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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달마도達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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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 선과 그림이야기 - 김현정 2013년 06월 376호

심사정<달마도해達磨渡海> 간송미술관 소장.

지난 호에는 단원 김홍도(壇垣 金弘道, 1745~1806 이전)의 염불삼매에 든 스님의 모습을 그린 <염불서승도>를 감상하였다. 단원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를 많이 남긴 중에 불교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보여주듯 도교道敎 뿐 아니라 불교(釋) 그림도 많이 남겼다. 김홍도의 불교그림 중 대표적인 것은 이런 감상용 선화禪畵라기 보다는 용주사龍珠寺 대웅전 후불화인 <삼세불화三世佛畵>가 더 알려져 있다(물론 전공자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겠지만). 화성 용주사는 정조正祖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의 능침사로 창건한 사찰이다. 서울 경기 지역의 대찰들이 대부분 왕릉의 능침사찰이긴 하지만 이것은 원래 있었던 절들에게 능침사의 역할을 맡긴 것이지 용주사처럼 오로지 부왕의 능을 위해 절을 새로 짓다시피 한 것은 드물다. 정조는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군주였는데, 당시 사대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불교를 은근히 후원하는 정책을 폈다고 하는 연구도 나와 있다. 또 알려진 대로 타고 난 효자였으므로 융릉을 이장하고, 용주사를 건립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조가 가장 아끼던 화원 김홍도가 용주사 불화의 감독을 맡았던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김홍도가 용주사 불사를 감독하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당시 문인과 지식인들이 불교 사상에 경도되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도 역시 불교에 심취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당시 용주사 건축의 증명을 맡았던 고승 인악의첨(仁嶽義沾, 1746~1796) 스님과 깊은 교류를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선불교의 이론과 수행에 관심을 보였던 정황이 그의 그림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김홍도가 그린 <갈대를 꺾어 바다를 건너다(折蘆度海)>는 조선식 달마도이다. 몇 회전 현재 심사정의 달마그림을 비교해보자면 두 그림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보인다(여기에 17세기 화가 김명국의 달마도를 비교하자면 더욱 재밋을 것이다). 심사정의 달마 스님은 그야말로 자유분방, 맨발에 머리까지 덮어 쓴 가사는 허름하기 짝이 없으며, 타고 있는 갈대에 크게 달마도 작가도 무심했다. 실은 저 파도치는 바다에서 빈약한 갈대 하나가 뭐 그렇게 의지처가 될 것인가. 달마 스님은 큰 눈과 높은 코, 덥수룩한 수염의 전통적인 서역풍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자, 그럼 이 그림을 김홍도의 달마 스님과 비교해보자. 일단 인물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준수하다. 저렇게 멋진 외모로 어떻게 수행을 하시게 될지 걱정이 될 지경이다. 하지만 스님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아래로 향해있는데, 생각해보니 삼매에 든 고요한 경지의 눈길을 어느 방향으로 해야 할 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림 속 스님은 달마스님의 원래 차림새하고는 완연히 다르다. 옷 주름을 표현한 필선은 비교적 분방하지만 예의 달마도의 필선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장삼이나 가사도 깔끔하고 허리에 두른 털옷 비슷한 장식하며 깔끔하게 꼬아 만든 매듭 줄에 신발까지 정식으로 갖췄다. 여기에 더해 얼굴은 달마스님 본연의 서역인의 풍모가 아닌 조선인의 얼굴임에 틀림이 없다. 영, 정조 당시 유학자들은 이미 중화의 중심이 조선으로 옮겨 왔음을 주장하였는데, 불교 역시 동국(東國, 조선)으로 심장을 바꾸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 정도의 자신감은 능히 갖추고도 남았던 시절이고, 또 자신감만큼 뛰어난 사상과 문화가 풍미했던 시절임에 틀림없다.


김현정 님은 상명대학교에서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였으며 석가여래 설법도상 연구로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한국미술사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