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갈라진 땅 서러운 꽃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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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여연
1988년 05월 75호
달의 싹이 돋는다는 월이산(月芽山)성은암 계곡엔 유난히도 많은 봄꽃들이 피고 있다. 무성한 청대밭 사이로 바람이 서걱거리는 암자 돌담 곁에 개나리꽃들이 자지러지게 피어 있다. 무심히 들여다보니 그 개나리밭 속에는 작은 목련꽃이 푸짐히 피어 있다. 노오란 개나리 꽃더미 속의 하얀 목련꽃은 어떤 야릇한 신비감을 갖게 한다. 각자 선명한 원색이면서 어색하지 않은 색의 미묘한 조화, 만약 노오란 옷을 입은 사람들 무리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으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텐데. 자연이 이루어 놓은 색상들은 그러하지 않다. 제각기 독특한 향기와 다른 모양새, 빛깔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서로 다투지 않고 시샘하거나 뽑내지도 않는다. 그저 제 타고난 본디 순한 품성대로 고요한 생명을 누리고있다. 그 온전한 생명의 개체 속에는 평화 같은 평온한 숨결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세계라면 각기 제가 더 잘났다고 으시대며 요란스러울 텐데 말이다. 그것들에 망연히 취해서 산길을 내려온다. 그런 세계에서 한 발자욱만 뒤로하여 가까운 시정에 나서면 그처럼 평안하던 연두색 고요는 쉽게 무너지고 만다.
요즈음은 더구나 막바지 선거철이라 나라 안이 온통 야단법석들이다.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이들은 서로 자기가 당선되어야만 민중의 지팡이가 될 수 있고 못 사는 농촌 사람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단다. 오로지 자기만이 민주의 대변인이고 자기 당만이 선명 야당이고 정통 정치인이며 민주화의 기수, 그리고 지역 사회의 토박이임을 자처하는 소리로 들끓고 있다. 허망한 울림들이 빈가슴을 친다. 군데군데 찢겨져 흉한 모양을 하고 있는 포스터들의 상흔(傷痕), 현수막의 조각난 붉은 천들이 서러운 듯 바람에 날리고 있다. 또 어디선가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대륙에서 몰려 온 황사 바람과 어우러져 모략과 중상 그 음흉한 흑색 바람이 더욱 거세어진다.
하잘 것 없는 산나무 꽃들, 몇 그루의 꽃더미보다 못하게 서로를 헐뜯고 몰아부치면서 어떻게 참신한 이 나라의 일꾼이 되어 어지러운 이 땅의 질서를 참고 바른 입법을 할 수 있을까. 허허로운 가슴엔 믿음의 뿌리가 자리하질 않는다. 수십억씩 뿌린 표밭으로 당선되면 그 사람들이 다시 그 돈을 챙기려고 혈안이 될텐데 어찌 제대로 국민을 돌보는 정치를 하겠으며 그 많은 중상, 협잡 온갖 욕설로 더럽혀진 입을 어느 세월의 강물에 씻고 선량한 민중의 아픔을 헤아리는 일꾼이 되겠는가. 헤아릴 수 없는 갖은 농간, 흑색 선전, 술수들로 권력을 잡은 뒤 힘없는 백성들을 또 얼마나 볶아댈 것인지, 도대체 인간적인 신뢰가 안 간다.
정치가란 쉬운 말로 좋은 나라 만들고 맑은 역사를 일구어 내겠다는 사람들 아닌채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민족 문제의 핵심에는 조금도 가 있지 못하고 있다. 기껏 정치 소신이라는 것이 농어촌을 좀 잘살게 하고 자기 지역에 공장 몇개 유치하여 산업화시키고 시멘트도로 포장하겠다는 것이 고작이다.
목에 핏발 서도록 민주화를 외쳐대는 지성 정치가들의 고함은, 무엇 때문에 이땅이 민주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의식이나 갖고 있는지, 그저 허허롭게만 들릴 뿐이다. 붕당정치의 명수들이 입으로만 떠들고 있다.
참으로 좋은 나라, 맑은 역사를 만들려는 우리의 핵심 과제는 분단된 우리 민족의 통일에 있지 않은가.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 뿐 아니라 나라의 완전한 민주화도 통일이 안 된 상태에서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통일은 바로 인간해방으로 풀어지는 길이며, 민족 운동이 이땅의 인간해방운동으로 구체화될때 우리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로 확장되어 인류공동체의 건설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통일과 민주화를 방해하는 요인이 독재에 있고, 우리의 분단이 제국주의라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인식해야만 된다.
루카치가 「신식민지와 민중문회 운동」에서 밝혔듯이 예전에는 강대국들이 군대와 총기의 무력으로 약소 민족을 식민지로 만들어 강압했었다. 그런데 아프리카 남미 여러 민족국가들의 조국 해방 투쟁과 1939년 쿠바의 민족운동으로 식민지 지배가 실패하자 새로운 수법을 쓰게 되었다. 예컨대 국제 무역 관계를 조작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진출시켜서 개발국을 수탈하고, 이데올로기의 동질화를 통해 민족 주권 의식을 강탈하고 있다. 외래 문화의 소비와 향락성은 민족문화의 뿌리를 말살시켜 문화•경제 •정치 전반에 신식민지화를 꾀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 앞에 가로놓여 있는 커다란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으면 이땅의 민주화와 통일은 요원한 것이리라.
푸른 5월, 다시 그날이 오면 우리 가슴에 불꽃처럼 피어나는 꽃송이의 서러운 냄새를 딛고 우리들은 저 갈라진 땅의 상처를 안은 채 가야 한다. 자유를 위해 피어났던 꽃들과 어우러져 흥겹게 춤출 수 있는 저 아름다운 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