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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stoteles의 논리학,‘세상너머’를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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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산책 - 종안┃해인강원 강사 2013년 06월 376호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가 주장한 사물의 변화와 생명체의 성장에 관한 목적론적 본질주의는 뉴턴의 기계론적 운동법칙과 다윈의 적자생존 진화론에 의해 거부되고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月刊海印 5월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탐구하여 당시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가장 과학적으로 숙지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한 뛰어난 학자였음에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게 엄밀하고 객관적인 주장을 위해, 즉 명증明證이 가능한 주장과 논박을 위해, 그는 보편타당한 학문적 방법론으로서 사실에 기초한 관찰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대미문의 소위 삼단논법(Syllogism)이라 불리는 형식논리학을 만들어 낸다.
삼단논법으로 대표되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주로 그의 저술 Organon(Categories, On Interpretation, Prior- and Posterior-Analytics, Topics, On Refutations)에 기술되어 있는데, 순서대로 간추려보면, 1)범주론: 세상에 관한 우리의 판단은 ‘주어subject-술어predicate’로 이루어진 명제 혹은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기본구조로서 주어에 해당하는 개체substance와 술어를 담아내는 개체의 시공간적 속성 및 성격(quantity, quality, relations 등)이 서로 엮어진 것이며, 2)명제론: 주어-술어 명제 또는 판단의 여러가지 종류와 의의, 3)분석론: 명제들에 기초한 추론推論의 성격을 규정하는 삼단논법과 그 타당성, 4)정의론: 개념이나 단어를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돕는 정의定義에 관한 연구, 5)오류론: 궤변적 주장에 대해 비형식적 오류를 지적하여 논박하는 방법 등이다. 다른 말로 바꿔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은 우리의 언어활동을 명증하게 하기위해서는 먼저 개념concepts(단어)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리고 개념들의 조합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명확히 판단judgments(문장)하고, 마지막으로 그 판단들의 앞뒤 연결을 ‘타당성 있게 (논리적[삼단논법]으로)’ 맞추어 비록 체험이나 경험이 없더라도 새로운 판단과 정보가 얻어지는 추론inferences(견해, 주장, 이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스스로 명증하게 연구한 업적이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명증성에 관해서는, 시대가 18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칸트(1724-1804) 같은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한 발짝도 더 넘어설 수 없는 완벽한 학문 this logic has not been able to advance a single step and is...a closed and completed body of doctrine(순수이성비판, B-viii)”이라고 칭할 만큼 빼어난 파워를 오래도록 누려왔다. 물론 19세기에 들어서서, 살아서는 결코 명성을 누리지 못했던 천재 논리학자 프레게(G. Frege, 1848-1925)의 ‘개념언어 Begriffsschrift(1879)’를 기점으로 논리학은 상상을 불허하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아리스토텔레스 삼단논법을 포함한 현대논리학으로 계승 확장되게 되었다. 프레게 논리학은 우리가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즉 컴퓨터와 인터넷에 기초한 정보화시대—를 여는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즉, 모든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본틀을 제공하는 ‘논리구조’을 제공한 것이다.
영국 수학자 튜링(A. Turing, 1912~1954)이 제안한 튜링머신Turing-machine을 효시로 ‘논리회로’에 뿌리를 깊게 내려 생명을 얻은 현대의 가공할 컴퓨터 파워는 시공을 뛰어넘는 가상의 세계와 인식의 지평을 무제한적으로 넓히는 발판을 내어놓았다. 실로, 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다운 가상공간에서의 삶은 이미 ‘세상너머’ 세상을 만들어 우리들로 하여금 마치 그리스 신들의 불멸성과 전지전능을 동시에 얻게 하는 듯하다. 세계도처에 산재해 있는 친구들과의 실시간 대화는 물론이고, 하늘 끝이든 바다 속이든 아니면 드높은 히말라야 설산의 바람의 모습까지도 인터넷에 상시로 열려있고, 가상의 ‘세상너머’ 세계에서 나의 아바타는 쉼 없이 자신의 세계를 거듭 거듭 창조해 내나니, 어찌 그리스 신들과 비교되지 않으리오! 