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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과 기독신앙, 절대성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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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 - 종안┃해인사승가대학 강사 2013년 08월 378호

지중해 고대문명의 변방 이태리 반도에서 도시국가 ‘로마’가 세워진(기원전 753) 후, 로마는 반도의 다른 도시국가들을 흡수해가며 왕정(기원전 753-510)을 거쳐 공화정으로 발전해 간다. 귀족이 중심이었던 초기 공화정은 평민과 귀족간의 사회적 권익을 두고 다툼을 해, 결국 평민의 승리로 평민은 법률에 의해 ‘로마 공민’이라는 이름으로 귀족과 동일한 모든 정치사회적 권리를 획득하였다. 예컨대, 평민들에 짐이 되었던 부채負債노예제도와 같은 폐단이 제거(기원전 326) 되었으며, 그들의 권익을 옹호할 평민출신의 집정관(호르텐시우스, 기원전 287)까지 배출하게 되었다. 이는 기득 권리를 외부에서 찾도록 유도하였고, 결과적으로 로마는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벌이며 반도 내 모든 지역은 물론이고 반도 밖으로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해외전투로서 처음 겪은 상대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였다. 당시 서지중해의 패권을 쥐고 있던 카르타고를 무너뜨리기 위해 로마는 무려 한 세기 넘게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Punic Wars, 기원전 264-146)을 견뎌낸다.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과 로마의 스키피오Scipio가 벌인 자마Zama에서의 한판 결전(기원전 202)은 한니발의 분을 참지 못한 자살과 함께 로마의 팽창을 약속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서쪽으로 포에니전쟁뿐만 아니라, 로마는 그 와중에 동정에도 나서 옛 마케도니아의 영광을 빼앗아(Macedonian Wars, 기원전 215-168) 그리스와 소아시아 영역까지도 손에 넣고서 지중해 전체를 로마의 내호內湖로 만들어버렸다. 이때쯤, 로마는 비록 통치자였으나 문화적으로 그리스 헬레니즘을 받아들여 단순한 군사강국에서 문화강국으로도 도약하게 된다. 말하자면, 전투를 위한 도로와 교량의 건설뿐만 아니라 식민지배자로서 예술, 문학, 철학도 즐기는 고상한 ‘라틴인’이 되어갔다. 그 대표적 표징으로 로마신화는 신들의 이름만 각색된 그리스신화의 판박이로, 로마가 얼마나 문화적 정통성에 목말라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럴 즈음, 스토아철학(대략 기원전 3세기-기원후 2세기)의 탄생도 이루어진다. 끊임없는 전쟁격랑 속에서, 누구든 철학자임을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마음의 평화’가 중요하였고, 주장하기를, 우주질서인 로고스의 모습을 꼭 닮은 우리의 이성은 그리고 영혼은 마땅히 자신의 삶을 “자연처럼” 무사무편하고 엄격히 검박하도록 명령한다. 스토익에겐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인 것이다. 왜냐면, 인간신체가 동물의 일원(species)이듯, 우리 정신은 로고스의 일부parts이므로! 다른 말로, 우리 정신은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인 것이며, 청정심의 본질은 ‘부동심不動心(apatheia 혹은 un-passion)’이어서, 우리의 삶은 노장老莊처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정통철학(형이상학, 존재론)의 여유를 만끽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윤리적 판단과 도덕적 실천이 철학적 급선무였으므로 순수 사색보다는 행주좌와의 일상에서 선정적禪定的 태도와 행동이 우선이었다. 그들은 철학자라기보다 도덕적 현자 혹은 세간世間에 머문 선사禪師나 율사律師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식민지배로 막대한 영토와 부를 축적하고 더불어 수많은 전쟁포로와 노예 노동력을 제공받은 로마의 번영은 지극히 당연하였지만, 수차에 걸친 노예반란과 식민영토에서의 쉼 없는 항거 등 사회는 흔들리며 변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안정을 향한 변혁의 단초는 전쟁영웅 마리우스 장군이 집정관에 오르며(기원전 107) 민병제를 모병제로 바꾸는 군사개혁을 통해, 무산평민의 모병을 도와 사회적 안정을 꿰하는 동시에 전투력과 병력공급을 원할케하여 로마의 대외적 위상을 더 높였다. 더구나 마리우스는 자신이 평민출신이었던 기억으로, 식민통치를 받는 곳에도 로마공민권—어디서도 차별받지 않는 일종의 세계시민권—을 제공하자는 드루수스(Drusus)안案(기원전 91)을 지지하여 로마문명의 세계화를 염두에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정정政情은 늘 위태로웠고 심지어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그 진압을 통한 삼두정치(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시저)로 갈등을 겪다가, 드디어 시저(Caesars)의 절대완력에 의해 로마는 실질적으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며 제국시대의 막을 연다. 불행히도 시저는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였지만(기원전 45) 채 한해도 넘기지 못하고 암살되고, 로마는 2차 삼두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로 정권이 분열된다. 