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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오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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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 - 종고┃해인사승가대학 2학년 2013년 06월 376호

한밤중, 서늘한 바람 한 장이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이마를 적시고 지나갔다. 벽 속에 숨어 끊임없이 봄의 종식終熄을 타전하는 빗방울 소리는 얕은 잠에서 뒤척거리는 나를 깨웠다. 빗소리가 한가득 관음전에 채워지고, 잊혀 지지 않은 기억들이 되살아나 젖은 기억의 벌판을 절룩거리며 나에게 다가 왔다.

지난겨울 저녁, 수화기를 들고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떠나간 막내아들이 몹시 그리워 내가 자주 읽던 책 하나 꺼내어 밤새 읽으셨다고, 책에 써 놓아진 짧은글을 보며 그리움을 달래셨다고 했다. 보고 싶어도 쉬이 보고 싶다 말할 수 없는 어머니 마음이 느껴져서 그런지 목소리가 무척이나 수척하게 들렸다.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인 것은 나에겐 타고난 영광이자 복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소녀 같고 섬세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요리에 타고나 재주가 있고, 나를 다루는 데는 도인에 가까웠다. 내 어린기억으로는 그녀는 남에게 거짓말을 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몰인정하적이 없었다. 내가 재주가 많은 것은 어머니한테 배운 것이며, 내가 많은 결점이 있는 것은 어머니가 어린 시절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라지 못한 때문 일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 내가 길 가에 죽은 동물들을 보고 관세음보살을 외며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빌게 된 것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마음에서 부터요, 소녀 같은 미소는 어머니에게 배운 웃음이다.
어머니가 부처님 법에 귀의歸依 한 후부터 색깔이 튀거나 몸매가 들어나는 옷을 몸에 대신 적이 없었고, 여성이라면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법한 반지하나 없었다. 너무 꾸미고 다니면 어려웠던 시절에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라 지금의 당신모습이 부끄러워진다고 했다. 어머니는 항상 기도와 감사함으로 세상을 살려고 한다 하셨고, 본래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지극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내가 출가 한다고 했을 때, 의외로 어머니는 담담하게 “그래, 잘 생각했다”며 나의 선택을 지지 해주었다. 출가하기 전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 할 줄 몰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가슴 많이 아파하셨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참 많이 흔들렸다. 무엇이, 무엇 때문에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세상을 향하려 하는지…….
내 앞에서 항상 밝고 웃음이 많으신 어머니. 공항까지 바래다주던 그 날. 어머니는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어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며 잘 가라는 그 말이 조금은 서운해 막내아들 가는 길에 손은 흔들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아버지, 어머니 나 할 것 없이 그치지 않은 붉은 눈물에 헤어짐을 받아드렸고, 자기가 지은 업業이 많다며 미안함을 연신 말하는 어머니 모습을 뒤로 한 채 해인사로 향했다. 그때 어머니 눈물이 지금 내 생활의 나침판이 되어주니 어쩌면 나는 참 많은 것을 받으며 살고 있는 듯하다.
아들스님. 어머니가 기분 좋으시면 부르는 이름이다. 아들이면서 스님인 당신이 참 좋다고…….

어머니.
당신에게서 자비慈悲를 배우고, 보시普施를 배웁니다. 자비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보시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생활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누고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야말로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공양供養이 되고, 미소 짓는 얼굴이 보시가 되며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가만히 보듬어 주는 것이 자비됨을, 눈에 보이지 않는 배려가,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그리고 나 자신을 바꾼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못난 아들, 당신 삶을 보며 뒤늦은 참회懺悔를 합니다. 세상 그대 같은 분들 위해 기꺼이 눈물을 닦아드리며 세상의 밑받침이 되려합니다.
그러니 울지 마세요.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에 당신과 나는 이렇게 자라는가 봅니다.
구름이 흐르고 안개가 피어오르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향기가 짙어질 때쯤, 당신의 마음속에 작은 연꽃하나 자리하길 발원發願합니다.

떨리는 그대의 목소리에 꽃잎이 흩날립니다.

피천득皮千得님의 수필 인연因緣에 나온 문장을 다소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