흉노는 한 왕조와 선비 등 타 유목민족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유럽 안쪽까지 전진과 정착을 반복하면서, 그리고 이동경로 위의 소국들과 계속하여 마찰을 빚으면서, 3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때 특기할 한 가지 불교사적 사건으로는, 1세기 중엽 서쪽으로 이동하던 흉노에 밀려 쫓겨나던 월지국의 한 갈래인 큐산貴霜이 서북 인도에서 큐산제국을 일으킨다. 그 3대 왕 카니시카(Kaniska, 재위 73~103)는 아쇼카에 이은 이름난 호불왕好佛王으로 간다라 지역에서 경전의 ‘4차 결집’—덕 높고 눈 밝은 승려들로 하여금 총 30만송頌 660만자字의《아비달마대비바사론 阿毗達磨大毘婆沙論》을 편찬케 독려—을 통한 불교의 사상체계 정립과 세계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물론 카니시카는 외래인으로서 카스트의 기득세력인 브라만을 인정하기보다는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의 만인평등을 주장하는 불교를 통해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통치술을 보여준 현제賢帝였던 셈이다.
서쪽으로 계속하여 밀려드는 흉노의 압박으로 서역에 산재해 있던 유목민족들도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연이어 서유럽 농경지역으로 천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유목민족의 대이동이었다. 아시아 유목민뿐만 아니라 유럽의 유목민들도—즉, 유럽 steppe지대에 산재해 살던 여러 게르만족으로 고트, 반달, 프랑크 등—더 서쪽으로 밀려서 급기야 로마제국의 영토 안으로까지 들어가게 된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4~5세기)이다. 한편, 로마제국은 이즈음에 밀라노 칙령(313년)을 내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게르만이(특히 흉노에 쫓긴 고트족과 프랑크족) 이미 한참 전부터 이태리반도와 수도 로마까지 밀려들고 정주하여 “로마가 야만족 천하가 되었다”고 한탄함과 동시에 고도의 ‘농경(문명)사회’를 이룬 그리스를 포함한 동방문화에 매료되어, 제국의 수도를 동방 점령지인 비잔틴(이스탄불)으로 옮기고(330년)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 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392년) 테오도시우스가 운명하고 전통에 따라 두 아들이 로마제국을 이태리와 그리스의 지중해 중간을 기점으로 서로마제국와 동로마제국으로 분할(395년) 통치케 되었다. 서로마는 끝내 서고트와 반달에 의해 무너지고(476년), 제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프랑크족에 의해 게르만유럽으로 변모된다. 후에 프랑스, 이태리, 독일로 거듭나는 프랑크 왕국(481~843)은 기독교를 등에 업은 서유럽 최초의 게르만 통일국가로서 중세 유럽의 교황중심의 여러 제도의 모체를 선보인다. 때맞춰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노예제 국가들이 무너지고 봉건시대가 시작되면서 중세의 특징을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한편, 동로마(비잔틴)제국은 흉노의 후신後身으로 알려진 훈족(the Huns, 족장 아틸라Attila 406-453)의 잔인한 공격을 받으며 제국의 명맥을 간신히 그러나 끈질기게 버텨가고 있었으며, 서로마제국에 상대적으로 경제, 문화, 통치술 등이 빼어나 로마제국의 정통으로서 긍지를 잃지 않은 채 먼 훗날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1453년) 오래도록 존속하였다.
이렇게 동방과 서방이 뒤섞여 생존권에 혼연을 이룬 ‘민족대이동’이라는 문명발전사적 현상은 인류문명에 처음으로 농경과 유목의 교류를 촉진시키고 동서간의 정치와 경제(특히 비단길 무역)뿐만 아니라 사상, 종교, 기술, 의복, 생활습속 등의 교차를 가져다주어, 결과적으로 인류사에 ‘중세’를 여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고양시켰다. 중세는, 노예제도와 씨족사회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회와는 달리, 황제나 교황이 봉건제feudalism를 채택하여 지방제후들의 자주성을 대우하며 통솔하였고, 더하여, ‘씨족이념’을 넘어 국가와 제국 전반에 걸쳐 통치기반이 되는 정신적 사상적 통일을 위한 종교의 절대적 신성화와 호국護國종교의 배타적 방어를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종교는 유럽 중세를 정의하였다. 예컨대, 십자군十字軍 원정은 11-13세기에 유럽의 기독교도들이 당시의 세계사를 휘어잡던 이슬람 문명에게 빼앗겼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무려 8회에 걸쳐 군사원정crusades을 일으킨 사건이다. 물론, 십자군 원정은 통치술로는 내치 기강을 다잡는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식민정책의 일환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슬람과의 신앙 배타적 싸움이란 점에서 타협이 없는 ‘절대신앙’의 내재적 자기모순이 이미 원정 전부터 늘 잉태되어 있던 셈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비록 수세적守勢的 입장이었지만, 중세 고려의 흥망에 관한 호국불교의 배타성이 깃들어있다면 과한 언급일까?
하여간에 그런 중세의 시대정신 탓으로, 더구나 게르만의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종교이념의 배타적 절대성으로 인해, 중세철학은 700여 년간—즉, 교부철학의 정점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로부터 스콜라 철학의 효시인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099)의 등장까지—‘신학의 시녀’가 되어 암흑시대the Dark Ages를 맞는다. 이 ‘암흑’은 철학이 철학적이지 못함에 대한 반성을 뜻하며, 철학적이지 못한 철학은 그 사고법에 있어서 “자유롭게 열려있는” 사변적이고 논쟁적이며 그리고 언제나 수정과 개선이 가능한 사고를 담보 받지 못함을 일컫는다. 중세 철학은 그 별칭이 알려주듯이 신학의 아류였을 뿐, 니케아 종교회의와 같은 결집을 통하여 얻어진 정통교의에 대한 교조주의적 해석 외에 정통에서 어긋난 그러나 설득력 있는 이단異端—즉, 모두가 다른 것이 아니라 ‘끝(한쪽)부분만 달라도’ 곧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이 될 용기가 없었다. 분형焚刑틀을 떠올리며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절대신앙은 “합리적(rational or of-reason)” 오해誤解(재해석)를 절대 불허했다. 당시의 기독교는 바로 계시revelation의 종교이지 이성reason의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은 혹은 신성은 인간 이성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오직 계시로서만 이해되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will-to-believe의 영역일 뿐, 이성이나 감성 혹은 오성understanding이 기웃거리며 드나들 곳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계시는 절대독선의 다른 표현이었다. 오직 아우구스티누스에 합당한 플라톤의 이원론적 ‘이데아의 세계’로서만 철학적 재해석이 가능한 유일하고 독점적인 “비非철학”의 표본이었다. 그런 천년의 세월이 중세 유럽의 하늘을 덮고 있었다. 철학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 진실은 아무래도 숨겨지지 않았다. 시절인연이 다가오고, 안셀무스가 등장하였다. 안셀무스는 스스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복제임을 주장하면서도, 다만 ‘신 존재 증명’이라는 신성神性 이해에 대한 도전이 계시적 은총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통해 얻어질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설득하기를, 신이 완전하다면 신에 관한 다른 모든 속성이 가부可否의 선택일 수 있지만, 심지어 선악의 선택일지라도, ‘존재성’에 관한 속성에 있어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1) ‘신은 완전하다’는 개념과, 2) ‘존재는 비존재에 대해 완전성이 높다’는 관념이 상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3)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성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마침내, 중세인들이 “중세적” 삶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계기가 마련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