머잖아 오래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꿈이 인터넷 상의 ‘빅데이타 BigData’ 도서관을 통해 실현되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얻게 될 사이버 집단지성의 ‘전지전능’이 결코 꿈이 아닌 때가 다가오고 있다할 것이다. 누구나 ‘관자재觀自在’보살이 될 수 있는 날이 오고 있을지 모른다. 이 모두가 일찍이 현대논리학의 원형prototype을 배태胚胎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있었던 덕분이다. 그 원형은 어떠하였을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토론을 즐겨하고 자기의 주장을 꺾지 않고 옳든 그르든 완고히 논증하려는 버릇이 있다. 때로는 억지를 부릴 수도, 때로는 감성에 호소하여 주장을 관철할 수도, 또 때로는 언어 자체의 모순과 숨은 함정을 지적하여 토론 자체의 무용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토론이나 설득이나 혹은 자기주장이나 이론의 제시가 필요할 때에,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에 연연치 않는다면 당연히 사실적 데이터와 논리적 서술에 끌리게 되고 결국은 인정하고 수용하게 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을 빌자면, 이성적 동물의 본질적 속성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그런의미에서 필연적 소산이었던 셈이다. 먼저, 개념의 올바른 이해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론definition을 마련한다. 주어진 단어(개념)의 종種species과 류類genus 개념을 찾은 후, 적합한 종차種差(species difference)를 찾아 명제를 만든다. 종차는 곧 그 종의 본질적 속성을 이룬다. 예컨대, ‘인간’의 정의를 얻으려면, 동물류 아래에 인간종, 늑대종, 토끼종 등에서 다른 종들에게는 속하지 않고 인간에게만 속한다고 믿어지는 종차를 발견하여, 말하자면, ‘인간은 두발로 걷는 동물이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등의 정의가 가능해 진다. 종차가 진정한 종차일수록—즉, 다른 종들과 공유하지 않을수록—그 종차를 사용한 정의가 가장 좋은 정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성(언어사용능력, 논리구성력)을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종차라고 선호했던 듯하다.
다음으로, 본질적 속성을 다루어 명제를 만들면 그 명제는 참truth이 되고 세상에 관한 지식을 이루어 과학적 혹은 학술적 지위를 얻게 된다. ‘올챙이는 개구리로 성장한다’; ‘얼음이 물에 뜨는 이유는 같은 무게의 물의 부피보다 팽창되었기 때문이다’; ‘직선은 두 점 사이를 가장 짧게 연결한 선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등이다. 이렇게 관찰과 직관을 통한 지식을 축적한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는 드디어 삼단논법이라 불리는 추론推論에 관한 공리체계—주어진 참 명제들로부터 관찰과 직관과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새로운 참 명제와 지식을 이끌어내는 연역법deduction—를 도입한다. 예컨대, [대전제]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소전제] 아무리 위대한 왕도 사람이다; [결론] 따라서, 아무리 위대한 왕도 결국 죽는다. 놀라운 것은, 주어진 각 문장의 참과 거짓에는 상관없이 그 엮인 구조가, 즉 추론 형태가, 결론이 전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예컨대, [대전제] 모든 개구쟁이는 천재다; [소전제] 옆집 영식이는 자기 반에서 꼴지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엄청 개구쟁이다; [결론] 따라서, 옆집 영식이는 천재다. 이 경우, 비록 대전제와 결론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연역추론 자체는 타당하며, 결론이 두 전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게 된다. 다른 한편, 약간의 응용을 가하면, “[대전제] 비가 오면 소풍가지 않는다; [소전제] 소풍가지 않았다; [결론] 따라서, 비가 왔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대전제] 비가 오면 소풍가지 않는다; [소전제] 비가 온다; [결론] 따라서, 소풍가지 못한다”에서 앞 추론은 오류이고 뒤 추론은 정당하다. 이유는 눈 밝은 독자가 찾아 줄 것임에 틀림없다.
논리는 대학의 논리학 수업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늘 상존하고 있으므로, 없으면 비로소 느껴지는 공기와 같은 것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우리의 하루는 새벽부터 밤까지 언어 없이는, 따라서 논리 없이는, 사회적 소통은 물론이고 스스로 자신과의 의사소통—즉 자신의 생각과 행동 및 그에 관련된 모든 상황의 연계성에 관한 인식—도 불가능하다. 잠에서 깨면 ‘깨어났음’에 대한 의식이 생기고, 하루의 일과에 대한 기억과 실행을 만들고,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 내려야 하는 숱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특히 기억이 가능한 이유를 포함하여, 우리는 한시도 논리를 놓아버리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 글을 읽어보며 이해하는 당신이 그 증명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용수의 수려한 논리학적 ‘중관’이 없었다면 아마도 부처님의 연기법이 명증하게 이해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다!