지체없이 패권다툼은 벌어지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가 마지막으로 함락되면서(Actium 해전, 기원전 31) 지중해 전역이 옥타비아누스 수중에 들게 되었고, 로마는 정식으로 옥타비아누스를 황제로 등극시키고 세존(Augustus)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명실공히 제국의 세력을 만방에 과시한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간 후반에, 저 멀리 팔레스타인 식민지역에서는 특별한 선민選民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이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머잖아, 식민지배의 어려움 속에서 갈릴리 출신의 예수Jesus라 불리는 젊은 사문沙門이 나타나 조상의 선민사상을 뒤로하고 누구에게나 희망의 복음이 열려있음을 설파하며 보편적 인간애를 호소하고 다녔다. 조상과의 약속인 십계十戒를 접어 내려놓고, 대신에 이계二戒(신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라!)면 충분하다며 보살도 실천을 외치고 다녔다. 많은 이들이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따랐다. 유대민족사에 구약과 신약이 대립하던 때였다. 이는 어쨌든 식민독재자들에게는 항거였고, 그 저항은 끈질겼고, 끈질긴 만큼 박해도 심했다. 불행히도 동족 유대인들의 반목으로 그 젊은 사문(Rabbi)은 죽음을 당하고, 그 죽음은 오히려 ‘새 시대’를 기다리며 핍박받던 식민치하의 더 많은 유대인들에게 승화를 통한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다. 유대교(Judaism)에서 기독교(Christianity)로의 변환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끈질긴 항거와 박해는 기독교인들의 전매특허였다. 무려 300년을 견디며 저항한 이들에게 드디어 로마제국의 칙령(Edict of Milan, 313년)이 떨어졌고 기독교 신앙은 합법적으로 허용되었고 빼앗긴 교회재산은 반환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몇 차례의 정통을 가리는 부파 결집—특히 신성神性에 관련하여 ‘삼위일체’를 둘러싼 이설異說—이 있은 후 정통교의가 제정되었고(Councils of Nicaea, 325년), 기독교는 법령으로 로마제국의 국교(테오도시우스 황제, 392년)가 되었다. ‘로마’는 당시엔 ‘세계’와 동의어였으므로, 기독교는 로마를 통해 비로소 세계종교로 잰걸음을 옮기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 아쇼카(Ashoka)의 ‘3차 결집’과 불교세계화 정책(기원전 4-3세기)이 겹쳐 떠오르는 장면이다.
이럴 때 쯤에, 이미 헬레니즘과 스토아철학도 물러가고 오로지 헤브라이즘에 바탕한 기독교신앙이 로마제국의 정신사를 가늠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교회가 곧 철학의 산실이 되었고 그 내용은 신학이 차지하게 되었다. 신학의 목표는 신성을 파악하는 것이었고, 신성은 절대성을 겨누고 있었고, 철학은 그 절대성에 대한 이념과 정의를 제시해 주는 것이 되었다. 당시의 철학을 ‘신학의 시녀’라 부른 이유이며, 흔히 교부敎父철학이라 일컬었다. 여하튼 그런 합목적적 철학자로 누구보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교부로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430)가 있다. 그는 이성과 지성을 중시한 그리스적 사유 전통에 단호히 브레이크를 걸고서, ‘절대적 신앙’에 각인할만한 새로운 “will-to-believe” 사고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에둘러 증명하려하지 않고 직설하였는데, 신성과 마찬가지로 인성의 본질은 지성(the intellect)이 아니라 의지(the will)라고 주장하였다. 신성의 기본요소인 전지전능은 오로지 그 전지전능성의 자유로운 사용에 대한 ‘신의 의지’만이 관심대상이 될 뿐이듯, 인성의 에센스도 신을 이해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왜냐면, 그것은 유한과 무한의 차이로 인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므로—신을 이해하고자하는 의지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즉, 지식(knowledge)이 행위(willing)를 결정지을 수 없고 도리어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the will가 앎을 가져다준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많이 배운 사람이 반드시 더 윤리적이라 말할 수 없는 증거이며, 남루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일지라도 결단코 청빈을 선택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의지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what determines the will? 아우구스티누스는 머뭇거리지 않고 “the will is free!”를 내놓는다. 인성과 신성이 맞닿은 곳이 바로 ‘자유의지’라는 선택성(ability to choose)에 놓여 있으며, 말하자면, 업보의 과정이 모두 연기緣起에 따른 ‘나의 선택(나의 탓)’임을 통보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필연적 숙명fate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 반면에 우리는 비록 책임을 져야하지만 ‘자유인’으로 창조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되고 ‘원죄’를 지어 에덴을 떠나 일체개고의 삶을 사는 것에 신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은 전지전능하지만 인간의 운명에 관여치 않고—이렇든 저렇든 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아닐 것이므로—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함으로써 신의 자유의지를 계시해 주는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